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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it Han
최은영, 미메시스
page.13
당신은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한 번 읽고 나면 읽기 전의 자신으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글을, 그 누구도 논리로 반박할 수 없는 단단하고 강한 글을, 첫 번째 문장이라는 벽을 부수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글을. 그래서 이미 쓴 문장이 앞으로 올 문장의 벽이 될 수 없는 글을, 언제나 마음 깊은 곳에서 잠겨 있는 당신의 느낌과 생각을 언어로 변환시켜 누군가와 이어질 수 있는 글을.
page.17
정윤이 자기감정을 철저하게 숨기지 못했다고 지금의 당신은 생각한다. 희영에 대한 호감, 그녀가 쓴 글에 대한 애정, 희영에게 잘 보이고 싶은 마음, 희영과 함께 하는 시간의 기쁨 같은 것들을 정윤은 제대로 감추지 못하여 당신을 외롭게 했다. 정윤은 공평하고 사려 깊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런 감정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다. 그러나 당신 눈에 보였으므로, 당신은 언제나 그런 공기를 읽는 사람이었으므로, 당신은 느낄 수 있었다.
page.24
글 쓰는 일을 직업으로 삼고 나서, 정말로 글을 써야 하는 사람들은 모두 떠나고 쓸 줄 모르는 당신만 남아 글을 쓰고있다고 생각하던 날들이 있었다. 그 나날이 길었다.
page.34
당신은 당신의 분노가 무엇 하나 바꾸지 못하고, 그저 당신 자신의 행복을 깨뜨리고 있다는 생각에 슬픔을 느꼈다. 가까운 사람들을 대할 때, 심지어 당신 자신을 대할 때 당신은 예전보다 더 엄격하고 까다로운 사람이 됐다. 짜증을 쉽게 냈고, 작은 일에도 화를 냈다. 아무것도 바꾸지 못하면서 자기 분노 속에 갇혔을 뿐이라고 당신은 생각했다. 그건 당신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page.58
나는 그런 사람이 되기 싫었어. 읽고 쓰는 것만으로 나는 어느 정도 내 몫을 했다, 하고 부채감 털어 버리고 사는 사람들 있잖아. 부정의를 비판하는 것만으로 자신이 정의롭다는 느낌을 얻고 영명 자신이 옳다는 생각만으로 사는 사람들. 편집부 할 때, 나는 어느 정도까지는 그런 사람이었던 것 같아. 내가 그랬다는 거야, 다른 사람들은 달랐겠지만.
page.59
가끔씩 언니들의 마음이 너무 가깝게 다가와서 내가 언니들의 마음을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정문 언니의 말을 생각해. 죽었다 깨어나도 나는 모른다고. 착각하지 말자고.

그 집에서 한 밤을 자고 집으로 가는 길에 당신은 희영의 여린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 외로운 사랑을 하는 사람의 얼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