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브포인트
확실히 나이가 든 모양이다. 어느 분기점을 지나면 시간이 곱절은 더 빠르게 흐른다던데. 나도 모르는 새에 그 지점을 지났는지 요즘 들어 시간이 무지막지한 속도로 내달리는 게 체감된다. 며칠 전에는 올해가 100일도 남지 않았다는 말을 듣곤 소스라치게 놀랐다. 매년 마찬가지기는 했다만 올해는 정말이지 뭐 하나 제대로 이뤄낸 게 없는데. 서랍 깊숙한 곳에 묵혀둔 다이어리를 뒤적였다. 이내 올해 1월에 호기롭게 적었던 포부를 찾았다. 빼곡하게 적힌 캘린더를 보자마자 괜히 펼쳤다는 후회가 들었다. 만다라트 표까지 작성해 가면서 해내야 할 것들을 긴 목록으로 작성해 두었는데, 그중에서 제대로 해낸 게 단 하나도 없어서다. 어제까지의 나를 두고 혀를 차며 한심해 하는 사이 일주일이 또 금방 지나갔다. 이제 올해 남은 시간은 겨우 93일이었다. 하루가, 한 주가, 또 한 달이 지나가는 속도가 두려웠다. 그 정도가 얼마나 심했는지 어느 날은 구글에 '시간이 빠르게 가는 이유'를 검색하기도 했다. 시간의 가속을 체감하는 게 나뿐만은 아닌지 검색된 자료의 수가 상당했고 첫 줄에 걸린 '소소한 건강 상식' 기사를 클릭했다. 기사에서는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빨리 가는 원인을 이렇게 설명했다. 사람이 늙어가면서 몸에서 분비되는 도파민의 양이 줄어든다고. 그러면 뇌 안에서 일하는 신경세포들의 정보 처리 속도가 느려진다 거다. 몸의 속도가 느려지니 상대적으로 외부의 시간을 빠르게 느낀다는 세세한 설명으로 가득했지만 우둔한 나는 그 설명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다. 머리를 긁적이며 스크롤을 아래로 굴렸다. 시간이 제멋대로 내달린다고 느끼는 건 비단 세포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했다. 당연히 물리학적인 시각에서 보면 시간의 흐름이 다를 리가 없겠지만, 심리학적으로 접근하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말이 사실이라고. 특히나 사람들이 실제로 세월의 가속을 체감하는 결정적인 이유는 '인상적으로 기억하는 순간이 어릴 때만큼 많지 않아서'라고 하는데... 아마 오래 살아가면서 이미 경험해 본 것들이 많아졌을 거고, 그러다 보니 행복의 역치 값이 커지는 탓에 생기는 필연적인 일일 테지. 반대로 말하면 인상적인 기억이 풍성할수록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낄 수 있는 걸까. 속절없이 떠나는 시간을 어떻게든 붙잡고 싶어 최근 인상적인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연초에 하려던 계획이 일찍이 망하긴 했지만 분명 다사다난한 한 해였는데 극적으로 행복했던 순간도, 충격적이라 말할 수 있는 기억도 단번에 떠오르지 않았다. 시국이 시국이니 만큼 회사와 집만 오갔던 게 문제였을까. 분명 집에서 소소하게 즐거움을 누리거나 회사에서 작은 성취감을 느낀 적도 적지 않았는데. 감히 행복이라는 수식어를 붙일 만한 일을 떠올리려 하니 괜스레 뒷골이 아려왔다. 여행을 떠나고 페스티벌에 갔던 몇 해 전 가을까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예전에는 어땠을까. 명함 주는 방법도, 전화받는 것도 서툴렀던 1년 차. 계획없이 이직을 감행해 커리어가 된통 꼬여버린 것만 같았던 2년 차 때는. 분명 불안감에 떨긴 했지만 재미가 없지도, 행복에 무감하지도 않았는데. 그때와 지금과 다른 점이 있다면 당시에는 업무로부터 도망칠 숨구멍을 요령껏 잘 만들어두었던 것이다. 회사에서 맡은 일을 그르치곤 '망했다'는 말이 절로 터져나왔을 때도, 심각하게 좆됐음을 감지했을 때도 감정적으로 빠져나올 수 있는 세이브포인트를. 이를테면 내게는 엽떡(반드시 오리지널맛에 베이컨을 추가해야 한다)이나 마라탕, 홈런볼 같은 것들이 일종의 세이브포인트였다. 먹을 것뿐만 아니라 좋아하는 가수의 라이브 영상이나 흠모하는 작가에게서 받은 사인도 종종 나의 체력을 회복시키는 포켓몬 센터의 역할을 해냈다.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었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도 내가 향한 세이브포인트는 제법 잘 작동했고, 덕분에 지금까지 휘청거리면서도 잘 걸어왔다. 세이브포인트라는 거창한 네이밍이 민망할 정도로 지극히 소소한 일들이지만 그렇기에 힘든 순간마다 쉽게 드나들 수 있었다. 상사에게 된통 깨진 날이나 나의 무능력에 실망하고 터덜거리며 돌아온 날에도 호쾌한 '배달의 민족 주문!' 하나면, 신경 써서 재생한 음악 한 곡이면 다시금 정신력을 회복했다. 최근에 시간이 멋대로 빠르게 지나가는 것도, 요즘 들어 쉽게 긴장하고 심장이 자주 요동치는 것도 모두 세이브포인트를 제대로 마련하지 않아서라는 생각이 들었다. 사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직장인에게는 다른 무엇보다 '회복력'이 관건이니까. 딱딱해져 가는 뇌가 지금 당장 세이브포인트를 업데이트할 필요가 있다고, 나의 썩은 몸에게 언질을 주는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