또다시 물에 빠진다면 인어 왕자를 두 번 만나는 행운이란 없을 테니 열심히 두 팔을 휘저어 나갈 거예요. 헤엄쳐야지 별 수 있나요. 어쩌면 세상은 그 자체로 바닥없는 물이기도 하고.
차 문을 열고 내린 남자의 코끝에 들꽃 냄새가 내려앉았고 밤의 술렁임은 귓바퀴를 간질였다. 미지의 움직임과 생경한 촉각들의 밤의 마디마디에서 저마다 기지개를 켰다.
꼽아보면 세상 어디든 있는 흔한 일이었고, 그것이 한 사람에게 연쇄적으로 닥쳐오는 일도 그리 드물지 않았으며 한 가지 불행은 철저하게 다른 연속된 고통의 원인이나 빌미가 되기 마련이었다.
곤은 자신이 언제부터 시간의 흐름과 무관하게 살아왔는지를 헤아리지 않았다. 비좁은 세상을 포화 상태로 채우는 수많은 일들을 꼭 당일 속보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으며 시대에 뒤떨어진 인간이 되지 않기 위해 애쓸 필요 없고 속도를 내면화하여 자기가 곧 속도 그 자체가 되어야 할 이유도 없는, 아다지오와 같은 삶.
모두 어제가 되어 부질없어진 인물과 사건의 나열들. 현재까지 여파를 미치고는 있으며 사람들은 그것을 역시라 부르지만 누군가에게는 무의미한 흐름들. 그는 과거를 명시하는 글자들을 단지 무료함으로 죽지 않기 위해서만 내려다보았다.
곤은 타인의 시선을 오래 견디지 못했다. 이미 그때로부터 세월이 충분히 흘렀고, 할 수 있는 만큼 자신의 자리를 옮겨 다녔으며 이제 와 새삼스레 누군가가 뒤를 밟아올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날 이후로 누구든 자신을 유심히 들여다보는 눈길은 언제나 질문 내지는 추궁 같았고, 자신의 손끝으로 부순 시간들을 떠올리게 하는 창문 같았다.
게다가 이름이란 게 성격을 넘어 그 사람의 인생을 압축 및 지배하는 주문이 된다는 미신적 사고에 비추어보면 그녀의 이름은 결코 물에서 죽을 사람 같지 않았다. 한 자리에 머무는 법 없는 바다의 흐름. 팽창하여 넘실거리는 물결의 긴장. 파도의 애무. 하백의 입김. 그 밖에도 그 이름은 서로를 향해 몸을 부대끼다 부서지는 물방울의 내밀한 언어를 떠올리게 했으며, 그토록 낭만적인 이름을 지닌 사람이 하필이면 그 이름의 뜻을 담은 물에 스스로를 포기할 리 없었다.
유명한 휴양지를 미션 수행하듯이 들러서 사냥하듯 사진을 찍고 그 시간과 공간을 프레임 안에 박제하는 것만이 여행인 건 아니니까요.
그녀는 다음 말을 이을 때 결코 깨뜨려선 안 되는 알을 품었다가 부화할 때가 지나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는 새처럼, 소중하고 찬란하여 차마 입 밖으로 발설함으로써 훼손할 수 없는 이름이라는 듯이 주의 깊게 숨을 고르고 나서야 이렇게 천천히 떼어 물었다.
”강하를, 알지요?”
비록 그렇지 않은 가정이 세상에는 더 많다 하더라도, 아이란 한 집안의 부서지는 관계를 지탱하는 일종의 축과 같다고 의사는 믿었다. 그 자체가 형식이자 내용인 존재가 아이라는 이름으로 사람들 사이사이에 닻을 내리는 것이며, 그런 아이에게는 제대로 된 사회적 명명의 부여되고 제도가 갖추어져야 했다.
얘, 쟤 대신 아이를 곤이라는 새 이름으로 부르기 시작하면서 노인은 아이가 정말로 이 세상에서 완벽하게 버려졌음을 깨달았다.
이 빛이 다른 사람들 눈에 띄면 귀찮은 일에 엮일 위험이 있어서만은 아니었다. 옛날 엄마는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눈부신 것, 빛나는 것, 귀한 것, 좋은 것은 숨겨놓고 혼자만 아는 거야. 남하고 나누는 게 아니란다. 그 말을 하고 일주일 뒤에 엄마는 분리수거를 미처 못한 폐지처럼 외할아버지네 집에 강하를 떠넘겼더랬다.
자신이 가지 못하는 곳에 곤이 있다는 사실이 주는 거리감과, 언젠가는 곤이 정말로 한 마리 물고기가 되어 다른 물고기 떼를 사이로 깊이깊이 헤엄쳐 들어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었다. 예감이 흔들고 지나간 미로의 바닥에는 길을 잃은 분노와 질투라는 이름의 잔해만이 남아 있었다. 수없이 겹이 덧씌워지는, 아직 발생하지 않은 장면들이 상상의 틀에서 벗어나 현실로 방생되고 있었다.
엄마의 치료비를 위해 그만둘 수 없었던 일에 인생의 가장 빛날지도 모르는 시간을 집중 투자했는데, 그 몰입의 자리가 최소한의 흔적과 습관만 남긴 채 쏙 두려빠지고 났더니 내 삶은 허허벌판인 거예요. 그래서 앞날에 대한 아무런 기대도 의욕도 없이 홀가분한 몸으로 당분한 여행을 떠나고 싶었지요.
그 글에 나타난 사람을 알고 그것이 상상 아닌 실존임을 이해하는 건 세상에 우리뿐이라는, 일종의 폐쇄적 공유의식이 생겨났어요.
곤, 그에게 있어 당신은 어쩌면 일찍이 들어본 적 없던 세계의, 이해할 수 없는 언어로 직조된 존재였어요.
남과 같지 않은 것은 그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증오의 대상이 돼요. 아니면 잘해야 동정의 대상이 되는데, 그것은 타인이 시혜하는 동정과 그에 수반하는 불편한 시선을 기꺼이 받아들이겠다는 수혜자의 합의 아래에서 보통 이루어지곤 해요. 당신에 대한 강하의… 글쎄요, 그 불합리는 과연 뭐였을까요, 그 긴장과 불안과 원망은.
강하는 그 혼란을 평범한 일상이 주는 초조 정도 차원으로 수용하려 했어요. 그 과정에서 당신에게 상처 입혔다는 사실을 스스로도 알고 있었어요. 당신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실제론 아무것 아닌 게 아니라 오히려 모든 것이라는 사실과, 거기에서 비롯되는 괴리감을 견딜 수 없어 했어요.
이곳은 이념의 집이기도 했다. 자리를 오랫동안 비웠다 돌아와서도 주권을 주장할 수 있는, 부모란 그런 것이었다.
햇빛을 얻어 반사해야만 하는 구차한 물리적 존재들과 달리, 아이의 등에 돋아난 것은 그 자체가 빛의 절대량을 보유하고 있어서 그토록 청완하고 눈부신 것만 같았다. 그 등에서는 마지막으로 언제 가보았는지도 기억이 가물거리는 바다 냄새가 끼쳤다. 아이의 몸에 밴 것은 그저 수돗물이나 호수에 지나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바다를 느꼈다.
“…… 물론 죽이고 싶지.”
작은 불꽃이 그대로 사그라지는 바람에 곤은 그 말을 하는 강하의 표정을 볼 수 없었다. 곤한테 다시 후드를 씌운 뒤 조임줄을 당겨 머리에 단단히 밀착시키고 강하는 이어서 말했다.
”그래도 살아줬으면 좋겠으니까.”
살아줬으면 좋겠다니! 곤은 지금껏 자신이 들어본 말 중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예쁘다'가 지금 이 말에 비하면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지를 폭포처럼 와락 깨달았다. 언제나 강하가 자신을 물고기 아닌 사람으로 봐주기를 바랐지만 지금의 말은 그것을 넘어선, 존재 자체에 대한 존중을 뜻하는 것만 같았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의 마음은 매순간 흔들리고 기울어지는 물 위의 뗏목 같아요. 그 불안정함과 막막함이야말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받아들이는 유일한 방법 아닐까요. 우리가 누군가를 사랑할 때 확신할 수 있는 단 한 가지는, 이 마음과 앞으로의 운명에 확신이라곤 없다는 사실뿐이지 않을까요.
장자의 첫 장에는 이런 얘기가 있거든요. 북쪽 바다에 사는 커다란 물고기, 그 크기는 몇천 리나 되는지 알 수 없는데 이름은 곤鯤이라고 한다…… 강하는 당신의 아가미를 제일 먼저 발견한 사람으로서 이거야말로 이 아이한테 가장 어울리는 이름이라는 생각이 들었대요. 하지만 그래놓고는 당신의 이름을 부른 적이 거의 없었죠. 그건 그다음 장에 있던 한 줄이 일종의 예언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에요. 이 물고기는 남쪽 바다로 가기 위해 변신하여 새가 되는데 그 이름을 붕鵬이라고 한다. 그의 등은 태산과도 같이 넓고 날개는 하늘을 가득 메운 구름과 같으며 한 번 박차고 날아오르면 구만 리를 날아간다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