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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가 제철
Grit Han
안윤, 자음과모음
달밤
그런 상품을 발견하면 일단 장바구니에 담긴 하는데 결제하려고 보면 씁쓸해져요. 지금 당장 필요하지 않은 물건들을 이 비좁은 집에 쌓아둘 걸 생각하면요. 물건은 쌓여 있는데 내 가난은 외려 더 불어나 있는 기분이랄까요. 1인분의 삶이라는 건 소비를 하기에도 비축을 하기에도 적당하지 않은 것 같아요. 지금도 싸다고 사놓은 치약이며 휴지, 짜장라면, 생리대, 기억나지 않는 물건들이 집 구석구석을 채우고 있어요.
우리는 우리 가난을 안주 삼아서 새벽까지 술을 마셨죠. 그날 소주가 왜 그리 달았나 몰라요. 술이 달면 늙은 거라면서요. 내가 언니 빈 잔을 채우며 그랬죠. 술이 써도 늙어. 술맛을 몰라도 늙고. 다 늙어.
시를 생각하지 않아도 쓰지 않아도, 읽는 것조차 하지 않아도 하루가 가요. 실은 너무나 잘 가요. 기어코 가고 만다는 건, 가면 영영 돌아오지 않는다는 건 불안한 안심 같은 거더라고요. 불행한 행복 같은 거요. 언니, 내가 다시 쓸 수 있을까요. 내 시와 화해할 수 있을까요.
이제 다시는 돌이켜지지 않은 세상, 언니가 남기고 간 나머지의 세상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어요. 그것을 내 몫으로 인정해야만 했어요. 인정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어요. 살아 있는 나는 이제 뭘 해야 할까. 언니가 없는데, 언니가 스스로 없기를 원했는데 살아 있는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살아 있는 나는, 살아 있으니 살아. 살아서 기억해. 네 몫의 삶이 실은 다른 삶의 여분이라는 걸 똑똑히 기억해. 그렇다고 너무 아까워도 말고, 살아 있는 나를 아끼지 말고 살아. 집에 와 외투를 입은 채로 책상 앞에 앉아 수첩에 그렇게 썼어요. 날짜를 보니 거의 2년 만에 쓴 메모더라고요. 몇 시간 전, 언니 앞에서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쉼 없이 쏟아졌어요.
방어가 제철
나는 그만 엄마가 편안해지기를 바랐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언제까지나 곁에 머물러 있어주기를 바랐다. 그 두 개의 희망이 내 안에서 같은 무게로 번갈아 가라앉을 때마다, 그 일렁임이 내 삶에 멀미를 일으키고 차라리 절망의 편으로 도주하고 싶을 때마다 나는 오늘이 아닌 앞으로의 일들을 생각했다. 내갸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손꼽아보았다.
추웠겠네요.
춥더라, 바다는.
정오가 물방울이 맺힌 유리잔을 가만히 쥐었다.
재영이가 아직 거기 있을까.
없죠. 있는 건 우리지.
가끔 생각한다. 내가 왜 오래전 연락이 끊어진 정오의 연락처를 사방팔방으로 수소문해 엄마의 장례식 소식을 그에게 전했는지, 그가 왜 다시 내게 연락을 해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제철 음식을 사주었는지, 우리가 왜 3년 동안 만남을 이어갔는지. 생각의 끝에는 언제나, 그 일들의 이유가 모두 같으며 그러므로 단 하나의 이유라는 것을 알게 된다. 곧 방어가 제철인 계절이 온다.
만화경
지구가 점만큼 작아지고 태양계와 우리은하도 점만큼 작아진다. 더 먼 우주마저도 마침내 하나의 물방울만큼 작아지고 그런 물방울들이 모여 수없이 많은 물방울이 되고 강이나 바다처럼 보이게 되는 순간을 보고 있으면 나경은 등골이 서늘해졌고 동시에 어떤 안도감이 들었다.
알게 된 후에는 그것을 모르던 예전의 자신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리는 일들이 있다.
이미리내라는 이름을 알게 된 후 그 이름을 모르던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돼버렸다는 것을 나경은 잘 알았다. 서른세 개의 야광별이 뜬 베란다에 서서 조용히, 온전히 흩어지는 희뿌연 연기를 올려다봤다.
에세이_없는 것들이 있는 자리
당신이 이 지구에 없을 훗날에도 당신이 썼던 모가 닳은 칫솔, 끊어진 머리끈, 깨진 머그잔은 땅속 어딘가에 묻혀 있을 것이다. 그렇게 썩지도 않고 남겨질 것들을 생각할 때마다 당신은 질끈 눈을 감는다. 이대로 정말 괜찮은 걸까. 물론 괜찮지 않다. 살아가는 일이 죄스럽다. 당신은 수거차가 다녀가기 전에 늦지 않게 쓰레기를 내놓기로 한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반투명한 비닐봉지에서 달그락달그락 앓는 소리가 난다.
1년, 2년, 3년…… 한 해 한 해 지날 때마다 당신은 그가 떠난 시간을 헤아리는 일이 당신을 겨냥한 욕설처럼 느껴진다. 당신의 외면적 삶은 그럭저럭 굴러간다. 쓸모 있는 사회의 일원이 되려고 부단히 노력한다. 사랑도 한다. 끝을 알고도 시작하는 사랑이다. 이별도 한다. 사랑만큼이나 서툴고 엉망진창이다.
당신의 내면적 삶은 망가져간다. 안으로, 더 깊이 곪는다. 참을 수 없이 수치스러운 날이 찾아올 때면 더, 있는 힘껏 망가진다. 아주 망가져버리지 못해 부끄러워하고 그 부끄러움을 만회하기 위해 내일을 맞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