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년세세

page.34
파묘

>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는 어느 할머니의 유품이라며 한민수가 오클랜드 노인의 프레젠트 메시지를 전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 가족들이 선물을 살펴보며 메시지의 발신자를 궁금해하는 사이에 이순일은 면구스럽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한세진은 이순일이 앞치마를 목에 걸면서 뺨을 엄지로 문지르는 것을 보았다. 솥에서는 김이 올랐고 고기전과 야채전은 종이 포일을 깐 소쿠리에 쌓여 있었으며 실처럼 가늘게 썬 지단이 들어간 잡채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음식이 풍성하게 준비된 저녁이었따. 그들은 제사 때 사용하는 상 두개를 붙여 거실에 긴 식탁을 만든 뒤 거기 음식을 차리고 실컷 먹었다. 아 그리웠어, 한만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너무 그리웠어.
> 
> 당신은 위대하다.
> 한세진은 그 메시지를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 다음엔 미간에 살짝 뿔이 돋는 듯한 느낌으로 화가 났고, 그게 뭐였는지, 왜 그것이 모욕감과 닮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걸 느꼈는지를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한만수의 한국어 때문인 것 같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한만수는 그것을 영어로 들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영어였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 애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지.

page.34
파묘

> 뉴질랜드는 노인과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야, 한만수가 말했다. 엄마 모시고 와서 좀 길게 있다 가. 그래, 그래. 거기 사람들이 요즘 한국하고 한국인에 관심이 많다, 촛불 때문에 다 놀라워해. 한세진은 갈색으로 구워진 마늘 편을 포크로 떠먹으며 광장 구석에 모여 있던 노인들에 대해 말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LPG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고, 노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한세진이 말하자 한만수는 그건 그 사람들의 권리라고 대꾸했다. 그 사람들에게도 본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말할 권리가 있잖아. 그걸 누나가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한만수는 파스타 면을 포크로 건져 후룩 먹은 뒤 한세진에게 말했다.
> 아무튼 누나는 정치적으로 좀 편향되었어.
> 뭐?
> 쏠려 있다고, 한쪽으로.
> 한세진은 어리둥절해 한만수를 보다가 왜 네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한만수는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한세진을 보더니 음, 하고 눈을 굴렸다.
> 누나는 매일 팟캐스트를 듣잖아.

page.62
하고 싶은 말

> 한세진과 대화하면 자주 이렇게 되었다. 언짢고 불편해졌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말들 때문에.

page.72
하고 싶은 말

> 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첫아이 임신 때 한영진의 시모는 노산, 노산을 입버릇처럼 말하며 한영진의 몸 상태를 아쉬워하고 아이의 상태를 염려하더니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으로 찾아와 울었다. 시부와 김원상, 유리창 너머로 신생아를 품에 안아 가족에게 보여주고 있는 간호사 모두를 의식하는 것 같은 동작으로 눈물을 닦고 유리창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아가, 하고 불렀다.

>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보고 싶은 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야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page.80
하고 싶은 말

> 한영진은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그 밥을 먹었고 월급을 받으면 그 상에 월급봉투를 딱 붙이듯 내려놓았다. 그 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과 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

> 내가 몇시에 퇴근하든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두고 나를 기다렸어. 다른 식구들이 다 자고 있어도 엄마는 자지 않았지.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 
>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 
>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 돌아오지 말라고.
>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 
>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 
>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page.100
무명

> 열심히 기어도 어른들을 따라갈 수 없어 뒤처졌다. 마음만 다급한 와중에 번개인지 조명탄인지 때문에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고 앞서가던 어른들이 납작 엎드렸다. 그것을 보고 따라 엎드렸는데 차고 축축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For the site tree, see the [root Markdown](https://slashpage.com/grit-han-94.md).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