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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피컬 나이트
Grit Han
조예은, 한겨레출판
page.68
릴리의 손
이방인들은 평생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그리워하곤 했다. 얼굴조차 모르는 누군가를 두고 왔다는 생각에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그들을 기억하지 못하는 스스로를 경멸했다. 흰 종이에 연필로 쓴 글을 지우개로 지운다 해도 자국이 남듯이, 사라진 기억은 흐릿한 자국을 남겼다.
page.77
릴리의 손
사실 오래 버텼다. 애초에 로봇이나 실제 인간처럼 ‘본체’에 덧붙어 있어야 하는 부위였다. 있어야 할 곳에서 튕겨져 나와 마지막 에너지를 쥐어짜내는 모습에서 연주는 어떤 동질감을 느꼈다. 연주는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손을 붙잡았다. 이번에도 깍지를 끼고서, 진짜 피부보다 조금 더 부드러운 가짜 피부를, 기계손의 손등을 자신의 뺨에 가져다 대었다. 어떤 온기도, 혈액이 오고 가는 두근거림도 없었다. 움직이지 않는 손은 그저 신체의 일부를 본뜬 고장 난 부품일 뿐이었다.
page.91
릴리의 손
“이런 기분 모르겠지? 어느 날 갑자기 알맹이는 빠져나가고 껍질만 남은 기분. 원래 껍질은 알맹이를 보호하기 위해 생기는 거잖아? 그런데 알맹이가 없는 거야. 그럼 안에 아무것도 없는 껍질을 누르면 어떻게 되게? 그냥 푹 찌그러지는 거지, 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