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
봄은 어느새 목련을 지나 벚꽃을 향해 질주 중이었다. 자정 무렵 퇴근길의 공기는 아직 제법 쌀쌀했다. 수입맥주 네 캔과 안주로 고른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삐 걷는 나를 부각시키기로 작정한 듯 골목길은 필요 이상으로 깜깜하고 조용했다. 편의점과 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코인 세탁소 앞을 지나치는데, 문득 그저 그런 시시한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와 과자와 비닐봉지를 한 프레임에 담은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가 곧바로 내렸다. 설렘이 가득한 꽃 사진들 사이로 이딴 사진이라니. 어쩐지 꽃밭에 쓰레기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혹시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모를 테지만, 그럴 때면 꼭 스스로 면박을 주게 된다. 뭐 자기 자신이 최후의 레드팀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겠지. 최근 3주 간 주말마다 결혼식이 있었다. 대학교 후배, 고등학교 친구, 사촌 동생 순서로 날이 잡혔는데 내 입장에서는 알고 지낸 기간에 따른 순서이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지나온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혼을 남일처럼 여겼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벌써 자기 평생의 배필을 선택했다는 게 신기했다. “신기하다”는 소감에 당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도 내가 신기해”라고 똑같이 반응했다.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법과 제도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잡아준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 생각에 결혼은 더하기의 계약이라기보다는 빼기의 계약이다. 서로를 책임진다는 약속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담보로 잡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의 모든 계약 중 당사자 구속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다. 책임. 그게 문제였다. 인생의 큰 결정을 해 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상대적으로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책임져야 할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애매한 책임감으로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반복하는 내가 답답했다. 딱히 남들보다 어깨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더 얹을 것도 없으니 본인만 건사하면 되는데, 그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시시한 어른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나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살게 되는 것. 답답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맥주 한 캔의 알딸딸함에 기대 억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짱구 아빠에게 맥주란 고단한 하루의 결승선이었으리라.”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내게 맥주란 간이쉼터에 불과했다. 아마 짱구 아빠가 마시는 맥주와 내가 마시는 맥주는 완전히 다른 맛을 낼 것이다. 교훈적으로 글을 끝내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블라…”라는 문장이 나올 타이밍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렇지 않아서 못 쓰겠다. 대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 경험상 모든 것은 정말로 지나갔고, 무엇이든 남았다. 이 말이 체념을 뜻하진 않는다. ‘Keep Going’에 가깝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견디는 것. 그 시간이 새긴 흔적을 궤적 삼아 고민하고 결정한 딱 그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발행일 2021년 3월 31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5호 :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