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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게 아니라 틀린 겁니다
Grit Han
위근우, 시대의 창
2015년 메갈리아가 등장했을 당시 조곤조곤한 페미니즘에는 동의하지만 메갈리아의 과격한 언사는 문제라고 비판하던 남자들이, 정작 그 어떤 페미니즘 텍스트보다 담담한 문체로 한국 여성들의 현실을 재현한 《82년생 김지영》 에 노발대발하는 모습은 마치 한 편의 희비극 같다.

희비극의 주인공은 이렇게 말한다. 오, 나는 너의 목소리를 경청할 생각이지만 볼륨을 조금만 줄이면 좋겠어. 아니 조금만 더. 아니 지금도 시끄러워. 그리고 목소리가 완전히 소거된 후 그는 말한다. 그래, 이게 내가 원하던 네 목소리야. 결국 그들이 원하는 것은 합리적 토론도 무엇도 아닌 여성들의 침묵일 뿐이다. 그것이 오빠가 허락한 페미니즘의 최종 목적지다.
자신과 다른 의견을 만났을 때, 그에 대한 논거를 경청하거나 공부하는 대신 상대에게 자신을 설득할 의무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은 그 자체로 공론장에서 일종의 위계를 형성한다. 그들은 자신이 던지는 질문에 네가 답해보라는 말에, 네가 나를 설득해보라는 말에 이미 불평등한 위계가 전제된다는 것을 간과한다. 남성이 여성에게 너희가 겪는 불평등을 내게 증명해보라 말하고, 이성애자가 동성애자에게 너희의 무고함을 설명해보라고 말한다. 난 들을 준비가 되었다. 난 관대하다. 심지어 젠틀하다. 나는 최고다

↳ 무지는 죄가 아니라고 하지만, 어떤 무지가 몰라도 되는 권력의 위계 안에서 하행된 것이라면, 그 무지는 투명한 지적 공백이 아니라 '몰라도 되는 힘'으로 가득 차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무지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출발을 반성과 부끄러움이거나 최소한 책임감이어야 하며, 당연히 공부 역시 스스로의 몫이다.
아무리 정중한 태도라 해도, 성 불평등의 피해 당사자인 여성들에게 당신들의 피해를 입증해보라고 하는 것, 당신들의 현실을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자료를 가져와보라고 하는 것은 상대방 입장에선 오만방자한 것일 수밖에 없다.
독자의 말 권리라는 것은 언론의 자유가 그러하듯, 보편적인 권리가 아닙니다. 말 권리가 있다면 당연히 알려지지 않을 권리 역시 있으며, 정보의 평등이 명백히 사회적 평등으로 이어지는 경우에만 우리는 알 권리를 요구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언론인은 알 권리라는 모호한 개념에 의존해 보도를 정당화하는 대신, 독자가 알 필요가 있는 정보와 알 필요는 없지만 독자가 알기 원하는 정보를 구분할 수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팩트주의의 당위적 기반이 되는 언론의 자유와 독자의 말 권리는 그 자체로 정당화될 수 없고, 실천적 맥락에서 공적 함의를 가질 때만 예외적으로 허용되는 것이라 볼 수 있습니다. 언론에는 자유 이상으로 자기 제한의 책임이 따릅니다. 디스패치는 이것이 절대적으로 부족합니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그럼에도 팩트주의를 내세워 자신들이 매우 공익적이고 양심적인 언론인 척 한다는 것입니다.
그의 만화가 불쾌한 건 단순히 악의 때문이 아니라 그 악의와 무지를 당당하고 투명하게 전시해서다. 윤서인의 만화는 무시무시한 악의 현현보다는 못생긴 알몸의 과시에 가깝다. 그렇다면 그의 만화에서 부당한 논리로 비난받는 시위대, 여성 단체, 진보 정당 지지자 등을 수세적으로 변호하기 보다는 차라리 만화의 민망한 형상을 싸늘히 비웃어주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비평의 역할은 윤서인의 텍스트를 부여잡고 성실히 싸우는 것이 아닌, 여기에 논쟁적 가치가 조금도 없다는 것을 증명하고 논쟁의 장에서 치워버리는 청소부 역할일 것이다.
가해자들이 가장 역겨울 땐 그들이 피해자의 권리까지 선점하려 할 때다. 그들의 말을 요약하면, 차별할 권리를 주지 않는 것도 차별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불합리한 주장을 차별적으로 배제하는 것 역시 합리적 토론의 전제 조건이다. 충분한 논거에 기초하지 않고 특정 종교의 교리나 개인의 불쾌함만을 근거로 타인의 기본권을 제한하자는 따위의 주장을 조기에 탈락시키지 못하고 한 시간 동안 의무적으로 들어줘야 한다면, 토론은 문제 해결 행위가 아닌 '아무말 대잔치' 가 될 뿐이다.
애도가 살아남은 자들의 윤리라면, 그것은 죽은 타자가 남긴 책무를 자신의 삶 안에서 계속해서 기억하고 갱신하는 것이리라. 눈물로 개인적인 죄의식을 정화하는 게 아니라, 책임 있는 시민의 의무를 재차 확인하는 것.
과도한 PC함이란 표현 역시 일부의 과도한 행태만을 비난하는 척하면서 사실은 '과도한' 이라는 관행어로 PC함 전체를 수식하는 문법적 사기 혹은 속임수에 불과하다. 이 속임수는 정치적 올바름을 폭력으로 규정하려 한다는 점에서도 기만적이지만, 무엇보다 한국에 만연한 폭력이 정치적 올바름의 과잉보다는 결여에 있다는 사실을 은폐한다는 점에서 기만적이다.

(…)

촬영 중 동료 여배우를 성추행하고 유죄 판결을 받은 남배우 조덕제를 응원하고 피해 배우를 욕하는 글이 남초 커뮤니티 보배드림에 올라오고 그에 대해 동의의 댓글이 뒤를 잇는 게 과도한 거다. TV 토론에 나와 호모포빅한 발언을 한 국회의원 이언주의 유튜브 채널 구독자가 8만명이 넘는 게 과도한 일이다. 정치적 올바름이라는 것이 사회적으로 강제적 힘을 발휘한 적 없던 사회에서 과도한 PC함으로 인한 경직된 문화를 걱정하는 건 주제넘은 소리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