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이별+이직=인생]

인생은 이별과 이직과 이사의 총합이다
[이사] 분갈이 몸살
#1 분갈이 몸살이라는 말이 있다. 다른 화분으로 옮겨진 식물이 시들시들해지는 것을 이르는 말이다. 심하면 죽기도 한다. #2 어렸을 적, 처음 전학을 갔을 때가 생각난다. 새 동네에 큰 탈 없이 적응을 하긴 했지만, 그 과정에서 이전에 정을 붙였던 모든 것들이 너무나 쉽게 흐려지는 감정은 좀 이상했다. 당시엔 이상하다는 말을 더 뾰족하게 깎아낼 만큼 어휘가 풍부하지 않았다. 그냥 좀 이상했다. 이상하다는 말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표현할 수 있게 된 건 몇 년 뒤, 이별이라고 부를 만한 사건을 겪고 난 후였다. 사랑이 부패할 수도 있음을, 없으면 죽을 것 같던 이의 존재를 견딜 수 없게 될 수도 있음을 깨닫는 순간 인생의 어떤 시절은 끝난다. 그 시절의 마침표를 성장이라고 불러야 할지, 훼손이라고 불러야 할지는 모르겠다. 확실한 것은, 그 시절이 끝나면 더 이상 스스로를 마냥 좋은 사람으로 여길 수 없게 된다. 성장, 혹은 훼손의 대가로 더 이상 스스로를 좋은 사람이라고 여길 수 없게 된 이들은 방심하는 순간 시간을 흘리게 된다. 멍을 때리거나 담배를 피우거나 달리기를 하거나 잠들지 못하며. 한때 자신이라고 생각했던 착한 사람과의 거리가 얼마나 멀어졌는지를 외면하며, 쏟아져 밀려오는 의심스러운 현재를 겨우겨우 받아내고, 받아들자마자 집어던진다. 이것은 나만의 특별한 감상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는 모든 이들이 과거를 다루는 데 실패하며 몸과 마음을 축내고 있다. 모두가 사랑에 싫증 내며 싫증 낸 자신을 싫어하며 현재와 과거의 자신을 번갈아가며 죽이고 있다. 계속 살아가기 위해 과거를 죽이고 때로는 후회하며 현재를 죽인다. 이별이 겨누는 표적은 과거와 현재를 넘나든다. 그러나 변화는 필연이다. 사랑했던 과거는 반드시 사라진다. 새롭게 찾아온 현재는 언제나 낯설다.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만이 유일하게 변하지 않는 세상에서 적응은 최고의 덕목이다. 제대로 살기 위해선 현재에 적응해야 한다. 한곳에 머무르기 어려운 시대인 요즘에 새로운 것을 쉬이 사랑하는 습관은 덕목을 넘어 연마해야 할 재능이 되었다. 그러나 당장 내가 잘 살아보겠다고 현재에만 집중하는 것은 너무 비정하지 않나. 정말로 사랑했던 과거라면, 그 시절을 애도할 만한 시간을 가지는 것이 마땅치 않을까. 식물이 분갈이 몸살을 앓듯이, 우리에게도 영원히 사라진 과거의 자신을 애도하는 의례가 필요하지 않을까. #3 이런 비생산적인 생각을 시작한 이유는, 내가 얼마 전부터 다시 회사를 다니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사도 했다. 밥벌이하는 환경에 맞춰 몸을 갈아치운다는 점에서 인간은 소라게와 닮았다. 상상력을 발휘해서 인간과 소라게 사이의 크기차이가 무의미할만큼 커다란 존재를 상상해보자. 그는 어쩌면 인간과 소라게를 같은 종으로 분류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소라게는 이전에 살던 껍데기를 그리워할까? 아니면 그리움은 생존에 방해가 되는 감정이므로 새 껍데기를 구하는 순간 과거의 자신을 깔끔히 부정해버릴까? 사실 이런것들은 죄다 부질없는 망상이다. 인간과 소라게는 다르다. 소라게는 더 작은 껍데기로 찾아들어가지 않으니까. 나의 새로운 집은 원룸촌의 건물들이 대게 그렇듯이, 뜯어보면 이상한 점이 참 많다. 4층인데 실제론 3층이다. 언덕배기 위에 짝다리를 짚고 서 있는 건물인 탓이다. 이전에 살던 집보다 평수가 무려 4평이나 줄었다. 거주자용 현관을 통과하면 바로 2층이 나온다. 1층은 주거공간이 아니다. 셀프세차장이다. 가끔 새벽에 벽이 울린다. 누군가 세차를 하러 온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잠에서 깨어 새벽 3시에 세차를 하러 오는 사람은 어떤 마음일지를 상상한다. 사실 난 새벽잠을 자주 설치는 편이다. 날이 너무 춥지 않은 계절에 잠이 영 오지 않으면 공원을 찾아갔다. 잘 가꿔진 공원에 나가야만 위안을 찾을 수 있는 이는 스스로의 생활력에 의문을 품은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나를 먹여살리기가 어려울 때, 공원은 무료이므로 언제든 즐길 수 있다는 생각에 기뻐하는 것이 나의 비루한 취미였다. 다행히 이전 집 근처엔 공원, 카페, 책방, 산, 도서관이 모두 지척에 있었다. 그때 나는 내가 좋으면서도 싫었다. 돈을 쓰지 않고 삶의 기쁨을 찾아내는 능력에 자부심을 가지면서도, 그 기쁨에 중독되는 것이 너무나 안일한 현실 회피처럼 느껴져 싫었다. 하지만 지금, 세차하는 소리에 잠에서 깬 새벽에 만나게 되는 과거의 나는 좋게만 보인다. 삶을 누구에게도 맡기지 않는 강인한 사람이다. 불안 속에서도 기쁨을 찾아낼 줄 아는 현명한 사람이다. 미화되어 너무나 대단해진 과거의 나. 이 녀석을 죽여야만 새로운 생활에 적응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침대를 사기로 했다. 바닥에서 거리를 두면 새벽에 세차하는 소리도 조금은 작게 들릴 테니까. #4 회사를 다니니 시간이 너무 빨리 흐른다. 그 덕에 침대가 오기로 한 날도 금세 찾아왔다. 배송기사에게 전화가 온다. 그는 내가 회의실에서 스스로 듣기에도 무슨 소린지 알 수 없는 말을 지껄이는 동안에 집에 침대를 가져다 두겠다고 말한다. 생면부지의 남에게 모텔 키를 건네듯이 방 비밀번호를 알려준다. 회의를 마치고 나와 휴대폰을 보니 배송기사가 보낸 문자가 찍혀있다. 입금 바랍니다. 6만 6천 원. 내가 예상한 금액보다 3만 원이나 비싼 금액이었다. “왜 6만 원이 넘죠. 인터넷엔 설치비 3만 3천 원이라고 나와있던데요” “아 거기가 4층이라. 4층부턴 3만 원이 더 붙어서요.” “저 기사님. 저희 집은 2층부터 시작해서 실제론 3층인데요” 배송기사는 완강했다. 문패에 4층이라고 적혀있으면 4층이라는 것이다. ‘실제로는 3층’이란 말은 조금의 설득력도 갖지 못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세상의 모든 것이 다 그렇다. 실제보단 뭐라고 적혀있는 지가 훨씬 더 중요하다. 회사의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변화시킨 서비스를 만들었는지 보단 주식 시장에 적혀있는 숫자로 평가받는다. 글-콘텐츠-은 누군가에게 어떤 감정과 생각을 불러일으켰는지 보단 조회 수가 중요하다. 그래야 광고 지면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 실제로 성격이 어떤지보단 MBTI가 더 중요하다. 때로는 MBTI에 성격을 끼워 맞추며 정체성을 고민하기도 한다. ‘이상하다, 난 J인데, 왜 이럴 땐 P 같지?’ 대충 통화를 끊고 기사에게 6만 6천 원을 보냈다. 회사를 다시 다니려니 참 쉽지 않다. 그래도 팀원들은 다정해서 나의 시선이 신선하다는 말을 건네준다. 지금의 시선을 잃지 않았으면 좋겠다고도 한다. 고맙지만 쉽지 않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신선한 시각이라는 것은 결국엔 내 과거의 덕일 텐데, 나의 당면 목표는 현재에 적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에 적응하는 것은 곧 과거를 죽이는 일이다. 과거를 죽이는 동시에 주머니까지 털어야 하니 참으로 어려운 미션이다. 시도도 해보지 않고 포기하는 것은 신입답지 않으므로 일하는 내내 신선함을 유지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최소한 신입의 딱지가 붙어있는 동안엔 계속 시도해야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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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별] A팀장과 함께한 이상한 저녁
A팀장이 내게 저녁을 먹자고 한 것은 좀 이상한 일이었다. 그와 나는 같은 부서도 아니고, 직급도 일개 사원과 팀장으로 좀 차이가 났다. 접점이라곤 한두 번 그가 소싱해온 물건들-주로 캠핑용품이나 골프용품-의 상세페이지 담당이 나였다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가끔 판매 실적이 괜찮은 물건들이 생기기도 했지만 그냥 회사에서 맡은 일을 한 것일 뿐, 따로 불러내 저녁을 먹자고 할 이유가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쩌면 그때 그 일일지도 몰라.’ 회사 건물 1층에 있는 스타벅스 앞 벤치에서 A팀장을 기다리며 생각했다. 몇 달 전부터 나는 출근 전 이른 아침에 스타벅스에 가 책을 읽기 시작했다. 원래 책을 자주 읽던 편은 아니었는데, 직장인이 되고 나니 무슨 영문인지 갑자기 책이 못 견디게 그리워졌기 때문이다. 보통 일곱시 반에 스타벅스에 도착해서 한 시간 정도 책을 보다 여덟시 반에 엘리베이터를 타러 간다. 5분 정도 있으면 선배들이 차례차례 들어온다. 그러면 나는 세상에서 제일 에너지 넘치는 목소리로 “좋은 아침입니다!”를 외쳤다. 나는 너무 명랑해서 낯선 내 목소리를 들으며, 머릿속으로는 이렇게 명랑하게 굴 에너지를 얻기 위해 아침에 책 읽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여하튼, ‘그때 그 일’이란, 사실 ‘그 일’이라고 부르기도 좀 민망할 만큼 별일 아닌데, 회사 1층 스타벅스에서 책을 읽는 걸 A팀장에게 들킨 적이 있다는 것이다. (회사 사람이 내가 출근 전에 책을 읽는 걸 알게 된 것은 왠지 ‘들켰다’라고 표현해야 할 것만 같다.) 평일 아침의 스타벅스에서 내가 읽다 걸린 책의 제목은 ⸢야간비행⸥이었다. A팀장은 나처럼 생텍쥐페리의 팬이거나, 어쩌면 사내 비밀 결사 독서모임의 일원으로 나를 초대하려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A팀장이 내게 저녁을 먹자고 한 이유는 책 때문이 아니었다. 우리 팀 팀장과 이야기하다가 내가 자기와 같은 대학 출신이란 것을 들었고, 또 내가 다음 달에 퇴사하기로 했다는 것도 들어서, 퇴사 전에 밥 한 번 사주고 싶었다는 것이 이유였다. A팀장은 이 이유를 뻗대듯이 말하는 대신 몹시 조심스러운 어조로, 거의 기어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거기에선 어떤 시혜적인 자의식도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긴장이 풀렸고, 고기를 맛있게 먹을 마음까지도 들었다. A팀장과 나는 소주 한 병을 우리가 나온 대학에 한때 있었지만 이제는 사라진 가게들에 대해 이야기하며 비웠다. 대화는 주로 이런 식이었다. “00비어 아직 있어요?” “아 거기! 저 2학년땐가? 그때 없어졌어요.” “00치킨은요?” “아 거기! 거기도 많이 갔었는데... 없어진 지 한참 됐죠.” 그가 어떤 추억을 말하면 나는 그때마다 그 추억이 이 세상에서 사라졌음을 확인시켜줬다. 사망선고를 내리는 의사가 된 기분이었다. 그러다 문득 나도 곧 회사에서 ‘한때 있었으나 사라진’ 사람이 될 처지라는 것이 떠올랐다. 그래서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저도 퇴사하고 나면 이렇게 얘기되겠네요. ‘00씨 기억나요? 아, 그때 마케팅팀에 있던 걔? 관둔지 한참 됐지’,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팀장님. 나중에 저는 어떻게 기억될까요?” A팀장은 좀 의외라는 듯이 눈을 똥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봤다. “그런 걸 신경 쓰는 사람이었어요?” “당연하죠, 저도 사람인데. 제 평판을 알아야 나중에 다른 회사에서 레퍼런스 체크한다고 할 때 걱정을 하든 안심을 하든 할 것 아닙니까.” “맨날 옷도 후리한 것만 입고, 출근 전에 책읽고… 그런 건 하나도 신경 안 쓰는 사람인 줄 알았어요” 억울했다. 내가 출근 전에 책을 읽은 건 신입답게 회사 생활을 해낼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인데, 그런 속도 모르고 괴짜로 보는 근거로 들다니…. 나는 그 때(A팀장에게 들켰을 때) 읽던 책, <야간비행>이 얼마나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되는 내용인지를 설명해 주기로 했다. 엄밀히 말하면 직장 생활에 도움이 되는 점을 일부러 찾아내며 읽은 것도 아니고, 그 책이 담고 있는 주제가 ‘직장 생활 잘 하는 법’이란 확신도 들지 않았지만 원래 엄밀하지 않은 오해는 엄밀하지 않은 아무 말로 해명되기 마련이니까. “팀장님, 제가 그때 본 책 <야간비행>은 상사와 부하직원이 각각 처한 상황이 완전히 다르고, 그래서 서로를 이해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소설이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팀장님은 저를 무슨 괴짜처럼 보고 계신 것 같은데요? 저는 괜찮습니다. 오해를 살 가능성을 염려해서 책을 읽은 거니까요. 오해를 막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해를 받고 놀라지 않기 위해서요. 그 책이 무슨 내용이냐면요, 관제탑의 깐깐한 부사장 라비에르는 파일럿들을 사랑하고, 그들의 용기와 두려움을 존경하지만 그가 파일럿에게 실제로 해 줄 수 있는 건 징계뿐이거든요. 폭풍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연착이 된 경우에도 얄짤없이 징계를 내립니다. 그래야 일에 차질이 생기지 않는다고 믿기 때문에요. 그가 벌하는 것은 사람이 아니라 그들의 두려움이고, 두려움을 벌함으로써 파일럿이 두려움을 정복하게 될 것이고, 비행기는 연착하지 않을 것이라는 이상한 논리로 징계를 내리죠. 오늘날에도 비행기 연착은 잦지만 말이에요. 그런데 이 책은 파일럿들이 야간비행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하면서 씩 웃는 장면으로 끝나거든요. ‘그 바보 같은 라비에르가 글쎄…내가 두려워하는 줄로 알고 있는 게 하도 기가 막혀서!' 팀장님이 바보 같다는 건 절대 아니고, 제 버전으로는 이런 겁니다. 저한테 왜 웃느냐고 물어보세요. 어서요. (A팀장이 물어봤다. “왜 웃으세요?”) 바보같은…아니 무심한 팀장님. 팀장님이 제가 평판따윈 신경 안 쓰는 사람인 줄 아는 게 하도 기가 막혀서!“ A팀장은 내 얘길 듣더니 조금 엉뚱하게, 그러나 술자리에서 충분히 용인 가능한 수준의 핀트가 나간 대답을 했다. “와 그 책 재밌겠네요. 제가 그 관제탑이다 이거죠? 근데 관제탑 노릇도 쉽지가 않아요. 어쨌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이랑 잘 지내야 하니까요. 다들 일로 만난 사이니까. 제가 재밌는 거 하나 알려줄까요. 저번 주에 제 생일이라 케잌 썰었었잖아요?” 사실이었다. 덕분에 때마침 탕비실에 커피를 타러 갔던 나도 케잌 한 조각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사실 그날 제 생일 아니에요. 민증 생일이랑 진짜 생일이랑 다른데, 카톡에 민증 생일로 뜨니까…그래서 그냥 생일인 척했던 거예요." 그의 가짜 생일파티 고백을 들으며, 나는 아직 원래 질문이었던 내 평판에 대한 답을 아직 듣지 못했다는 것을 잊어버렸다. “그럼 진짜 생일은요? 진짜 생일도 챙겨요?” “아뇨, 바쁘기도 하고 부산스러우니까. 설명하기도 어렵고. 매번 기억해 주길 바라는 것도 좀 오바다 싶고. 그래서 그냥 아예 안 챙겨. 사실 뭐 별건가 싶기도 하고.” 그는 갑자기 반말을 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이해할 수 없음을 인정한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가짜 생일을 축하하는 기분은 왠지 모르게 자기의 장례식에서 별로 울지도 않고 술이나 마시는 친구들을 보는 기분과 닮아있을 것 같았고, 진짜 생일날엔 세상에 태어난 걸 알고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태어나지도 않았으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것 같았다. 그게 찡해서 나는 눈앞에서 앉아 술을 마시고 있는, 같이 평일 저녁에 술을 마신다는 것이 이상한 사이인, 나보다 몇 살 많고 돈은 훨씬 잘 버는, 시종일관 핀트가 어긋난 대화를 주고받고 있는 이 사람에게 그만 나의 시답잖은 이야기들까지 말해버렸다. 그중엔 그와 내가 한때 머물렀던 망해버린 가게를 배경으로 하는 지난 연애담도 있었고, 스타벅스에서 책을 보는 것은 어쩌면 내가 회사를 좀 경멸하고 있기 때문인 것 같다는 얘기도 있었다. 그는 내게 진짜 생일이 언젠지 말해줬다. 한마디로 완전히 취한 대화들이었다. 가게 영업시간이 10시까지인 것이 천만다행이었다. 집에 돌아오는 첫 번째 지하철에서, 할 필요 없는 말을 너무 많이 했고 또 듣지 않았으면 좋았을 뻔한 말도 꽤 많이 들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괴로웠다. A팀장은 별 상관도 없는 사람이었는데. 예의 바른 인사와 쾌활한 안부만 전하는 수많은 일로 만난 사이 중 한 명일 뿐이었는데. 요청과 송부와 피드백만 오가는 논리적인 사이였는데. 내 맘대로 해석해서 은밀한 경멸과 내밀한 존경 사이를 아무렇게나 오가도 상관없는, 편리한 표면적 인물이었는데. 오늘 술자리에서 A팀장과 나눈 대화가 꼭 일로 만난 사이에 합당한, 그래서 굳이 풀 필요 없는 거리의 방정식을 풀려는 어리석은 시도처럼 느껴졌다. A팀장의 진짜 생일은 불의의 사고로 구해버린 X값이고. 내가 그의 진짜 생일을 기억하는 유일한 사람이면 어쩌나, 하는 생각에 마음이 불편했다. 다시 A팀장을 조금도 이해하지 못했던 몇 시간 전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시간을 돌릴 수 없으므로 나는 차라리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걸어볼까 싶었다. 이상한 사고의 흐름이란 생각이 취한 와중에도 들었지만 동시에 어딘지 그럴싸한 점도 있다고 느껴졌다. 어떤 사이의 거리가 흐트러진 김에 다른 사이의 거리도 흐트러트리는 일탈의 날로 삼고 싶은 것일 수도 있고, 새로운 이해가 두려운 나머지 안전한 옛 이해를 찾는 퇴행 욕구일 수도 있다. 옛 애인이란 한때 누구보다 나를 제대로 이해했던 관계에 붙이는 이름이기도 하니까. 혹은 그냥 술 마셔서 그리운 것일 수도 있다. 환승역에서 바로 지하철을 타러 가는 대신 공중전화를 찾아 헤맸다. 처음으로 환승역에서 머무른 시간이었다. 아직 역 안엔 공중전화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 공중전화를 사용하지 못했다. 옛 애인의 전화번호가 떠오르지 않아서. 공중전화는 아직 환승역 한 귀퉁이에 있었지만 나는 결국 옛 애인에게 전화를 걸지 못했다. 번호가 생각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술에 취한 와중에도 내 핸드폰으로 걸면 전화를 안 받을 것이 분명하니까 요즘엔 잘 쓰지도 않는 공중전화로 전화해야겠다는 작전까지 세웠으면서도 정작 옛 애인의 번호가 떠오르지 않았다는 것이 어이없었다. 취업할 때쯤, 옛 애인과 나눴던 대화가 떠올랐다. 앞으로 보고 싶으면 어떡해야 하냐는 물음과 이제 어른이니까 참으라는 대답. 그때 나는 서울에 방을 알아보러 다니고 있었다. 전화번호 대신 떠오른 그 문답을 곱씹으며 나는 집으로 가는 두 번째 지하철을 타기 위해 카드를 찍었다. 기쁨도 슬픔도 느껴지지 않는 개찰구의 목소리가 “환승입니다”라고 말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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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 퇴사와 이직
행복한 직장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직장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비틀어봤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어서. 이제 겨우 3년차에 접어든 주제에 모든 경우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친구들, 일로 만난 사람들, 들려오는 얘기들. 모두가 조금씩은 다른 고민을 안고 오늘의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내 경우에는 자괴감이라는 요인이 가장 컸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기업에서 일한다는 자괴감. 이전 직장은 사기업치고는 워라밸이 나쁘지 않았다. 막내였지만 인간관계로 고민한 적도 없고 처우도 지역과 업종을 고려하면 박하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기간의 정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에 대한 만족을 내려놓고 적당히 다니기에는 괜찮은 직장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라는 변수를 내려놓는다면 말이다.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좀 더 정확을 기한다면 소규모 사업장에 해당하겠지만. 그래도 대표는 어디선가 투자처를 찾아왔고 스타트업이라면 겪기 마련이라는 보릿고개를 겪지 않아도 됐다. 월급이 밀린 적도 없었다. 문제는 모멘텀도 없었다는 거다. 회사를 다닌 지 일 년 정도 됐을까.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이런저런 궁여지책을 내놓는 회의 가운데서 앞으로도 성장은 없겠다는 불길한 확신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이직은 나에게 마치 못다한 숙제처럼 다가왔다. 이직을 통해 직업을 바꾸거나 직장을 옮기는 친구들을 보고 난 뒤에는 그런 마음이 더 커졌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더 나은 처우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듯 보였다. 부러웠다. 그럼에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하지 못한 건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서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건 많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지쳤다. 퇴근하고 나서 곧바로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가 경력 기술서와 지원서를 썼지만 횡설수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꼭 내겠노라 마음먹고 있던 기업도 기한에 다다라서야 겨우 원서를 제출하곤 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제대로 이직을 하려면 결국 퇴사를 하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봐, 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직장에 대한 자괴감은 이직 시장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쉽게 말해서 겁이 났다. 내가 여기를 나와서 다른 곳에 갈 수 있을까? 이런 물경력을 어디에 내밀지? 같은 생각을 늘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직에 대한 갈망(?)과 현 상황에 대한 자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악순환하면서 불편한 허리띠처럼 늘 나를 졸라맸던 셈이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갑작스럽게 이직을 하게 됐다. 내가 달라진 것도 회사가 달라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 라고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사람인을 통해 지원한 이력서가 운 좋게 면접으로 이어졌고 당장 내일 모레 면접을 보러오라는 전화에 부랴부랴 연차를 쓰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직 시도가 면접으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양복까지 갖춰 입고 덜덜 떨면서 신입과 별반 다르지 않은 채로 면접을 치뤘다. 다음 날 언제 나올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만일 이번 이직에 만족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머뭇거리게 된다. 급하게 내린 결정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괜찮은 처우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됐다.(이건 다음 번 글에서 좀 더 풀어쓰고 싶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만족한 건 아니지만. 이제 갓 한 달이 지났으니 새 직장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건 조금 불공평한 처사 같다. 일단 탈출은 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자. 이직에는 쟁취형 이직과 탈주형 이직, 이 두 가지가 있다는데. 애매하게도 나는 그 어딘가로 향하고 말았고 오늘도 헤매고 있다. 그럼에도 이직의 경험으로 얻은 게 있다면 내가 어떤 조직에 있었던 간에 안락했을지도 모를 그곳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마다의 불행이 더 나은 곳으로 스스로를 밀어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기를.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응원하고 싶다. 발행일 2020년 7월 29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호 : 퇴사와 이직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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