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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실수로 투명인간을 죽였다
Grit Han
경민선, 팩토리나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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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이지 않는 시체
내가 사는 투룸 자취방은 현관문을 열고 거리로 나가려면 반드시 계단을 올라야 했다. 반지하 생활자의 숙명이었다. 집을 나설 때마다 하는 생각이지만 계단은 야박하고 괘씸한 물건이다. 20센티미터 높이의 계단을 하나 오르기 위해선 최소 21센티 이상 발을 올려야 했다. 18, 19센티 정도 발을 들고 계단을 오르겠다 주장할 순 없다. 최소한의 합격선을 넘지 못한 자에게 세상은 반 계단조차 인정해 주지 않는 법이다. 이 계단의 법칙이 나를 반지하에 살도록 만들었다. 늘 15센티 정도 발을 들었다가 포기하고는 금세 다른 계단을 찾아 전진해 온 결과, 나는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미처 한 계단도 못 오르고 층계 앞에서 탭댄스만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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갚지 못한 빚
설령 사사녀와 묵인의 존재가 전부 사실이라 해도 마찬가지였다. 전설의 용과 싸워 세상을 구하고 싶어 하는 소년은 내 마음속에서 최소 9년 전에 죽어버렸다. 우주의 비밀보다 다음 오디션의 당락 여부를 더 궁금해하는 시시한 어른으로 자랐을 뿐이다. 무섭기만 하고 득 될 건 없어 보이는 일에 깊숙이 발 담그기가 겁났다. 그래, 재밌는 수다였다. 몇십 년이 지나도 오늘 일은 재미있는 술자리 안주로 써먹을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결론지으며 내 반지하방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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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유어 아이즈
“그럼 어차피 철조망도 못 넘을 텐데 왜 컨테이너에 가둬두는 건데요?”
”그래야 자신들을 인간이 아니라 가축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묵인들 중에 자기 종족을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이는 드물어. 내가 아는 정보를 전달하지도 않아왔어. 여기서 지식은 명을 단축할 뿐이거든.”
“난 십사남이다. 이곳에서 가장 연장자고 가장 많은 걸 봐왔어.”

십사남이라는 묵인의 이름을 듣고서야 나는 사사녀의 이름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름은 숫자와 성별을 붙여놓은 것에 지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