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하맨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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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rit Han
조남주,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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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호, 진경
“우리는 누굴까. 본국 사람도 아니고 타운 사람도 아닌 우리는 누굴까. 우리가 이렇게 열심히 성실히 하루하루를 살아가면 뭐가 달라지지? 누가 알지? 누가, 나를, 용서해 주지?”

진경은 계속 입을 다물고 있었고, 도경은 길게 한숨을 내쉰 후 등을 돌려 누우며 덧붙였다.

”나도 타운 주민이 되고 싶어.”

타운 주민. 주민. 그리고 한 달 후, 도경은 수와 함께 714호로 독립해 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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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1호, 진경
맨션에서는 사소한 싸움이 자주 일어났다. 타운 주민을 때리거나 난동을 피워 경찰에 끌려가는 경우도 적지 않았는데 상대는 대부분 약속을 지키지 않은 업주였다. 결국 맨션 사람들이 돈을 못 받거나 치료를 못 받는 것으로 사건은 마무리되었다. 대가가 보장되지 않는 단순한 일을 기계처럼 반복하는 삶은 뒷걸음질 같았다. 두렵고 더디고 힘들게 도착하고 보면 늘 더 못한 자리. 맨션 사람들은 어려지고 유치해지고 단순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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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호, 사라
“괜찮아?”
”난 이제 지렁이나 나방이나 선인장이나 그런 것처럼 그냥 살아만 있는 거 말고 제대로 살고 싶어. 미안하지만 언니, 오늘은 나 괜찮지 않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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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4호, 사라
왼쪽 눈을 동그랗게 뜨고 콧날을 중심으로 대칭이 되도록 선을 그어 나갔다. 커다란 눈, 여러 겹의 쌍커풀, 길고 숱이 적은 속눈썹, 선명한 눈동자. 눈을 깜빡였지만 새로 생긴 눈은 깜빡여지지 않았다. 반짝이며 젖어 들어가는 푸른 눈동자 하나와 영원히 감기지 않을 무섭도록 진한 회색 눈동자 하나. 초점 없는 눈이 부릅떠 허공을 응시하는 동안 다른 눈은 꼭 감은 채 눈물을 쏟아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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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호, 이아
“저는 자식을 팔아먹지 않았어요. 이아를, 우리 이아를 팔아먹지 않았어요.”

오래도록 마음에 품었던 말일 것이다. 한 번도 말할 기회가 없었을 것이다. 이아 엄마는 코를 한 번 크게 훌쩍이고 침을 꿀꺽 삼키더니 천천히 말을 이어 갔다.

”위로는 받았어요. 위로라고 생각하고 받았어요. 위로와 배려를 받고 나니 그걸 준 사람들에게는 아무것도 따질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결국 팔아먹은 게 됐어요. 그러니까 진경 씨, 살면서 혹시 위로받을 일이 생기더라도 받지 말아요. 위로도 배려도 보살핌도 격려도 함부로 받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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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5호, 은진, 30년 전
보육원이나 L2들이 주로 일하는 현장, 기숙사 등은 의심 환자가 발생하자마자 폐쇄 조치되었다. 비감염자들도 함께 갇히는 경우가 태반이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스스로 살아남은 것이었고 이듬해 봄이 되어 L2인 마지막 환자가 사망하자 타운은 신종 호흡기 질환 종결을 선언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