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과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논거를 경청하거나 공부하는 대신 상대에게 자신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공론장에서 일종의 위계를 형성한다. 그들은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네가 답해보라는 말에, 네가 나를 설득해보라는 말에 이미 불평등한 위계가 전제된다는 것을 간과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너희가 겪는 불평등을 내게 증명해보라 말하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너희의 무고함을 설명해보라고 말한다. 난 들을 준비가 되었다. 난 관대하다. 심지어 젠틀하다. 나는 최고다
↳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무지가 몰라도 되는 권력의 위계 안에서 하행된 것이라면, 그 무지는 투명한 지적 공백이 아니라 '몰라도 되는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발을 반성과 부끄러움이거나 최소한 책임감이어야 하며, 당연히 공부 역시 스스로의 몫이다.
아무리 정중한 태도라 해도, 성 불평등의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당신들의 피해를 입증해보라고 하는 것, 당신들의 현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와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선 오만방자한 것일 수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