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하게 웃어주면 결혼까지 생각하는 남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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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박정훈, 내인생의책
그들은 나를 포함한 여성을 동료 시민으로 보지 않았다. 인간으로서의 특질이 묵살된 채 오로지 여성이라는 정체성 혹은 몸뚱이로만 환원되는 경험을 뚫고 나아가기 위해 몇 번이고 이를 악물던 순간들이 있었다.
여성과 맺는 관계의 궁극을 ‘섹스'로 놓는 문화 안에서 성애 이외의 것은 부차적인 요소로 취급당한다. 그래서 어떤 남성들은 성격에 따른 혹은 일로서 행해지는 친절과 웃음을 제대로 해석하지 못한다.
페미니즘은 여성 인권을 증진하기 위한 이론이자 운동이다. 동시에 남성 중심주의 사회에서 비뚤어진 남성성을 바로잡는 방법론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의 여성의 입장에서 사고하고 공감할 수 있는 남성을 만들어 가며, 기존의 남성성을 해체하는 계기를 마련할 것이다. 남성들을 착각의 늪에서 구해 내고, 여성과 동등하게 관계 맺는 즐거움을 누리게 하기 위해서라도, 페미니즘은 남성에게 필요하다.
사실상 젠더 권력과 위계에 의한 권력을 동시에 가진 남성들에게 고백은 여성을 다루는 수단에 가깝다. 남성 본인의 의도가 어떻든 결과적으로 이런 형태의 고백은 거절하기 까다로운 상황을 만들어 여성을 궁지로 몰아간다. 남성이 고백해서 얻는 최악의 결과는 거절뿐이지만, 여성은 날벼락 같은 고백을 거절할 경우 예상되는 불편과 불이익을 고민해야 한다.
한국의 고백 문화가 ‘피해자 남성 모델'과 ‘썅년 서사'를 지탱하는 축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다. 상대방이 예상하지 못하는 고백, ‘어쩌라고' 싶게 만드는 고백은 감정의 배설일 뿐이다. 배설을 왜 자꾸 정당화하거나 부추기는가?
오늘날 한국 남성은 식민지, 내전, IMF 등을 거치면서 무너진 국가, 망해 버린 아버지에 자신을 동일시할 수 없었다. 게다가 이제는 여성을 자기보다 못한 존재로 타자화해 보편의 자리를 차지하기엔, 여성의 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을 의식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전히 정상 가족을 만들어 가족을 지키고 생계를 부양하는 ‘남자다움'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남자다움을 구현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보편적 주체가 되지 못하는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 남성들은 ‘피해자 되기' 방식을 택한다. 누군가의 가해를 받아 고통을 겪는 척하며 사회적 압박과 책임을 피한다.

이런 움직임이 고착화되어 가부장제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여성을 탓하는 방식으로 해소되는 경우가 있다. 이를테면 군대 문제를 향한 분노가 갑자기 ‘군가산점 위헌 반대'나 “여자는 왜 군대에 안 가느냐"라는 쪽으로 방향을 튼다.
자신을 무시당하고 멸시받는 피해자로 믿고 자초하면서도, 동시에 가해할 힘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고 그 힘을 발휘하는 것. 이것이 한국 남자들이 가진 모순이다. “왜 안 만나줘" 시리즈 범죄에는 한국 남성의 잘못된 관계 맺기, 관계에서의 문제 전가, 피해자로서의 정체성 구성 등 사회를 망치는 남성성의 비참한 모습이 총체적으로 담겨 있다.
‘맨 박스'는 존재한다. 그러나 맨 박스가 여성을 억압하는 기제로 작용하는 이상, 여성 대상 폭력의 정상참작 요소가 될 순 없다.
평범한 가부장의 삶 자체가 끊임없는 불로소득의 추구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불로소득이란 ‘가사와 돌봄 노동을 제공받기만 하는 것'을 뜻한다. 실제 소득은 아니지만, 따로 구매하려면 돈이 든다. 더 많은 연봉이나 지위를 누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무형의 자산이나 다름 없다.
20년 동안 가정 폭력을 당하다가 ‘살기 위해' 살인을 선택한 여성의 처지는 고려 못 하면서, ‘다른 남자' ‘외도'라는 증언만 나오면 아내나 여자친구를 죽인 남성에게 감정이입하는 재판부. 하지만 이런 행태를 이제 시민들이 보고만 있지 않을 것이다. 정의롭지 못한, 젠더 관점이 부재한 판결은 페미니즘 리부트의 영향으로 예전과 달리 언론을 통해 여과 없이 보도되며, 여성들은 크게 분노하고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남자가 그럴 수도 있지'라는 식으로 판결한다면 분명 거대한 저항을 맞이하게 될 거라고, 사법부에 똑똑히 일러둔다.
한국 남자들은 ‘나'밖에 모르는 채 자기중심적으로 성장해 왔다. 자신의 위치나 자신이 가진 권력에 대해 무지한 나머지 자기 연민에 빠져 남을 괴롭힌다. 부장이 부하 직원에게 사적 만남을 요구하는 행태가 어마어마한 압박이자 ‘더러운 짓'이라는 사실을 모른다. 군대 간 것이 너무 억울해 채용 성차별이 빤히 벌어지는 상황에서도 ‘역차별'을 운운한다.
아들이 보고 자라며, 궁극적으로 지향하게 된 모델은 ‘앉아서 받아먹는 아버지'였다. 남자들이 평소에는 사회화된 태도로 식사하다가도, 집에서 유사 엄마(애인이나 아내)와 있을 때 갑자기 ‘먹방 모드'가 되는 배경이다.
그들이 정말 남성 인권 개선에 대한 절박함이 있었다면, 군대부터 없애야 한다고 광화문 광장에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역차별을 이야기하는 젊은 남성들은 정확히 말하자면 자신의 삶이 나아지길 바라는 게 아니다. 그들은 그저 여성들이 닥치고 있기를 바란다. “여성이 약자인 척 하지 말고, 남성을 비난하지도 말고, 예전처럼 평화롭게 살자"라는 속내다. 성차별은 없고, 성폭력은 아주 특이한 일부의 사례일 뿐인 그들이 상상하는 세상 속에서 페미니즘은 ‘불공정한 우월주의'일 뿐이다.
‘나도 피해자'라고 말하는 폭로가 ‘미투'를 완성했다면, 강간 문화는 ‘나도 가해자'이기 때문에 침묵으로 완성된다.
그런데 상당수의 남자들은 침묵을 넘어, 적반하장으로 여자들을 물어뜯고 있다. 만약 불법 촬영에 대해 문제의식을 느꼈다면 적어도 앞으로 불법 촬영물만큼은 보지 않겠다는 이야기부터 나와야 한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이 가해자임을 알고 있다. 집단 망각 증세다. 2018년 워마드 유저가 불법 촬영 범죄를 저질렀고, 심지어 워마드에서는 피해자를 향한 조롱이 이어졌다. 많은 남성이 분노했다. 그런데 워마드가 한 일, 실상 남자들이 전부 해왔던 일이다. 물론 불법 촬영이나 불법 촬영 피해자를 조롱하는 행위는 ‘미러링'이라는 말로 정당화할 수 없다. 그러나 살아오면 줄곧 ‘여성 대상 범죄 행위'를 즐겼던 당신들이 어떻게 성별만 바뀌었다고 분노하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남자들은 분노할 자격이 없다. 그저 가해자임을 한없이 부끄러워해야 할 뿐이다.
여성 학우를 동기나 후배가 아닌 마음껏 평가할 수 있는 몸으로 규정하는 행위, 이것은 그들끼리 ‘남성'임을 승인하는 절차다. 앞으로 이 남성들이 우정을 쌓기 위해 무엇을 주제로 이야기할지는 너무나 자명하다.
누군가를 비하하거나 도구화하지 않고서는 힘을 얻지 못하는 언어라면, 그 언어의 토대란 얼마나 빈곤한 것인가? 대중을 상대로 언어 예술을 하는 사람들이 단순히 ‘내가 쓰고 싶어서' 혹은 ‘그게 가장 정확하다고 느껴져서' 혐오를 담은 발화를 한다? 고민 안 하는 것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내가 생각하기에 명절은 무너져 가는 가부장제를 복구하기 위해 매년 두 번씩 열리는 애달픈 축제다.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현대인을 ‘가부장제 기반 정상 가족 부흥회'에 억지로 끌고 온다. 제아무리 잘난 여성이라도 이 축제에서는 그냥 ‘며느리'가 된다. 오랜만에 남자와 어른을 중심으로 서열이 정해지는 것을 보면서 가부장제는 ‘아직 우리 안 죽었지'라며 숨을 헉헉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