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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대로 살아도 괜찮을까
일상력
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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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존버의 상태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존버는 내가 키우는 스투키의 이름이다.) 존버의 화분에서 시큼한 냄새가 진하게 풍기길래 길다란 줄기를 살짝 당겨봤더니 '뽕'하는 경쾌한 소리를 내며 뿌리가 통째로 뽑혀버렸다.
그러고 보니 청록색의 영롱한 자태를 뽐내던 스투키가 생기 없는 연두색을 띠기 시작한 것도 벌써 몇달 전 일이다. 그러니까 나는 죽은 식물에 설탕물과 탄산수로 매주 정성 어린 부관참시를 하고 있던 셈이다. 미동도 비명도 없이 명을 다한 존버의 사체를 화장지에 고이 싸서 종량제봉투에 던져 넣었다. 자신의 이름처럼 존나 버티지 못한 채 존버는 떠나버렸다.
식물을 곧잘 시들게 하는 편이라며 구매를 망설이던 나에게 '이 녀석을 죽이기는 쉽지 않을걸요'라던 판촉사원의 도발 섞인 말이 떠올랐다. 햇빛을 많이 쐬지 않아도, 심지어 물을 주는 것을 까먹어도 된다기에 냉큼 구입했던 건데. 이름을 'John Burr'라 지은 것도 다 끈질기다는 생명력 때문이었는데. 그 쉽지 않다는 일을 가뿐히 해낸 스스로가 갑자기 한심하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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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죽지 못한 존버의 망령이 이 집에 깃든 걸까. 유튜브 알고리즘이 이끈 힙합 아티스트의 영상에서 뜬금없이 나무 이야기가 튀어나왔다. '나무가 죽으면'이라는 말로 시작한 두 사람의 대화는 통렬한 자기반성으로 이어졌다.
'집에 있는 나무가 죽은 거야. 잘 안 죽는 건데. 나무가 죽는 걸 보니까 내 생활 패턴이 나무에 대입해서 보이는 거지. 만날 늦게 자고 햇볕 안 보려고 암막커튼을 쳐두고... 아, 내가 잘못되고 있구나.'
'나무가 죽는 건 그만큼 내 생활에 여유가 없다는 거 같아. 내 거실에 놓인 나무 한 번 바라볼 여유가 없는 거야.'
소금과 우원재는 나무의 죽음이 곧 일상이 파괴됐음을 알리는 경고 같은 거라고 했다. 집에서 키우는 나무가 죽었다는 건, 본인이 그만큼 엉망으로 살고 있다는 걸 방증하는 거라고.
나는 존버의 죽음을, 혹은 일상이 망가진 현실을 비겁하게 회피하고 싶었던 걸까. 존버의 생명력을 의심하며 구글링을 해봤지만 스투키 뒤에는 '키우기 쉬운'이나 '생명력 강한', '질긴'이라는 키워드가 뒤따를 뿐이었다. 나 또한 정말 엉망으로 살고 있구나. 내 삶도 정말 실시간으로 개박살이 나고 있구나. 여지없이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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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두 달 정도를 청색과 적색 숫자로 점철된 삶을 살았다. 쉴새없이 오르내리는 일봉 차트를 종일 보느라 눈이 퀭했고, 계좌에 적힌 평가손익에 따라 희망과 절망을 수시로 오갔다. 어느 순간부터 주식과 코인 잔고가 꼭 온라인 맞고게임에서 사용하는 사이버머니처럼 보였다.
더 큰 문제는 주식과 코인에 발을 들인 뒤부터 어느 것에도 쉬이 재미를 붙이지 못한다는 거였다. 호가창을 들여다 보는 것 말고는 어떠한 일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물건들이 나름의 질서를 유지하고 있던 방은 어수선해졌고, 부지런히 향유하던 음악과 책은 뒷전이었다. 행여 눈을 감은 사이에 손실이 날까 전전긍긍하며 제대로 잠도 이루지도 못했다. 몸과 정신을 갈아넣은 것의 대가로 바라던 만큼의 수익을 얻었지만 행복감은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비릿한 향이 풍겼다. 존버의 죽음을 발견했을 때 맡았던 죽음의 냄새, 삶이 엉망이라는 걸 알리는 냄새였다. 존버가 머물던 자리로 눈길이 향했다. 그 자리에는 아직 세 개의 화분이 더 남아있었다. 돈나무인 '도니'와 행운목 '로토토(로또 1등을 기원하며 이름이다)', 정체불명(식물종을 알 수 없어 멋대로 이름 지은)의 '청시'가 그것이다. 스투키까지 박살난 척박한 이곳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있는 이들이 대견하면서 한편으로 불안감이 엄습했다. 저것들마저 죽어버리면, 내 삶이 정말로 엉망진창이라는 걸 다시 한번 인정해야 할 것만 같았다.
존버의 잔해를 처리한 날, 스마트폰 메인에 있던 증권과 코인거래소 어플을 삭제했다. 오르내리는 양봉과 음봉이 나의 정신과 건강과 시간을 모조리 앗아가는 게 두려웠다. 존버가 무관심 속에 생을 마감했듯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일상을 서서히 죽여가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통장에 요행으로 얻은 몇 푼을 채워 넣는 것보다는 엉망이 된 일상을 회복하는 게 급선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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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을 회복하겠다는 거창한 목표를 세웠지만, 실천은 소소하기 그지없는 일들로 가득했다. 이를테면 좋아하는 향의 핸드워시와 섬유유연제를 구입하거나 최선을 다해 머그컵과 티코스터를 고르는 일. 선호하는 향의 원두를 고르고 친환경 세제나 물티슈를 장바구니에 담아두는 일. 내 공간에 좋아하는 소리를 채우고, 읽을 책들을 나름의 순서대로 정렬하는 일들. 햇볕이 방안으로 쏟아지는 시간에 침대에 누워 멍하니 빛을 감상하는 일. 이런 시시하고 조잡한 행동들이 나를 행복하게 만든다는 걸 알게 됐다.
작년부터 미뤄온 아침 루틴을 만드는 일에도 착수했다. 잠자리를 정리하고 창문을 열어 환기하거나 유산균과 물을 챙겨 먹는 것. 움직이는 족족 뿌드득 소리를 내는 관절을 눌러 풀어주는 등 별것도 아닌 일들을 성실하게 해냈다. 잃어버린 정신과 몸을 회복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강한 일상을 유지해야 한다는 걸 이제는 잘 알기 때문이다. 존버의 죽음 이후 나에게 일상을 살아가는 동력, 요즘 것들 말로 일상력이라고 말하는 그 힘이 알게 모르게 커져가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존버가 떠난 자리에 새로운 스투키를 들여놓았다. 존버가 아닌 것을 존버라 부를 수 없으니, 이름 옆에 Jr.을 적어두었다. 그러니까 신입 스투키의 이름은 존버 주니어다. 모쪼록 이번에는 이름처럼 존나게 버틸 수 있기를. 존버 주니어도, 나도.
발행일 2021년 3월 24일
파주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4호 : 'John Burr'의 죽음을 애도하며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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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
세이브포인트
확실히 나이가 든 모양이다. 어느 분기점을 지나면 시간이 곱절은 더 빠르게 흐른다던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지점을 지났는지 요즘 들어 시간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리는 게 체감된다. 며칠 전에는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년 마찬가지기는 했다만 올해는 정말이지 뭐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게 없는데. 서랍 깊숙한 곳에 묵혀둔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이내 올해 1월에 호기롭게 적었던 포부를 찾았다. 빼곡하게 적힌 캘린더를 보자마자 괜히 펼쳤다는 후회가 들었다. 만다라트 표까지 작성해 가면서 해내야 할 것들을 긴 목록으로 작성해 두었는데, 그중에서 제대로 해낸 게 단 하나도 없어서다. 어제까지의 나를 두고 혀를 차며 한심해 하는 사이 일주일이 또 금방 지나갔다. 이제 올해 남은 시간은 겨우 93일이었다. 하루가, 한 주가, 또 한 달이 지나가는 속도가 두려웠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느 날은 구글에 '시간이 빠르게 가는 이유'를 검색하기도 했다. 시간의 가속을 체감하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검색된 자료의 수가 상당했고 첫 줄에 걸린 '소소한 건강 상식'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몸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이 줄어든다고. 그러면 뇌 안에서 일하는 신경세포들의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 거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을 빠르게 느낀다는 세세한 설명으로 가득했지만 우둔한 나는 그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스크롤을 아래로 굴렸다. 시간이 제멋대로 내달린다고 느끼는 건 비단 세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물리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다를 리가 없겠지만,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특히나 사람들이 실제로 세월의 가속을 체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어릴 때만큼 많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아마 오래 살아가면서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 많아졌을 거고, 그러다 보니 행복의 역치 값이 커지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일일 테지. 반대로 말하면 인상적인 기억이 풍성할수록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낄 수 있는 걸까. 속절없이 떠나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최근 인상적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연초에 하려던 계획이 일찍이 망하긴 했지만 분명 다사다난한 한 해였는데 극적으로 행복했던 순간도, 충격적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회사와 집만 오갔던 게 문제였을까. 분명 집에서 소소하게 즐거움을 누리거나 회사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낀 적도 적지 않았는데. 감히 행복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일을 떠올리려 하니 괜스레 뒷골이 아려왔다. 여행을 떠나고 페스티벌에 갔던 몇 해 전 가을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명함 주는 방법도, 전화받는 것도 서툴렀던 1년 차. 계획없이 이직을 감행해 커리어가 된통 꼬여버린 것만 같았던 2년 차 때는. 분명 불안감에 떨긴 했지만 재미가 없지도, 행복에 무감하지도 않았는데. 그때와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업무로부터 도망칠 숨구멍을 요령껏 잘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그르치곤 '망했다'는 말이 절로 터져나왔을 때도, 심각하게 좆됐음을 감지했을 때도 감정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세이브포인트를. 이를테면 내게는 엽떡(반드시 오리지널맛에 베이컨을 추가해야 한다)이나 마라탕, 홈런볼 같은 것들이 일종의 세이브포인트였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영상이나 흠모하는 작가에게서 받은 사인도 종종 나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포켓몬 센터의 역할을 해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내가 향한 세이브포인트는 제법 잘 작동했고, 덕분에 지금까지 휘청거리면서도 잘 걸어왔다. 세이브포인트라는 거창한 네이밍이 민망할 정도로 지극히 소소한 일들이지만 그렇기에 힘든 순간마다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상사에게 된통 깨진 날이나 나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터덜거리며 돌아온 날에도 호쾌한 '배달의 민족 주문!' 하나면, 신경 써서 재생한 음악 한 곡이면 다시금 정신력을 회복했다. 최근에 시간이 멋대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요즘 들어 쉽게 긴장하고 심장이 자주 요동치는 것도 모두 세이브포인트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직장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회복력'이 관건이니까. 딱딱해져 가는 뇌가 지금 당장 세이브포인트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나의 썩은 몸에게 언질을 주는 것 같았다.
풀칠
연휴에 나눈 얘기들
근래 내게 일어난 일 중 가장 큰 사건을 하나만 꼽자면, 저번 주부터 다시 회사에 나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 덕분에 5일이나 되는 이번 연휴를 연휴답게 즐길 수 있었다. 어딜 다녀야 쉬는 날도 있는 법이니까. 출근 제안을 거절했다면 남의 떡만 쳐다보며 쓰디쓴 입맛만 다시는 5일이 되었을 것이다. 5일은 긴 시간이다. 누군가를 만나 밀린 이야기를 나누기에 충분할 만큼. 그리고 나는 이번 연휴에 꽤 많은 얘길 나눴다. 1 첫째 날엔 옷장을 만났다. 지난 1년 동안은 볼 일이 거의 없었는데, 회사에 다시 다니기 시작하면서 부쩍 볼 일이 많아졌다. 옷장 : 그래…출근하니까 어때? 나 : 그냥 그래. 1년 전에 퇴사할 때 세운 목표는 아무것도 못 이뤘는데 다시 출근하는 거니까. 아침마다 네 안을 뒤적일 때마다 포기 선언을 하는 기분이야. 옷장 : 나는 네가 양말을 신어서 좋은데…. 나 : 나는 양말이 싫어. 직업엔 귀천이 없다지만 일자리엔 '티어'가 있잖아. 경력으로 써먹기도 애매한, 그냥 돈 하나만 보고 하겠다고 한 일인데도 양말을 엄청 잘 챙겨 신고 나가게 된단 말이지. 1년의 시간을 돌아서 원래 있던 자리보다 조금 더 후진 자리로 돌아간 것 같아. 동화 속 탕자들은 한바탕 방황하고 나면 대박을 내거나 쪽박을 차더라도 원래 있던 곳으로는 돌아가던데… 옷장 : 그건 동화니까. 현실은 동화보다 빡세서 현실이고. 오늘은 양말 안 신니? 나는 대충 갠 빨래를 던져 넣고 옷장 문을 닫았다.
풀칠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
봄은 어느새 목련을 지나 벚꽃을 향해 질주 중이었다. 자정 무렵 퇴근길의 공기는 아직 제법 쌀쌀했다. 수입맥주 네 캔과 안주로 고른 과자가 담긴 비닐봉지를 손에 든 채 발걸음을 재촉했다. 바삐 걷는 나를 부각시키기로 작정한 듯 골목길은 필요 이상으로 깜깜하고 조용했다. 편의점과 집의 중간 지점에 있는 코인 세탁소 앞을 지나치는데, 문득 그저 그런 시시한 어른이 돼 가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맥주와 과자와 비닐봉지를 한 프레임에 담은 사진을 인스타 스토리에 올렸다가 곧바로 내렸다. 설렘이 가득한 꽃 사진들 사이로 이딴 사진이라니. 어쩐지 꽃밭에 쓰레기 버리는 몰상식한 사람이 된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물론 아무도 나에게 뭐라고 하지 않겠지만, 혹시 뭐라고 하더라도 나는 그걸 모를 테지만, 그럴 때면 꼭 스스로 면박을 주게 된다. 뭐 자기 자신이 최후의 레드팀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도 있겠지. 최근 3주 간 주말마다 결혼식이 있었다. 대학교 후배, 고등학교 친구, 사촌 동생 순서로 날이 잡혔는데 내 입장에서는 알고 지낸 기간에 따른 순서이기도 해서 기분이 묘했다. 지나온 삶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라고 할까. 결혼을 남일처럼 여겼던 시절부터 알고 지낸 이들이 벌써 자기 평생의 배필을 선택했다는 게 신기했다. “신기하다”는 소감에 당사자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나도 내가 신기해”라고 똑같이 반응했다. 결혼의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의견이 있다. 하지만 사랑이라는 추상적인 감정을 법과 제도라는 구체적인 형태로 잡아준다는 점에서 그 무게가 가볍지 않다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내 생각에 결혼은 더하기의 계약이라기보다는 빼기의 계약이다. 서로를 책임진다는 약속을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실제로 자기 자신을 담보로 잡기 때문이다. 결혼이 사회의 모든 계약 중 당사자 구속력이 압도적으로 높은 이유다. 책임. 그게 문제였다. 인생의 큰 결정을 해 나가는 주변 사람들을 보고 있자니 상대적으로 내 모습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책임져야 할 것도, 책임지지 않아도 될 것도 분명하지 않은 상황에서 애매한 책임감으로 이도 저도 아닌 선택을 반복하는 내가 답답했다. 딱히 남들보다 어깨가 무거운 것도 아닌데, 더 얹을 것도 없으니 본인만 건사하면 되는데, 그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하고 이리저리 도망쳐 다니는 꼴이 우습게 느껴졌다. 시시한 어른이란 그런 것이었다. 내가 나를 챙기지 못하는 바람에 그저 흘러가는 상황에 따라 살게 되는 것. 답답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맥주 한 캔의 알딸딸함에 기대 억지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뿐이었다. 얼마 전 “짱구 아빠에게 맥주란 고단한 하루의 결승선이었으리라.”라는 문장을 읽었는데, 내게 맥주란 간이쉼터에 불과했다. 아마 짱구 아빠가 마시는 맥주와 내가 마시는 맥주는 완전히 다른 맛을 낼 것이다. 교훈적으로 글을 끝내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블라블라…”라는 문장이 나올 타이밍이다. 그러나 내 마음이 그렇지 않아서 못 쓰겠다. 대신 “어떻게든 되겠지”라는 말을 전하고자 한다. 경험상 모든 것은 정말로 지나갔고, 무엇이든 남았다. 이 말이 체념을 뜻하진 않는다. ‘Keep Going’에 가깝다.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견디는 것. 그 시간이 새긴 흔적을 궤적 삼아 고민하고 결정한 딱 그만큼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발행일 2021년 3월 31일 글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5호 : 시시한 어른과 맛없는 맥주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