느리게 먹는 사람의 사정
올여름은 사람들이 봄에는 절대 하지 않던 말로 점심 시간을 알렸다. “아, 밖에 나가기 싫어!” 갑자기 쏟아지는 비나 찌는 듯한 더위로 무장한 요즘 날씨를 보면 그 마음도 충분히 이해가 된다. 하지만 나는 봄에도, 겨울에도, 가을에도, 밖에 나가기 싫었다. 사람들이 밥을 너무 빨리 먹기 때문이다. 빨리 먹기만 하면 다행이다. 일찌감치 식사를 끝낸 임원들이 간혹 “음식이 입에 안 맞냐”, “다이어트 중이냐“, “속이 안 좋냐“ 같은 말을 하시는데, 말투도 다정하고 매일 그러는 것도 아니지만 아주 가끔은 어쩔 수 없이 짜증이 난다. 차라리 회의실에서 혼자 배달음식을 천천히 먹는 쪽이 더 낫다. 물론 점심용 법카의 유혹을 무시할 순 없어 함께 나가게 되지만. 느리게 먹는 사람의 식사는 식당에 도착하기 전부터 시작된다. 우선 임원들과 다른 테이블에 앉기 위해 걸음 속도를 조절해 되도록 뒤편에 선다. 그렇다고 맨 마지막 순서로 들어가도 안 된다. 테이블당 인원을 맞추느라 임원들과 같은 테이블로 배치될 수도 있으니까. 끝에서 두세 번째로 입장하는 게 마음이 편하다. 이 단계는 그날의 식사를 편히 할 수 있는 여부를 결정할 정도로 중요한데, 비교적 느리게 먹는 직원들과 앉으면 식사를 끝낸 임원들 쪽 테이블은 먼저 일어날 것이므로 나는 여유롭게 밥을 먹을 수 있기 때문이다. 아쉽게도 임원들과 같은 테이블에 앉았다면? 직장 생활 11년 차에겐 아직 많은 팁이 남았다. 제일 늦을 것은 확정이니 “왜 이렇게 밥을 안 먹냐” 소리를 듣지 않는 것으로 목표를 수정한다. 먼저 메뉴 선택. 내 메뉴가 가장 늦게 나올 것을 감수하고 자유롭게 선택할지, 안전하게 누군가 주문한 메뉴를 같이 고를지 선택해야 한다. 이때 웬만하면 면보다는 밥으로 주문하는 게 좋다. 면은 먹는 도중 불기 때문에 남긴 양이 더 많아 보일 수 있다. 옆 사람에게 맛 좀 보라고 나눠주는 것도 괜찮은 방법. 공깃밥을 먹는 경우에는 나올 때 꼭 뚜껑을 덮어 놓는다. 모든 시도가 실패한 날에는 “왜 이렇게 밥을 안 먹냐”라는 말을 그냥 받아들인다. ‘밥 먹었냐’는 말이 안부 인사인 한국 사회에서 식사량을 체크하는 어른의 말은 걱정 어린 관심이니까. 혹시라도 욱하는 마음에 “밥을 안 먹는 게 아니라요. 저는 빨리 먹으면 체해서 밥을 천천히 먹는데 다들 너무 빨리 드시니까 먹을 시간이 없는 거예요. 그렇다고 맨날 제가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리시라고 할 수도 없잖아요”라고 말해서는 안 된다. 첫 번째 직장과 두 번째 직장에 다닐 땐 감히 따로 밥을 먹는다는 생각은 못 했다(지금은 다섯 번째 직장에 다니고 있다). 게다가 그곳에는 남이 음식 남기는 걸 싫어하는 상사들이 있었고 불행히도 나의 식사 속도는 그때도 똑같이 매우 느렸다. 사회 초년생 시절이라 늘 긴장했던 탓도 있겠지만, 점심식사마다 제대로 씹지도 않은 음식을 꾸역꾸역 삼킨 결과 내과에 출석 도장을 찍었고 카베진(위장약)도 달고 살았다. 그 카베진까지 토해내는 사태에 이르렀을 때는 직장 생활하면 원래 몸을 다 버리는 거라고, 밥 먹는 시간조차 윗사람에게 맞춰져 있는 것이 한국 사회라고 스스로를 납득시켰다. 하지만 어느 날 말수 없는 팀장이 막내인 네가 밥 먹을 때 말 좀 하라고 했을 때는 정말 억울했다. 아니, 밥 먹는 속도 맞추는 것만으로도 죽겠는데 말까지 해야 되나. 밥 먹느라 조용한 분위기가 괴로운 사람은 팀장이지 내가 아닌데. 나는 대체 언제 제대로 점심을 먹을 수 있지. 그때부터 이직의 조건도 ‘점심시간이 즐거울 수 있는 회사’가 됐다. 여전히 점심을 먹고도 배가 안 차 아이스라떼를 마시고 오후 세 시면 배가 고파 탕비실에 들락날락거리지만, 이제 빨리 먹는 사람들과의 식사에 나름대로 적응했다. 근로기준법 제54조 1항(2024년 8월 기준)에 따르면 근로자는 하루 여덟 시간 일하면 1시간의 휴식 시간을 근로 시간 도중에 제공받아야 하고 대부분의 회사는 이 시간을 점심시간으로 쓴다. 이렇게 금쪽 같은 1시간을 다른 사람들이 내 식사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데 쓰도록 하고 싶지도 않다. 내가 불만인 쪽은 휴식 시간을 한 시간으로 정한 이들이다. 식당에 가고 메뉴를 주문하고 기다리고 먹고 돌아오는 데만 한 시간을 다 쓰는데! 밥 먹고 바로 앉는 것이 소화에 가장 안 좋다는데! 여유롭게 식사하고 음료 한 잔 들고서 산책하면서 소화할 시간이 있으면 얼마나 좋습니까? 주 4일제보다 점심시간 늘리는 게 더 시급하다고요. 휴식 시간을 한 시간이라고 정한 사람들도 중년 남자들이고, 밥을 빨리 먹을 테고, 밥 먹고 산책해도 한 시간 안에 할 수 있다면서 “왜 밥 먹는데 한 시간 이상 필요하냐”고 물으시겠죠? 음식을 먹으면 약 15분 후에야 뇌로 음식이 들어왔다는 신호가 전달된다. 천천히 먹을 땐 이 신호를 많이 받지만 빨리 먹으면 특히 15분 내로 먹으면 신호를 잘 못 받아 배가 덜 부를 수밖에 없다. 요즘 혈당을 낮추기 위해 탄수화물을 마지막에 먹는 식사법이 유행하고 있는데 이 역시 빨리 먹으면 소용없다. 혈당이 급하게 올라 몸이 쉽게 피로해지며 각종 위장 질환이 생기기도 쉽다. ‘밥 먹었냐’는 인사가 안부인 한국 사회에서 이렇게나 밥을 잘못 먹고 있다. 식사 속도만 늦춰도 과식을 방지하고 소화도 잘 시키고 스트레스도 줄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