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랜드

Created by
  • Grit Han
천선란, 한겨레출판
page.18
흰 밤과 푸른 달
명월은 툭하면 옛날 같다고 했다. 옛날이 뭐가 좋다고. 거기에 엄청난 추억이라도 있는 것처럼. 강설은 아무리 톺아보아도 마음을 두고 온 시절이 없다고 느꼈다. 짓이겨져 들러붙은 마음은 있었을지라도. 그런데 명월의 말만 들으면 명월과 자신이 대단한 시절을 보낸 것만 같았고 그래서 싫었다. 완전히 떠나왔다고 생각했는데 자신이 놓친 순간이 잇을까 봐 자꾸만 돌아보게 했다.
page.27
흰 밤과 푸른 달
명월은 강설과 둘이 했던 조촐한 스무 번째 생일에 혼자 소주 한 병을 다 마시고 방바닥에 드러누워 이렇게 말했다.

등에 뾰족뾰족한 털이 나 있는 기분이야. 안을 찌르는. 숨쉴 때마다 따갑고 뻣뻣한 털이 오므라들었다가 솟았다가 해. 뽑고 싶은데 그 끝이 핏줄이랑 연결된 기분이야. 하나 뽑으면 핏줄까지 딸려 나와서, 줄줄이 나와서, 심장까지 다 뽑힐 거 같아.

명월은 그 말을 하면서도 웃었고, 강설은 맥주 한 잔에도 기분이 알딸딸해져 명월을 따라 벌러덩 누웠다. 명월이 고개를 돌려 강설을 바라봤다.

나는 네가 부러워. 너 진짜 잘 안 웃어. 상대방이 몇 살이든, 어떤 사람이든 상관 안 하고 네 기분에 따라 행동하잖아.
욕처럼 들리는데.
진짜 부러워서 그래. 나는 나도 모르게 웃고 있는 내가 가끔 징그러워.
page.75
바키타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은, 문명의 인간들은 절대적인 힘의 차이를 느끼고 바키타와 함께 사는 전략으로 바꿨다는 겁니다. 공존이라는 말이 맞을지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틀린 표현은 아니지요. 인간도 가축과 공존하며 살고 있다고 표현하지 않았습니까. 지금도 다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위치가 가축으로 바뀌었다는 사실만 다르죠. 문명 인간에게서 보이는 진화가 숲속 인간들과 다른 이유도 여기에 있어 보입니다. 바키타에게 위협적인 존재로 비춰지지 않도록, 자신의 의사를 더 잘 전달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문명 인간과 숲속 인간은 비슷하지만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네발이 달렸다고 해서 말과 소가 같게 느껴지지 않듯이 말입니다.
page.177
이름 없는 몸
비를 맞으며 집으로 가는 내내 내가 그런 생각을 했다는 것이 참 이상했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니. 내가 어떤 애인지 아무도 알지 못하는 곳으로 도망치고 도망쳐 이곳까지 왔으면서 누구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니. 친해진다는 건 까발리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보여지는 내 모습이 아니라 살가죽을 뒤집어 내 안에 있는 나를 보여주는 것이다. 나는 그런 수고로움을, 누군가와 친해져 내 안을 까발리고 상대방의 야들야들한 속살을 끌어안는 짓은 다시 하고 싶지 않았는데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어쩔 수 없이, 기어코 일어나야만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그 감정이 죄스러워 비를 맞고 가다가 울었다.
page.184
이름 없는 몸
하지만 엄마에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엄마에게는 엄마와 꼭 닮은 여동생이 세 명이나 있었다. 그 동생들이 공부도 하고 취업도 할 수 있도록 엄마는 결혼을 했다. 그때 나는 엄마의 결혼과 이모라는 사람들의 삶이 어떻게 연관 지어지는지 몰랐지만 더 묻지 않았다. 그것을 묻는다는 건 엄마가 애써 누르고 있던 무언가를 끄집어내는 것 같았고, 그렇게 되면 엄마가 나를 이곳에 두고 그리운 곳으로 갈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어떤 것도 묻지 않고 엄마를 꼭 끌어안았다. 엄마는 위로한다고 생각했겠지만, 실은 나를 두고 가지 말라고 내 흔적을 엄마 몸 곳곳에 묻히려는 거였다. 엄마에게 나는 징그러운 거머리 같은 존재였다.
page.195
이름 없는 몸
여자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마을을 떠났던 여자가 돌아온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똑똑한 여자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고, 또 시집을 오지도 않는다고 했다. 멍청하고 돈이 없는, 가여운 여자들이 이곳에 시집을 온다고 했다. 삶의 기준은 대개가 엉망진창이었다. 내가 보기에 이곳에 있는 여자들은 부지런하고, 일도 잘했으며 낯선 언어를 빠르게 배울 정도로 머리가 똑똑했음에도 모자라고 부족한 사람으로 분류되었다.
page.218
이름 없는 몸
엄마는 시집오기 전에 번호로 불렸대. 예비 신부 몇 번. 인터넷에 그렇게 이름이 올라가는 거야. 엄마는 327번. 예뻐서 조회수가 가장 높았대. 그러다 아빠가 가장 값을 높게 불러서 온 거야. 그 후에는 한국식에 맞춰 개명을 했지만 그 이름조차 안 불렀어. 혼을 뺏으려고.
혼?
응. 이름을 잊게 해서 정체성을 흐리게 만드는 거야. 이름이 불리지 않는다는 건 결국 내가 누군지 잊게 된다는 거고,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빼앗기는 거야. 뭔지 모르는 것에게. 그럼 이름 없는 몸이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