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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산이 정말 거기 있었을까
Grit Han
박완서, 웅진지식하우스
page.7
작가의 말
내가 살아낸 세월은 물론 흔하디흔한 개인사에 속할 터이나 펼쳐 보면 무지막지하게 직조되어 들어온 시대의 씨줄 때문에 내가 원하는 무늬를 짤 수가 없었다. 그 부분은 개인사인 동시에 동시대를 산 누구나가 공유할 수 있는 부분이고, 현재의 잘사는 세상의 기초가 묻힌 부분이기도 하여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펼쳐 보인다.

’우리가 그렇게 살았다우.’
page.65
임진강만은 넘지 마
무용 순서를 끝으로 우리는 다시 밖으로 나와 줄봉사 노릇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올케한테 미안했지만 말로 나타내진 않았다. 뭐라고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거의 자정을 바라보는 시간이었고 온몸이 남루처럼 지쳐 있었으나 잠이 올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이불 속에서 외롭게 절망과 분노로 치를 떨었다. 이놈의 나라가 정녕 무서웠다. 그들이 치가 떨리게 무서운 건 강력한 독재 때문도 막강한 인민군대 때문도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완벽하고 천연덕스럽게 시치미를 뗄 수가 있느냐 말이다. 인간은 먹어야 산다는 만고의 진리에 대해. 시민들이 당면한 굶주림의 공포 앞에 양식 대신 예술을 들이대며 즐기기를 강요하는 그들이 어찌 무섭지 않으랴. 차라리 독을 들이댔던들 그보다는 덜 무서울 것 같았다. 그건 적어도 인간임을 인정한 연후의 최악의 대접이었으니까. 살의도 인간끼리의 소통이다. 이건 소통이 불가능한 세상이었다. 어쩌자고 우리 식구는 이런 끔찍한 세상에 꼼짝 못하고 묶여 있는 신세가 되고 말았을까.
page.204
한여름의 죽음
오빠는 죽어 있었다. 복중의 주검도 차가웠다.
그때가 몇 시인지 우리는 아무도 시계를 보지 않았고 왜 엄마 혼자서 임종을 지켰는지도 묻지 않았다.

(중략)

총 맞은 지 팔 개월 만이었고, ‘거기’ 다녀온 지 닷새 만이었다. 그는 죽은 게 아니라 팔 개월 동안 서서히 사라져 간 것이다. 우리는 아무도 그의 임종을 못 본 걸 아쉬워하지도 않았다. 그 대신 그의 너무도 긴 사라짐의 과정을 회상하고 있었다. 우리는 새삼스럽게 슬퍼할 것도 곡을 할 것도 없이 가만히 앉아 있었다. 우린 미리 상갓집에 잘 어울리는 표정을 짓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것도 할 것이 없었다. 날이 밝을 때까지의 시간관념도 없었다.
page.207
한 여름의 죽음
집에 돌아오니 밤중이었다. 숙모가 팥죽을 쑤어 놓고 기다리고 있었다. 시뻘겋고 걸쭉한 팥죽이 너무 생급스러워 화가 났다. 그렇다고 밥이 먹고 싶은 것도 아니었다. 식구들이 돌아온 후 그림자처럼 살면서 아주 안 먹고 살았다고는 못해도 거의 배가 고픈 걸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오늘 같은 날은 더군다나였다. 우리가 팥죽을 혐오스러워하는 걸 보고 숙모는 변명처럼 예로부터 상제가 팥죽을 먹는 건 흉이 아니라고 했다. 흉이 될까 봐 안 먹는 줄 아는지, 밤이 깊어 집으로 가면서도 숙모는 팥죽에 대한 미련을 못 버리고 내일이면 쉬어서 버리게 될 텐데……라고 했다.

“쉬어서 버리면 안 되지.”

엄마가 헛소리처럼 말하면서 팥죽을 가져오라고 손짓했다. 우리는 둘러앉아, 사랑하는 가족이 숨 끊어진 지 하루도 되기 전에 단지 썩을 것을 염려하여 내다 버린 인간들답게, 팥죽을 단지 쉴까 봐 아귀아귀 먹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