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순 둘, 진매 하나
과음한 다음 날엔 어김없이 과식을 한다. 일종의 주사다. 음식은커녕 물조차 더 마실 수 없을 때까지 먹어치운다. 음주를 통해 느끼는 쾌락에 속아 1일 치 이상의 에너지를 끌어다 태운 탓에 평소보다 큰 허기를 느끼는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배가 찢길 듯한 포만감이 들면 그때서야 뒤뚱뒤뚱 침대로 걸어간다. 풀썩 쓰러져 눕는다. 그 상태로 숙취가 해소되길 기다린다. 물론 설거지는 뒷전이다. 예전엔 이렇게 날린 하루 끝에 현타를 맞기도 했지만 이 짓도 10년 이상 반복하니 적응이 됐다. 그래, 이런 날까지 포함해 내 인생이지. 어른스럽게 넘긴다. 메뉴는 보통 라면이다. 해장엔 라면.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손가락 끝으로 누르며 편의점에 간다. 라면 코너 앞에 서서 매대에 붙은 각종 행사 할인 안내문을 꼼꼼히 읽는다. 대부분 ‘2+1, 교차가능’ 옵션이다. 다양한 선택지에 잠시 망설이지만 보통 진라면 순한맛(이하 진순) 두 개와 매운맛(이하 진매) 한 개를 집는다. 진라면의 강점은 무난한 맛과 저렴한 가격. 그냥 먹어도 괜찮고 어떤 재료와 섞어도 적당히 어울린다. 행사 할인 품목에서 빠진 걸 본 적도 없다. 물론 그만큼 안 나간다는 거겠지. 가끔 스프 상태가 영 별로인 제품이 걸릴 때도 있다. 꽝! 진순 두 개를 끓인다. 후루룩후루룩. 컨디션이 좋으면 햇반도 하나 말아먹는다. 끝. 진매는 그대로 찬장에 들어간다. 나중에 라면으로 한 끼를 때울 일이 생기면 꺼내 먹는다. 진매는 감당 가능한 최대치의 매운맛이다. 보통 한국인들은 신라면을 매운맛의 기준으로 삼지. 매운 음식을 취급하는 식당에서도 ‘어느 정도 매워요?’라는 질문에 신라면을 비교 상대로 말해주곤 한다. ‘신라면 정도’라는 대답이 나오면 바로 포기한다. 백이면 백 내 수준을 넘어서니까. 신라면보다 덜 맵다고 하면 겨우 도전해볼 마음이 생긴다. 진매가 딱 그 정도다. 신라면보다 아주 미세하게 덜 매운맛. ‘신라면이나 진매나 비슷한데’라고 하는 사람은 뭘 모르는 사람이다. 그 차이를 구별할 수 없을 만큼 매운 걸 잘 먹거나 못 먹는 것이다. 난 둘을 구별한다. 이쯤에서 닉네임 얘기를 해볼까. 나는 ‘아매오’다. ‘야매오’, ‘아메오’, ‘야메오’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뭐 하여튼. 혹시 ‘아매오’의 뜻이 뭔지 아시는지? 생각보다 맞히기 어렵다. 정답은 “아! 매워!”다. 좀 빨갛다 싶은 음식만 나오면 먹는 내내 “아! 매워!”를 연발하는 내 모습이 우스웠나보다. 친구들은 기회만 생기면 “아! 매워!”를 대신 외쳤다. 거기서 따온 닉네임이다. 이 얘기를 들은 사람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인다. “아, 그게 그런 뜻이었어요? 아니, 근데 그렇게 매운 걸 못 먹어요?” 몇몇은 좋아하는 음식을 묻곤 한다. 그럼 나는 답한다. “순두부요.” 불닭볶음면과 엽기떡볶이와 마라탕(샹궈)가 한국인의 입맛을 고장냈다는 오랜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한 것은 올해 초의 일이다. 생애 처음으로 마라샹궈를 먹었다. 물론 맵기 조절이 되니까 가능한 도전이었다. 몇 단계? 0단계! 친구들은 ‘그게 마라샹궈니? 양념소불고기지’라고 했다. 사실 맵기로 따지면 진매에도 못 미친다. 진순 정도? 하지만 지레 겁먹고 쳐다보지도 않았던 음식을 먹었다는 것이 내겐 작지만 큰 한 걸음이었다. 그 뒤로 맵기를 한두 단계 올려 먹어봤다. 심지어 얼마 전엔 훠궈도 먹었다(백탕 위주였지만). 생각보다 먹을 만한데? 아직 불닭볶음면과 엽기떡볶이는 못 먹어봤다. 낮은 단계부터 시작해볼 마음은 있다. 불닭볶음면 러블리핫이라든지, 엽기떡볶이 착한맛이라든지. 물론 난 여전히 매운 것을 못 먹는 편에 속한다. 분명하다. 다만 내 생각보다는 잘 먹는 듯하다. 사실 나는 ‘매운 것을 못 먹는 나’라는 정체성에 몰두했던 게 아닐까. ‘아매오’라는 닉네임까지 지어가면서. 불닭볶음면과 엽기떡볶이와 마라탕(샹궈)을 먹어보지 않은 것도 “저는 그것들은 입도 안 대봤어요”라는 말을 하기 위해 그랬던 거 아닐까. 마치 MBTI 결과에 맞춰 살려고 하는 사람처럼 말이다. 입맛은 변한다. 또 모르지. 과음한 다음 날 편의점에서 집어드는 라면 조합이 진매 둘, 진순 하나로 바뀔지도. 아예 틈새라면이나 사리곰탕으로 갈 수도 있다. 진순파와 진매파로 나뉜 대립구도는 영원하지 않을 것이다. 변하는 게 입맛뿐일까. 체질도 변하고, 성격도 변하며, 가치관도 변한다. 많은 것이 변한다. 그래서 삶은 다이내믹하다. 한 사람의 삶이 그럴진대 여러 사람이 부대껴 사는 세상은 두말 할 필요 없다. 타인이 변했다고 실망하지 말자. 나도 변했으니까. 중요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같이 존재하는 것. 그러기 위해 노력하는 일이다. 발행일 2023년 11월 22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61호 : 🍜순한 맛과 매운 맛 사이의 나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