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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년세세
Grit Han
황정은, 창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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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나치 독일의 홀로코스트에서 살아남았다는 어느 할머니의 유품이라며 한민수가 오클랜드 노인의 프레젠트 메시지를 전했다. 어머니는 위대하다, 당신은 위대하다. 가족들이 선물을 살펴보며 메시지의 발신자를 궁금해하는 사이에 이순일은 면구스럽다는 듯 소파에서 일어나 부엌으로 갔다. 한세진은 이순일이 앞치마를 목에 걸면서 뺨을 엄지로 문지르는 것을 보았다. 솥에서는 김이 올랐고 고기전과 야채전은 종이 포일을 깐 소쿠리에 쌓여 있었으며 실처럼 가늘게 썬 지단이 들어간 잡채도 있었다.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음식이 풍성하게 준비된 저녁이었따. 그들은 제사 때 사용하는 상 두개를 붙여 거실에 긴 식탁을 만든 뒤 거기 음식을 차리고 실컷 먹었다. 아 그리웠어, 한만수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이게 너무 그리웠어.

당신은 위대하다.
한세진은 그 메시지를 듣고 처음엔 어리둥절했는데 그 다음엔 미간에 살짝 뿔이 돋는 듯한 느낌으로 화가 났고, 그게 뭐였는지, 왜 그것이 모욕감과 닮았는지, 자기가 왜 그런 걸 느꼈는지를 나중에 생각해보았다. 아마도 한만수의 한국어 때문인 것 같다고 한세진은 생각했다. 한만수는 그것을 영어로 들었을 텐데 그래서인지 말투가 좀 영어였지. 홀을 쥔 왕이 그것을 하사하듯 그 애는 엄마에게 그렇게 말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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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묘
뉴질랜드는 노인과 여성이 살기 좋은 나라야, 한만수가 말했다. 엄마 모시고 와서 좀 길게 있다 가. 그래, 그래. 거기 사람들이 요즘 한국하고 한국인에 관심이 많다, 촛불 때문에 다 놀라워해. 한세진은 갈색으로 구워진 마늘 편을 포크로 떠먹으며 광장 구석에 모여 있던 노인들에 대해 말했다. 그들 중 누군가는 LPG 가스통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고, 노인들이 무슨 생각으로 그러고 있는지를 모르겠다고, 그러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한세진이 말하자 한만수는 그건 그 사람들의 권리라고 대꾸했다. 그 사람들에게도 본인들의 정치적 견해를 말할 권리가 있잖아. 그걸 누나가 하지 말라고 할 수는 없지. 한만수는 파스타 면을 포크로 건져 후룩 먹은 뒤 한세진에게 말했다.
아무튼 누나는 정치적으로 좀 편향되었어.
뭐?
쏠려 있다고, 한쪽으로.
한세진은 어리둥절해 한만수를 보다가 왜 네가 그렇게 생각을 하느냐고 물었다. 한만수는 그런 질문을 받을 줄은 몰랐다는 듯 한세진을 보더니 음, 하고 눈을 굴렸다.
누나는 매일 팟캐스트를 듣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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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한세진과 대화하면 자주 이렇게 되었다. 언짢고 불편해졌다. 하지 않았다면 좋았을 말과 하고 싶지도 않았는데 해버린 말들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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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한영진은 그 아이들을 낳고서야 세간이 말하는 것과는 다르게 모성이 당연하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첫아이 임신 때 한영진의 시모는 노산, 노산을 입버릇처럼 말하며 한영진의 몸 상태를 아쉬워하고 아이의 상태를 염려하더니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병원으로 찾아와 울었다. 시부와 김원상, 유리창 너머로 신생아를 품에 안아 가족에게 보여주고 있는 간호사 모두를 의식하는 것 같은 동작으로 눈물을 닦고 유리창을 향해 손가락을 뻗으며 아가, 하고 불렀다.
아기가 젖꼭지를 제대로 물지 못해 빨갛게 질려 울어대고 그게 산모의 문제인 것처럼 간호사들이 한마디씩 충고할 때마다 한영진은 좌절했고 다시 분노했으며 죄책감을 느꼈다. 모든 게 끔찍했는데 그중에 아기가, 품에 안은 아기가 가장 끔찍했다. 그 맹목성, 연약함, 끈질김 같은 것들이. 내 삶을 독차지하려고 나타나 당장 다 내놓으라고 요구하는 타인. 한영진은 자기가 그렇게 느낀다는 걸, 그렇게 생각한다는 걸 티 내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영진은 갓난아기와의 간격이 조금 벌어진 뒤에야 아이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아이를 유심히 보고 싶은 마음, 다음 표정과 다음 행동을 신기하고 궁금하게 여기는 마음, 찡그린 얼굴을 가엾고 사랑스럽게 바라볼 수 있는 마음, 관대하게 대하고 싶은 마음, 인내심…… 모든 게 그 간격 이후에야 왔다. 한영진의 모성은, 그걸 부르는 더 적절한 이름이 필요하다고 언젠가 한영진은 생각한 적이 있었는데, 타고난 것이 아니고 그 간격과 관계에서 학습되고 형성되었다. 그건 만들어졌다. 그걸 알았기 때문에 한영진은 둘째를 낳을 수 있었고 첫번째보다는 여유 있게 아이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아이들을 지금은 좋아했다. 이순일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것을 한영진은 알고 있었다. 이순일의 노동이 그것을 가능하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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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고 싶은 말
한영진은 밤마다 꾸벅꾸벅 졸며 그 밥을 먹었고 월급을 받으면 그 상에 월급봉투를 딱 붙이듯 내려놓았다. 그 상을 향한 자부와 경멸과 환멸과 분노를 견디면서.
내가 몇시에 퇴근하든 엄마는 부엌에 불을 켜두고 나를 기다렸어. 다른 식구들이 다 자고 있어도 엄마는 자지 않았지. 매일 늦게까지 나를 기다렸다가 금방 지은 밥하고 새로 끓인 국으로 밥상을 차려줬어.

그런데 엄마, 한만수에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아.

그 애는 거기 살라고 하면서 내게는 왜 그렇게 하지 않았어.
돌아오지 말라고.
너 살기 좋은 데 있으라고.

나는 늘 그것을 묻고 싶었는데.

하고 싶은 걸 다 하고 살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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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명
열심히 기어도 어른들을 따라갈 수 없어 뒤처졌다. 마음만 다급한 와중에 번개인지 조명탄인지 때문에 하늘이 갑자기 환해졌고 앞서가던 어른들이 납작 엎드렸다. 그것을 보고 따라 엎드렸는데 차고 축축한 바닥에 이마를 대고 있다가 고개를 드니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