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마지막 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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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박충구, 동녘
인간은 사유와 행동을 콩해 삶의 의미를 물으면서 살아가는 존재다. 그 인간됨의 ‘총체적 상실(Total Loss)’로서의 죽음은 결국 인간 존재를 무화(無化)한다. 그러므로 죽은 이는 이제 인간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혹자는 죽음이란 ‘생명의 정지이지 관계의 정지는 아니다'라고 주장한다. 그러한 주장은 죽음 뒤에 남겨진 존재에 의미를 부여하려는 노력에 불과하다. 산 자는 죽은 자가 삶의 영역에 되돌아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기 때문이다.
당시 대법원은 회복될 가능성이 없는 고령 노인에 대한 무의미한 연명치료가 오히려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를 훼손할 수 있다고 보았다. 사망 단계에 이르러 회복이 불가능한 환자가 인간으로서의 존엄성과 가치 및 행복추구권에 기초하여 삶을 마치겠다는 자기결정권을 행사하려 한다면 이를 존중해야 한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은 이런 사유로 김 모 할머니의 연명치료 중단을 승인했다. (2009-5-21)
나의 죽음은 내가 경험할 수 없는 사건이다. 다만 스스로의 죽어가는 과정을 경험할 뿐이다. 그리스 철학자 에피쿠로스(Epicurus)가 주장했듯이 죽음 직전까지의 경험이 아마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최대치일 것이다. 죽음이 찾아온 순간 죽음을 경험할 자신은 이미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죽음과의 만남은 불가능하며 죽음 그 자체를 경험할 수가 없다.
낯선 이의 죽음은 죽음의 그림자를 엿보게 할 뿐이지만 사랑하는 이의 죽음은 죽음의 폭력성을 격렬히 맛보게 한다. 사랑하는 이와 맺었던 관계의 총체적 부정이기 때문이다.
‘신(神)이여, 거듭하는 슬픔으로 나의 영혼을 태워 나의 영혼을 정화하소서.’
- 유달영, <슬픔에 관하여>
<사람은 어떻게 죽어가는가>를 쓴 미국 외과의사 셔윈 누랜드는 말했다. “누군가 죽어가는 순간에는 그 사람의 질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어떻게 살았고 어떻게 기억되느냐에 따라 그의 삶의 가치가 드러난다.”
만일 오랜 병상의 세월을 보내는 노인이 있다면 존중하라. 그 모습을 결코 추하다 하지 마라. 그는 사랑하는 사람들을 힘겹게 만들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사랑과 결별을 준비하는 시간을 주기 위해 힘겹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헤어짐은 헤어짐다워야 한다. 오랜 사랑의 무게는 시간의 절약을 미덕으로 삼지 않는다. 안녕이라는 인사는 기능적이지만,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고 나서도, 적어도 동네 어귀까지 나가서 떠나는 이의 꼭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손을 흔드는 것이야말로 인간에 대한 참된 예의다. 그것이 작별이다.
- 정재창, <시를 잊은 그대에게>
영혼 불멸설은 훗날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에서 더욱 공고해졌다. 영혼의 구원이 삶의 궁극적 목적으로 간주되었는데 죽음 너머까지 연장될 내세를 현세보다 낫다고 여김으로써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극복하라는 가르침이었다.
죽음은 많은 경우 급습의 형태로 다가온다. 건강하게 살다가 노환으로 죽는 경우를 제외하면 대부분의 죽음은 급작스럽고 ‘때이른' 죽음이다.
전쟁과 영양실조와 질병으로 인해 이른 나이에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의미를 찾으라고 요구하는 것이 과거의 윤리였다. 당시의 지배계층이 고안해낸 사회규범은 과거의 복종과 질서에서 이탈한 이들을 정신병자로 규정하거나 자살자의 사체를 모독하며 엄한 징벌을 가하는 것이었다.
죽어가는 이가 겪는 극심한 고통의 문제에는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았고 아무리 고통스럽더라도 죽을 때까지 참고 견디는 것을 당연시했다. 종교에서는 그러한 고통 역시 신의 뜻에 따른 것이므로 의미가 있다고 가르쳤다. 그 결과 개인의 고통은 비정할 정도로 간과되었고 철저하게 외면당했다. 신의 뜻이라는 종교의 가르침에 어느 누구도 단서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의료적 생존과 의료화된 죽음은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지키는 것인가, 제한하고 박탈하는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