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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
Grit Han
오스카 와일드, 문예출판사
1장
“시인들도 자네만큼 섬세하지는 않아. 그들은 시집을 출간하는 데 열정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잘 알지. 요즘에는 실연 한 번만으로 시집을 수도 없이 찍어낼걸.”
숙모의 오찬 모임에 갔다면 분명히 굿보디(goodbody)경을 만났을 테고, 가난한 사람들의 끼니를 해결해주는 일과 모범적인 주거의 필요성에 관해 그와 줄곧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각 계급에 속한 사람들은 정작 자신들의 삶에서는 실천할 필요도 없는 미덕의 중요성에 대해 저마다 설교를 했을 것이다. 부자들은 절약의 가치에 대해 이야기했을 테고, 게으른 자들의 노동의 존엄성에 대해 웅변적으로 역설했을 것이다. 바로 이 모든 것에서 벗어났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2장
“그레이 군, 좋은 영향 같은 건 없다네. 영향은 모두 부도덕하지……. 과학적인 관점에서 부도덕하다는 말일세.”
”왜요?”
”누군가에게 영향을 미친다는 건 자신의 영혼을 내주는 것이거든. 그러고 나면, 영향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자기 본래의 생각을 하지 못하게 되거나 본래의 열정을 불태우지 못하게 되지. 미덕마저 자신의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발현된 게 아니야. 죄도 빌려온 게 되겠지. 혹시 죄라는 게 있다면 말일세. 그는 다른 누군가가 연주하는 음악의 메아리며, 남의 대본의 일부를 보고 연기하는 배우가 될 거네. 인생의 목적은 자기 계발이야. 자신의 본성을 완벽하게 실현하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 각자가 이곳에 존재하는 이유지. 하지만 요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너무 두려워해. 모든 의무 중에 가장 고귀한 의무, 자기 자신에게 진 의무를 잊어버렸어. 물론 관대하긴 하지. 배고픈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을 주고 거지들에게는 옷을 주지. 하지만 정작 자신들의 영혼은 굶주리고 헐벗고 있단 말이야. 우리 인류는 용기를 잃어버렸어. 어쩌면 용기를 아예 가져본 적도 없을지 몰라. 사회에 대한 공포, 그것은 도덕의 기초이고, 신에 대한 공포, 그것은 종교의 비결이지. 바로 이 두 가지가 우리를 지배한다네. 그렇지만…….”
“맞아요, 지금 난 아주 즐거워요. 앞으로도 항상 즐거울 수 있을까요?”
”항상이라고! 그건 정말 끔찍한 말이야. 난 그 말을 들을 때면 몸서리가 나. 그 말은 여자들이 즐겨 쓰지. 여자들은 로맨스를 영원히 지속시키려고 애쓰는 바람에 모든 로맨스를 망치고 말아. 영원이란 말은 의미 없는 단어이기도 해. 변덕과 일생의 열정 사이에 유일하게 다른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변덕이 좀 더 오래 지속된다는 거야.”

도리언 그레이는 헨리 경과 함께 화실에 들어서면서 그의 팔에 손을 올려놓았다. “그럼 우리 사이의 우정이 변덕을 부리게 하죠.”
4장
“(중략) 그는 셰익스피어에 대해 아주 대단한 열정을 갖긴 했지만 무척 불쾌한 인간이었어요. 한번은 대단한 자부심을 드러내며 다섯 번 파산한 이유가 전적으로 ‘그 시인’ 때문이라고 말하더군요. 그는 셰익스피어를 시인으로 부르길 고집했어요. 뭔가 특별해 보이게 하려는 생각 같았어요.”
”이보게, 도리언, 특별하긴 하군. 아주 특별해 보여. 대부분의 사람들이 파산하는 이유는 인생이라는 산문에 너무 많은 투자를 해서야. 그 사람, 시(詩)로 파산했으니 영예로운 일이지.”
6장
“우리 모두가 다른 사람을 아주 좋게 생각하고 싶은 이유는, 우리가 자기 자신에 대해 너무 걱정하기 때문이지. 낙관주의의 근원이 바로 순전한 공포라네. 우리가 스스로 관대하다고 믿는 이유가 뭔지 아는가? 그건 이웃들이 우리에게 이익을 줄 만한 미덕을 지니고 있다고 우리가 믿기 때문이야. 우리는 계좌의 잔고를 초과하는 돈을 인출할 수도 있을 거라는 생각 때문에 은행원을 칭찬하고, 우리의 주머니를 털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 때문에 노상강도에게서 좋은 성품을 찾으려고 해. 내가 한 말들은 모두 진심이야. 난 낙관주의를 가장 경멸해. 망가진 삶이란 것은 말이야, 성장이 멈춘 삶을 제외하면 망가진 삶이란 없어.
8장
그는 격렬한 단어들로 슬픔을 토로하고, 그보다 더 격렬한 단어들로 괴로운 심정을 토해내며, 여러 장에 걸쳐 한 장 한 장 빼곡히 써 내려갔다. 자책은 일종의 사치였다. 우리는 자책할 때 다른 사람이 우리를 비난할 권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우리에게 죄를 사해주는 것은 고해이지 신부가 아닌 것이다. 도리언은 편지 쓰기를 마쳤을 때 자신이 이미 용서를 받았다고 느꼈다.
그 소녀는 실제로 살아 있던 적이 없었지. 그러니 실제로 죽은 것도 아니야. 적어도 그녀는 자네에게 언제나 꿈과 같은 존재였고, 셰익스피어의 희극 속을 날아다니며 희곡들을 보다 더 아름답게 만들어준 환영이었으며, 셰익스피어의 음악을 더욱더 풍부하고 기쁨으로 가득 차게 해준 갈대 피리였지. 그러니 그녀가 실제 삶과 접촉하는 순간 삶을 망가뜨렸고 삶 또한 그녀를 망가뜨린 거야. 그래서 그녀는 세상을 떠났다네.
11장
그렇다, 헨리 경이 예견했듯이 삶을 재창조할 새로운 쾌락주의가 도래하여 우리의 현 시대에 기이하게 소생하고 있는 가혹하고 시대착오적인 청교도주의로부터 삶을 구해내야 한다. 쾌락주의는 분명 지상에 도움을 주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어떠한 방식이든 열정적인 경험의 희생이 수반되는 이론이나 체계를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쾌락주의의 목표는 실로 경험 자체가 되어야 하지, 달든 쓰든 경험의 열매가 되어서는 안 된다. 쾌락주의는 감각을 무디게 만드는 방탕만큼이나 감각을 죽이는 금욕 또한 전혀 알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쾌락주의는 인간에게 그저 한순간에 지나지 않는 인생의 매 순간에 전념하도록 가르쳐줄 것이다.
가끔 그는 악이란 그저 아름다움에 대한 자신의 개념을 현실화해주는 하나의 방식을 뿐이라고 여기곤 했다.
12장
죄라는 건 사람의 얼굴에 그대로 드러나기 마련이야. 감출 수가 없지. 사람들은 이따금 드러나지 않는 은밀한 악덕에 대해 말하곤 하지만, 그런 건 없어. 어떤 비열한 인간이 악행을 범했다면 입술 선에, 축 처진 눈꺼풀에, 심지어 손 모양에 저절로 나타나게 되지.
17장
“우리 민족은 이리저리 밀치며 생존해온 대표적인 민족이야.”
”그렇게 발전해왔죠.”
”쇠퇴가 오히려 더 매혹적이지.”
”그럼 예술의 경우는 어떤가요?” 그녀가 물었다.
”그건 병폐지.”
”사랑은?”
”환각이지.”
”종교는요?”
”믿음을 대용하는 유행품이지.”
”오빠는 회의론자군요.”
”천만에! 회의론이야말로 믿음의 시작이지.”
”그럼 오빠는 어떤 사람이지요?”
”정의하는 것은 한정 짓는 것이지.”
”내게 실마리를 줘요.”
”실은 끊어지는 법이야. 그럼 넌 미로에서 길을 잃고 말 거야.”
18장
하지만 밤의 어둠 속에서 복수를 불러내 자신 앞에 끔찍한 모습의 처벌을 드러낸 것은, 어쩌면 자신의 공상에 불과한지도 몰랐다. 실제 삶은 혼란스러웠지만 상상 속에는 끔찍할 정도로 논리적인 것이 있엇다. 오히려 양심의 가책이 죄악의 발꿈치를 졸졸 따라다니게 한 것은 상상력이었다. 각각의 범죄로 하여금 지형적인 새끼를 낳게 만든 것도 상상력이었다. 하지만 평범한 현실 세계에서는 악인이 처벌을 받는 것도, 선한 사람이 보상을 받는 것도 아니었다. 성공은 강한 자에게 돌아갔고 실패는 약자에게 떠맡겨졌다. 그뿐이었다.
19장
나는 자네가 어떤 일도 하지 않은 것이, 조상을 새기거나 그림을 그린 적도 없으며 자기 자신 말고는 그 무엇도 만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이 무척 기쁘네! 삶 자체가 자네의 예술이었지. 자네는 자기 자신을 음악으로 만들었어. 자네가 살아가는 매일매일이 곧 소네트이지.
작품 해설
블레이크가 말했듯이 다의적인 세계에서는 명백함조차 다의적이므로, 우리가 와일드에 가까이 접근하려면 <도리언 그레이의 초상>에서 드러난 여러 자아들을 동시에 보아야 한다. 그럼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순수한 미를 추구한 예술가이자, 사회를 비딱하게 바라보며 감각적이고 미적인 새로운 쾌락주의를 주창한 댄디이자, 결국 비극을 맞이했지만 도덕관념 바깥에서 미학적 쾌락주의를 실천하며 일탈을 꿈꾸었던 유미주의자인 와일드의 진정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자신의 양심을 죽임으로써 그림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믿었지만 그런 행위의 결과는 곧 자신의 죽음이었다. 이처럼 도리언은 자신의 양심을 죽이려 했지만 오히려 (자신의 끔찍한 모습, 소름 끼치는 영혼을 상기시켰던) 양심에게 살해되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