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이별+이직=인생]

인생은 이별과 이직과 이사의 총합이다
[이사] 분갈이 몸살
#1 분갈이 몸살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화분으로 옮겨진 식물이 시들시들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심하면 죽기도 한다. #2 어렸을 적, 처음 전학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새 동네에 큰 탈 없이 적응을 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전에 정을 붙였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쉽게 흐려지는 감정은 좀 이상했다. 당시엔 이상하다는 말을 더 뾰족하게 깎아낼 만큼 어휘가 풍부하지 않았다. 그냥 좀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건 몇 년 뒤, 이별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을 겪고 난 후였다. 사랑이 부패할 수도 있음을, 없으면 죽을 것 같던 이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어떤 시절은 끝난다. 그 시절의 마침표를 성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훼손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 시절이 끝나면 더 이상 스스로를 마냥 좋은 사람으로 여길 수 없게 된다. 성장, 혹은 훼손의 대가로 더 이상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없게 된 이들은 방심하는 순간 시간을 흘리게 된다. 멍을 때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잠들지 못하며. 한때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착한 사람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외면하며, 쏟아져 밀려오는 의심스러운 현재를 겨우겨우 받아내고, 받아들자마자 집어던진다. 이것은 나만의 특별한 감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과거를 다루는 데 실패하며 몸과 마음을 축내고 있다. 모두가 사랑에 싫증 내며 싫증 낸 자신을 싫어하며 현재와 과거의 자신을 번갈아가며 죽이고 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죽이고 때로는 후회하며 현재를 죽인다. 이별이 겨누는 표적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러나 변화는 필연이다. 사랑했던 과거는 반드시 사라진다. 새롭게 찾아온 현재는 언제나 낯설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적응은 최고의 덕목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선 현재에 적응해야 한다. 한곳에 머무르기 어려운 시대인 요즘에 새로운 것을 쉬이 사랑하는 습관은 덕목을 넘어 연마해야 할 재능이 되었다. 그러나 당장 내가 잘 살아보겠다고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은 너무 비정하지 않나. 정말로 사랑했던 과거라면, 그 시절을 애도할 만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 식물이 분갈이 몸살을 앓듯이, 우리에게도 영원히 사라진 과거의 자신을 애도하는 의례가 필요하지 않을까.
  • 풀칠
[이별] A팀장과 함께한 이상한 저녁
A팀장이 내게 저녁을 먹자고 한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나는 같은 부서도 아니고, 직급도 일개 사원과 팀장으로 좀 차이가 났다. 접점이라곤 한두 번 그가 소싱해온 물건들-주로 캠핑용품이나 골프용품-의 상세페이지 담당이 나였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가끔 판매 실적이 괜찮은 물건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냥 회사에서 맡은 일을 한 것일 뿐, 따로 불러내 저녁을 먹자고 할 이유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그 일일지도 몰라.’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스타벅스 앞 벤치에서 A팀장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출근 전 이른 아침에 스타벅스에 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래 책을 자주 읽던 편은 아니었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니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책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보통 일곱시 반에 스타벅스에 도착해서 한 시간 정도 책을 보다 여덟시 반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5분 정도 있으면 선배들이 차례차례 들어온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를 외쳤다. 나는 너무 명랑해서 낯선 내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명랑하게 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아침에 책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하튼, ‘그때 그 일’이란, 사실 ‘그 일’이라고 부르기도 좀 민망할 만큼 별일 아닌데, 회사 1층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는 걸 A팀장에게 들킨 적이 있다는 것이다. (회사 사람이 내가 출근 전에 책을 읽는 걸 알게 된 것은 왠지 ‘들켰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평일 아침의 스타벅스에서 내가 읽다 걸린 책의 제목은 ⸢야간비행⸥이었다. A팀장은 나처럼 생텍쥐페리의 팬이거나, 어쩌면 사내 비밀 결사 독서모임의 일원으로 나를 초대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A팀장이 내게 저녁을 먹자고 한 이유는 책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팀 팀장과 이야기하다가 내가 자기와 같은 대학 출신이란 것을 들었고, 또 내가 다음 달에 퇴사하기로 했다는 것도 들어서, 퇴사 전에 밥 한 번 사주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A팀장은 이 이유를 뻗대듯이 말하는 대신 몹시 조심스러운 어조로,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선 어떤 시혜적인 자의식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긴장이 풀렸고, 고기를 맛있게 먹을 마음까지도 들었다. A팀장과 나는 소주 한 병을 우리가 나온 대학에 한때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진 가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비웠다.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 풀칠
[이직] 퇴사와 이직
행복한 직장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직장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비틀어봤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어서. 이제 겨우 3년차에 접어든 주제에 모든 경우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친구들, 일로 만난 사람들, 들려오는 얘기들. 모두가 조금씩은 다른 고민을 안고 오늘의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내 경우에는 자괴감이라는 요인이 가장 컸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기업에서 일한다는 자괴감. 이전 직장은 사기업치고는 워라밸이 나쁘지 않았다. 막내였지만 인간관계로 고민한 적도 없고 처우도 지역과 업종을 고려하면 박하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기간의 정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에 대한 만족을 내려놓고 적당히 다니기에는 괜찮은 직장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라는 변수를 내려놓는다면 말이다.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좀 더 정확을 기한다면 소규모 사업장에 해당하겠지만. 그래도 대표는 어디선가 투자처를 찾아왔고 스타트업이라면 겪기 마련이라는 보릿고개를 겪지 않아도 됐다. 월급이 밀린 적도 없었다. 문제는 모멘텀도 없었다는 거다. 회사를 다닌 지 일 년 정도 됐을까.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이런저런 궁여지책을 내놓는 회의 가운데서 앞으로도 성장은 없겠다는 불길한 확신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이직은 나에게 마치 못다한 숙제처럼 다가왔다. 이직을 통해 직업을 바꾸거나 직장을 옮기는 친구들을 보고 난 뒤에는 그런 마음이 더 커졌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더 나은 처우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듯 보였다. 부러웠다. 그럼에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하지 못한 건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서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건 많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지쳤다. 퇴근하고 나서 곧바로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가 경력 기술서와 지원서를 썼지만 횡설수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꼭 내겠노라 마음먹고 있던 기업도 기한에 다다라서야 겨우 원서를 제출하곤 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제대로 이직을 하려면 결국 퇴사를 하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봐, 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 풀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