직업은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가
해가 거듭할수록 삶의 중심이 되는 가치가 명확해지고 있다. 이제는 기억에서 흐릿해진 20대 땐 많은 걸 쫓았다. 시사교양 PD를 꿈꿨을 때라 세상의 모든 사사로운 일에 관심을 보였다. 동시에 공정과 상식이라는 사회적 대의도 추구했다. 이리 기웃 저리 기웃 여러 분야에 호기심을 보였을 정도로 에너지가 꽤 넘치는 시기였다. 직장인의 삶을 몰랐던 풋내기는 5060보다 낮은 3040의 투표율을 안줏거리로 삼으며 사회를 걱정하기도 했다. 30대가 된 지금 돌아보면 키보드 위에 올려둔 손가락이 오그라들 정도로 창피한 기억이다. 20대 후반에 첫 직장을 구했다. 시사교양 PD가 아닌 여행 기자였다. 분야가 확 달라졌다. 일상을 보내는 방식에 조금씩 변화가 생겼고 관심사도 점점 좁아졌다. 업무에 적응해야 하는 신입이라 그런 걸까. 오직 여행에만 눈길이 갔다. 나머지는 사치였다. 주 4회 야근은 기본, 주말에는 돌아오는 주에 쓸 아이템을 고민했다. 아이템을 못 찾은 날이면 어김없이 스트레스로 몸살을 앓았다. 보잘 것 없는 사람이 된 기분도 썩 좋지 않았다. 물론 즐거운 기억도 많다. 두세 달마다 떠나는 해외 여행지 출장은 말할 것도 없고 종종 떠나는 국내 여행지 출장도 기분 전환에 긍정적인 역할을 했다. 일이 좋았고 그래서 좀 더 잘하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그렇게 3년을 보냈더니 여행은 어느새 내 인생에서 꽤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게 됐다. 알게 모르게 일상을 보내는 방법, 사고방식, 소비 행태, 연차 활용, 인간관계 등 많은 부분이 여행을 중심으로 돌아갔다. 곰곰이 더듬어 보면 내가 하는 행동과 선택 대부분이 ‘좋은 여행’, ‘성공적인 여행’을 위한 것들이다. 예를 들어 보통의 날들은 다가올 여행을 위한 몸 관리 시간이다. 마치 운동선수가 경기를 준비하듯 출국일이 정해지면 가장 좋은 신체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 30대 초반까지는 출국 전날 금주와 이른 취침 정도면 된 것 같은데, 지금은 일주일 전부터 신경을 곤두세운다. 특히 배탈 조심! 월급 활용도 마찬가지. 상당 부분을 여행으로 지출하는 편이다. 놀러가는 것 이외의 소비는 최대한 다음 여행에 도움이 될 수 있도록 한다. 소비 패턴을 한 단어로 표현하자면 앰비슈머. 양면적인 소비자로 가치관의 우선순위에 있는 것에 소비를 아끼지 않는 이들을 지칭하는 말이다. 여행을 위한 저축을 시작하면 짠돌이 모드가 발동된다. 8~9,000원 정도의 외식도 어떻게든 줄여서 가장 이상적인 스케줄의 항공권과 입지가 좋은 호텔 비용을 마련한다. 사용하는 신용카드도 항공사 마일리지와 호텔 포인트 적립을 극대화할 수 있는 것들로 설계했다. 여행을 하면 여러모로 좋은 일이 생길 수 있는 환경도 조성했다. 결국 ‘업무(=여행) -> 급여 -> 여행 준비 -> 적립 -> 여행 -> 추가 베네핏’이 반복되는 선순환 구조를 갖췄다. 당연히 연차도 여행의 몫. 1년차부터 그랬다. 그저 쉬기 위한 연차는 없다. 왠지 허투루 쓰는 느낌이랄까. 작년엔 좀 다르게 보내봤다. 일종의 실험이었다. 남은 연차를 털어 여행 없이 10일을 쉬면서 스스로를 관찰했다. OTT 드라마(로키 시즌2, 최악의 악, 더 베어 등)를 보며 감자칩을 입에 쑤셔 넣었던 48시간은 나름 즐거웠지만, 나머지 일주일은 지루해서 혼났다. 그리고 다짐했다. 2024년의 모든 연차는 여행을 채우기로. 어느덧 여행 밥벌이 8년차에 접어들었다. 지난해 신문에서 잡지로 부서 이동 후 직업 만족도는 더 높아졌고, 여행을 대하는 마음가짐도 달라졌다. 이제 여행은 단순히 업무와 여가의 영역에서 다룰 주제가 아니다. 그것이 중심에 있다고 말하기도 좀 그렇다. 조금 과장을 보태면 여행은 중심을 넘어 전부가 됐다. 삶 그 자체가 된 셈이다. 발행일 2024년 1월 31일 글 이성균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71호 : 🔄직업은 어떻게 사람을 바꾸는가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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