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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알 듯 말 듯해, 혁신
풀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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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곧 초복이군.’
10년 전 이맘때 전역을 앞두고 마지막으로 먹은 짬밥이 ‘초복 특식’ 삼계탕이었던 탓에 매해 이맘때면 ‘이제 곧 초복이군’ 하게 된다. 하지만 난 초복을 챙기지 않는다. 여름이면 기운이 떨어지기 때문에 꼭 보양을 해야 한다고 여기는 사람도 아니다. ‘이제 곧 초복이군’ 하게 되는 것과 내 라이프스타일은 별 관계가 없다. 그건 뭐랄까…꼭 한 시절의 상흔으로 마음에 남았을 뿐이다. 중복과 말복은 언젠지도 모르고 지나간다는 게 증거다.
‘이제 곧 초복이군’이라는 생각은 한동안 일상 속 여기저기서 튀어나온다. 회의 중 쉬는 시간에, 점심 먹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에, 퇴근 후 지하철역까지 걷는 동안, 옆 사람에게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이제 곧 초복이네요…삼계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지요. 그러나 대개 말만으로 그친다. 나는 초복을 챙기지 않기 때문이다. 삼계탕을 먹을 수 있지만 그 이유는 ‘초복이라서’가 아니라 ‘먹고 싶으니까’다. 내 선택의 근거를 외주 주지 않으리.
그러거나 말거나 많은 사람이 초복에 삼계탕을 먹는다. 중복도, 말복도 놓치지 않는다. 삼계탕집 주인은 삼복 시즌이면 더 많은 재료를 확보해 둘 것이다. 올림픽 같은 이벤트를 앞두고 스포츠 브랜드가 물량 갖추기에 들어가듯이. 연말이면 베이커리에서 각양각색 신상 케이크를 내놓듯이. 아주 작은 습관이라도 절대 다수의 사람들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장이 형성된다. 역시 습관이야말로 가장 큰 상품이다.
갑자기 궁금해진다. 이 말도 안 되는 습관은 어디에서 비롯됐을까.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도 더운 날에 뜨거운 음식을 먹어 더위를 이겨내겠다는 발상을 최초로 했던 사람은 누굴까.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걸 주장하고 설득하는 게 쉬운 일은 아닐 텐데. 누군지 몰라도 덕분에 800만 삼계탕인이 여름에도 밥 먹고 산다. 아니지, 밥 팔고 산다. 다른 게 혁신이 아니다. 이런 게 혁신이지. 다음 혁신은 ‘겨울에 냉면 먹는 날 만들기’ 정도 되려나.
친구와 냉면을 먹다가 슬쩍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식초와 겨자를 골고루 뿌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아니지. 그건 너무 1차원적이잖아.”
“그럼? 네가 생각하는 다음 혁신은 뭔데?”
“아무도 상상 못한 시원한 음식을 만드는 거지. 예를 들면 아이스 버거라던가…”
“듣기만 해도 *롯스럽네.”
*롯스럽다: 희한한 버거(ex. 왕돈까스 버거)를 자주 내놓는 롯데리아의 실험정신을 일컫기 위해 유튜버 침착맨이 만들어 낸 신조어다. 그는 롯스러움에 대해 “자신감 있게 하다가 덤벙대고, 기대하고 실망하다가 거기서 나도 모르게 정이 들어서, 나중에 계속 생각이 나서 롯데리아를 선택하는 그런 느낌”이라고 말했다.
“직관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게 혁신이라며.”
“난 아이스 버거 따위를 주장할 용기도 없고 설득할 자신도 없어.”
“훗날 아이스 버거로 세계 버거 시장에 혁신을 이뤄낸 사람의 전기에서 주인공에 반대하다가 결국 그를 떠나는 인물이 칠 법한 대사군.”
아이스 버거는 혁신인가. 듣자마자 말 같지도 않은 소리라고 생각한 나는 정녕 혁신의 반대자일 뿐인가? 그렇다면 혁신이란 무엇인가. 무엇이 혁신을 혁신이게 하는가. 그건 바로 논리다. 상대방이 스스로 ‘말이 되네’라고 생각하게끔 길을 뚫어줘야 한다. 예컨대 더운 날에 뜨거운 음식을 먹어 더위를 이겨내겠다는 발상에는 논리가 있다. 날씨가 더우면 상대적으로 몸 속 온도가 차갑다. 때문에 뜨거운 음식을 먹어 몸 속 온도를 높여주면 몸 안팎의 온도가 맞아 더위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추운 날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다.
그렇다면 아이스 버거에는 논리가 존재하는가. 존재하지 않는다. 대체 차가운 빵과 패티 어디에 논리가 존재한단 말인가. 제아무리 굴려봐도 내 머리는 기껏해야 냉채족발 버거를 넘어서는 아이디어는 떠올리지 못한다. 냉채족발 버거, 그럴 듯하다고? 천만의 말씀. 이정도 수준의 일탈은 전위적 버거 제조의 선두주자인 롯데리아에서 이미 검토했을 것이다. 롯스러운 그들조차 말끝을 흐렸을 테지. ‘아, 이건 좀…’ 아이스 버거는 훌륭한 상상이다. 좋은 시도였다는 평가를 받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혁신이라고는 할 수 없다.
잠깐. 이거 누구에게 하는 말이지?
얼마 전 동료들과 하루종일 토론하며 세운 회사의 비전이 떠올랐다. 비전 달성에 필요한 프로덕트에 대한 아이디어 스케치가 머릿속을 스쳐갔다. 그것들을 설명하는 문장에 사용된 ‘차별화’, ‘핵심 가치’, ‘영향력’, ‘탁월한’, ‘압도적인’, ‘폭발적인’ 같은 단어들이 생각을 멈춰세웠다. 우리가 작성한 건 전략 문서일까? 혹시 우리 비즈니스에 깃들길 바라며 그저 써내려 간 기도문 아니었을까? 우리가 혁신이라 여겼던 것들, 적어도 혁신을 이루겠다는 마음은 진심이라 믿고 내놓은 것들. 그건 생김새만 좀 다른 아이스 버거 아니었을까?
“사고 흐름이 왜 이렇게 자학적이야? 얼마나 대단한 거 한다고. 아니, 대단한지 아닌지도 모르지. 거기에 얼마나 매달렸다고 말야. 그냥 좀 뻔뻔하게 굴어. 뻔뻔하게. 현실에서는 뻔뻔함이 자주 논리를 이긴다고.”
“그렇게 이긴 사람들이 자신의 뻔뻔함을 논리로 착각하는 꼴이 얼마나 역겨운지 너도 알잖아. 난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고.”
“난 역겹다고 생각 안 해. 결과적으로 뭔가가 되게 만들었다면 그건 충분히 논리적이었던 거라고 할 수 있으니까. 그게 역겨울 거면 입만 열면 혁신, 혁신 하는 업계에서 일 못하지. 근데, 혁신 없는 업계가 있긴 하냐?”
“너 <스티브 잡스>니 <일론 머스크>니, 하여튼 그런 기업가 이야기 그만 좀 읽어.”
“왜 얘기를 그쪽으로 틀고 그래?”
친구의 말이 일리 없는 얘기는 아니다. 혁신은 결과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누구도 혁신이란 걸 알 수 없으니까. 그렇다면 그것을 혁신이라는 결과로 이끌 수 있는 사람은 결국 그것을 실행하는 사람뿐이다. 타인(심지어 같은 팀 동료 중에도 있을 수 있다)에게는 허무맹랑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그 자신만큼은 맹신해야 하는 이유다. 어쩌면 그걸 두고 뻔뻔함이라 이르는 것은 실례일지도. 아직 그런 믿음을 가져본 적 없는 나로서는 그저 지나가는 게 최선일 것이다. 내게도, 그에게도. 그런데 ‘그’가 누구지? 사실 그거, 내가 맡아야 하는 역할이기도 한 거 아닌가?
집에 가는 지하철 안에서 스마트폰 화면을 켜자 토스에서 보낸 푸시 메시지가 뜬다.
‘아마존 📈 최근 1년 중 최고가를 기록했어요(276,988원)’
챗GPT의 등장 이후 모든 이목이 AI로 쏠렸던 지난해 초, 빅테크 위주로 주식을 샀다(생애 첫 투자다). 마침 여유 자금이 있었고 여기저기서 듣고 본 것과 차트 모양을 봤을 때 이 주식들의 가치는 분명 더 오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토스 증권의 깔끔한 UIUX는 초보자의 주식 투자 진입장벽을 낮춰줬다. 공부한다 생각하고 소소하게 넣자는 마음을 먹기 쉬웠다(더 넣을걸!). 생각해 보면 그때 내 결정에도 ‘이건 매우 혁신적이다!’라는 판단이 있었다(온 세상이 똑같이 얘기하긴 했지만).
혁신…대체 뭘까? 알다가도 모르겠다. 일단 내일 생각하자. 고민을 집안까지 끌고 들어올 필요는 없으니. 냉장고를 열었다. 다음날 도시락으로 싸갈 것이 똑 떨어졌다. 하지만 괜찮다. 내게는 컬리가 있으니까. 그런데 아차, 11시가 넘어 새벽배송을 놓쳤다. 괜찮다. 나는 쿠팡 와우멤버십 유저이기도 하니까. 유유히 식재료와 냉동식품을 골라담고 ‘밀어서 결제하기’로 간편하게 쇼핑을 마친다. 간단히 씻고 침실로 들어가 넷플릭스를 켠다. 뭘 볼지는 모르겠지만 다들 그렇듯 일단 켠다.
모두 한때는 아이스 버거 취급을 받았을 것이다. 누차 말하지만 아이스 버거는 혁신이 아니다. 하지만 그것이 아이스 버거인지 아닌지 역시 아무도 모른다. 간편송금도, AI도, 새벽배송도, 유료 스트리밍 플랫폼도 결국 스스로 논리를 만들어 주장했고 사람들을 설득했다. 그러고 하면 세상에 혁신 아닌 게 없다. 세상 자체가 온통 혁신의 결과로 이뤄져있다. 정말 그렇다. 어딘가에는 분명 나만의 혁신도 있을 것이다. 세상까지 안 바꿔도 된다. 비즈니스가 아니더라도 괜찮다. 나만 바꿔도 그건 충분히 유의미한 혁신일 테니까.
그만 자야겠다. 시리야, 내일 7시에 깨워줘.
발행일 2024년 7월 10일
아매오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86호 : 🍔아이스버거는 혁신인가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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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칠
번아웃이 처음인 사람
번아웃인가요? '어디 보자...이 정도면 웰던인가?' 잠깐 서 있기만 해도 바삭하게 타들어 가는 한여름, 나는 머릿속으로 굽기 정도를 체크하고 있었다. 스테이크 얘기가 아니라 번아웃 얘기다. 사실 회사에서 일하는 모든 사람은 조금씩 속에 불이 있을 거다. 누군가는 업무 지시에 천불이 나고, 누군가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고, 누군가는 잔불만 남겨둔 채 아무도 모르게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겠지. 그게 홧병이 되고 인정에 대한 목마름이 되고 번아웃이 되고, 뭐 그런 거 아닐까. 아무튼 한 여름에 피부만 타는 것도 힘들어 죽겠는데 마음 속의 불까지, 안과 밖이 골고루 타고 있다. 인터넷 어디 한 구석에서는 번아웃까진 아니고 노릇하게 타버린 상태를 토스트 아웃이라고도 하던데...얼마나 'Burn'했는지 겪어보질 못했으니, 지금 내 마음은 잘 타고 있는 건지 하염없이 들춰보기만 했다. <해리포터>에서 호그와트 입학생들의 기숙사를 정해주는 마법 모자 같은 거라도 있었으면 판단하기 쉬웠을 거다. 🧙‍♂️: '번아웃!', '번아웃까진 아니네...토스트 아웃!', ‘일하기가 싫다...? 뺑끼!' 그러다 어느 날 출근해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는데 눈물이 글썽 하고 나는 것이다. 다 탄 장작이 쉽게 바스러지는 것처럼 텅 비고 허무한 기분이 느껴졌다. 그 길로 속초행 버스를 끊었다. 속초로 가자 속초까지는 2시간 30분 정도가 걸린다고 한다. 무거운 몸과 마음을 자리에 놓고 나니 내가 왜 여기에 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부끄러운 고백을 하자면, 나는 내 일을 사랑하는 편이다. 일에 대한 낭만을 찾으면 멍청한 사람 소리 듣기 딱 좋은 낭다뒤(낭만 다 죽은) 시대에 좋은 팀장, 좋은 동료 만나 인정받으며 재밌게 일하고 있다. 그러니 이 울적한 기분이 도무지 이해가 안 가는 것이다. 그래서 바다가 보고 싶어서 속초로 가는가 보다 생각했다. 바다는 어떤 넌센스도 다 품어줄 것 같았으니까. 그런 너절하고 시시한 생각을 하며 계획도 없이 속초 터미널에 도착하니 인기척 하나 없이 조용했다. 대충 게스트 하우스에 짐을 풀어놓고 동명항을 따라 걸으며 두 가지 여행 원칙을 세웠다.
풀칠
이번 여름엔 포켓몬을
최근 업무 미팅에서 가장 편리한 스몰 토크 주제는 여름 휴가다. 너무 무겁지도 않으면서 회사 돌아가는 상황도 떠볼 수 있고, 여행 이야기로 대화가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 휴가 계획을 물었을 때의 반응은 극명하다. 여행을 계획하고 있다는 쪽이 있는가 하면 쓴웃음을 지으며 며칠 쉴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고 답하는 이들도 꽤나 된다. 어떤 이들은 예전처럼 회사가 여름 휴가기간을 따로 두는 게 아니니 길게 다녀 올 필요도 없고 그럴 여유도 없으니 짧게 연차를 써서 그냥 쉬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멀리 놀러갈 힘도 없고 그냥 집에서 늦잠 자고 배달음식 시켜먹고 유튜브, 넷플릭스 보면서 쉬는 게 최고라는 얘기로 귀결된다. 나 또한 여러 일정으로 녹록치 않아진 탓에 긴 휴가를 내지 않을 예정이다. 대신 며칠 쉬면 하고 싶은 게 생겼는데 그건 포켓로그다. 유튜브에 어느 샌가 자꾸 포켓몬 게임 영상이 뜨기에 뭔가 하고 하나 둘씩 챙겨 봤더니 일종의 팬게임이라고 한다. 포켓몬을 잡아서 배틀만 주구장창 하는 게임이라는 게 생각보다 재미가 있다고 한다. 그게 뭐가 재미있어, 하며 플레이 영상을 보다가 지하철 역을 지나치는 줄도 모르고집중하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했다. 학창 시절에는 게임을 그리 즐긴 편은 아니다. 학창 시절에는 메이플이나 던파를 조금 하던 게 전부고, 남들이 열심히 하던 롤을 한 건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게임을 아주 싫어하는 건 아니어서 성인이 되면 닌텐도를 사서 젤다의 전설 같은 게임을 하면서 여유롭게 쉬는 그런 모습을 그려보기도 했다. 게임이 어떻게 보면 일종의 유예였던 셈이다. 마시멜로 이야기를 아시는지. 오늘의 쾌락을 내일로 미뤄야지만 성공할 수 있다는 이야기. 생각해보니 풀칠에 가끔 등장한 주제이기도 하다. 20대의 나에겐 게임이 일종의 마시멜로였던 거 같다. 누군들 몰입하며 즐길 수 있는 오락을 하고 싶어하지 않을까. 그렇지만 마시멜로를 먹지 않아야지 성공한다는 철학을 순진하게 믿었고 게임이라곤 유튜브에서 게임 줄거리를 풀어서 설명해주는 영상을 보는 게 전부였을 따름이다. 근데 야근을 반복하는 요즘, 내가 먹지 않고 쌓아두었던 마시멜로는 다 어디에 있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럴 거면 자기 개발이고 뭐고 오늘 하루를 팽팽한 긴장감으로 즐기는 게 훨씬 즐거운 삶 아닌가 하는. 아무리 생각해도 삶을 지나치게 무겁게만 받아들이는 것이 꼭 좋은 일만은 아니다. 오늘 하루를 최대한 즐겁게 보내는 게 더 나은 삶이 아닐까 싶다. 순간의 즐거움 속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것도 중요한 일이다. 요즘 게임 중독이 질병이냐 아니냐 하는 주제가 뉴스에서 흘러나오던데 그걸 보면서 조금 어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임 중독에 대한 뉴스를 보면 마치 세상이 끝난 것처럼 호들갑을 떨지만, 일 중독은 어찌 된 일인지 장려되는 분위기다. 청소년들이 게임에 빠져 학업을 놓치면 큰일 나지만, 어른들이 일에 미쳐 사는 건 괜찮다니. 이번 주말엔 원룸에서 시원한 에어컨을 틀어놓고 아무 생각 없이 포켓로그나 하고 싶다. 그동안 미뤄왔던 여유나 즐거움 같은 것들을 만끽하면서 말이다. 결국, 삶은 일과 놀이, 긴장과 이완 사이에서 균형을 찾는 과정이 아닐까. 발행일 2024년 7월 24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88호 : 🕹️게임에게로 떠나는 휴가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풀칠
여름적 사고
태생적으로 체온이 높은 탓에 남들보다 일찍 여름을 맞이하게 된다. 아마 아빠로부터 물려받은 유전자인 모양이지만, 갱년기도 한참 지난 그를 탓할 나이는 지났다. 여름이니까 당연히 더운 거지. 엄마의 말버릇을 떠올리며 이제는 ‘그러려니'하며 살아보기로 한다. 나만큼 여름을 부지런히 포착하는 건 대중교통이다. 에어컨이 본격적으로 가동되자마자 익명 커뮤니티엔 ‘지하철 냉방 민원’을 주제로 한 글이 부지런히 올라오고 있다. ‘추우니 지하철 온도를 높여라’라는 쪽과 ‘추우면 겉옷을 들고 다녀라’ 양쪽이 첨예하게 대립한다. 충청도 출신(고통마저 유머로 승화해야 한다는 강박이 있음)인 나는 ‘그럴 거면 자차 타고 출근하지 그랬슈’라고 시시덕거리다가, 당장에 나도 차가 없는 처지라는 걸 금방 자각하곤 조용히 입을 다물기로. 지하철 구석자리에 앉아 수십 개의 댓글을 넘겨보았다. 만물의 영장이라며 으스대는 인간도 고작 1-2도 되는 온도차에 사나운 짐승의 소리를 뱉는구나. 이 큰 쇳덩이를 매일 수십 km씩 움직이는 사람들이 실은 이렇게나 유치한 존재들이구나. 더위 때문에 밖으로 나서기도 힘들 지경이라며 싸울 기력은 남아있는 건가. 수신자 없는 물음을 스스로에게 던지다가 이내 지쳐버리고 말았다. 맞은편엔 겉옷을 꺼내 입는 사람과 손풍기를 정수리에 갖다 대는 사람이 나란히 앉아있었다. 과연 모두를 만족시키는 적정 온도란 없는 걸까. 스마트폰 속 사람의 온기가 전혀 느껴지지 않는, 그 날카로운 말들을 보는 동안 전차는 무심히 달렸다. 최근에 본 유튜브에서 우리가 만날 여름에 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지구가 어떠한 분기점을 넘어섰다고 했는데, 게스트로 출연한 과학자는 그 선을 두고 ‘인류 생존 한계 온도’라 불렀다. 지구는 이제 온난화 단계가 아니라 끓고 있는 상태라고. 큰일 난 건 지구가 아니라 인류라고. 우리는 이제 X됐다고. 인류 최고의 블랙코미디물 <심슨 가족>에서도 기후 위기에 대해 다룬 적이 있다. 바트 심슨이 “올해는 내 인생 최고로 더운 여름이야”라고 말하자, 아빠 호머 심슨은 웃으며 답한다. “올해는 너의 남은 인생에서 가장 시원한 여름이 될 거란다.” 인류가 하루에 만들어내는 탄소가 몇 톤이고 하는 막연한 말보다 이쪽이 훨씬 더 소름 끼친다. 당장 오늘도 끔찍할 정도인데 앞으로 더 뜨거워질 일만 남았다니. ‘인류 생존 한계 온도’라는 말을 새삼 체감하게 된다. 그늘에 땀을 식히며 ‘그래, 이게 여름이지’하는 것도, 보사노바를 들으며 더위를 기꺼이 즐길 수 있는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우리가 기억하는 여름은 곧 사라질 것이다. 몇 년 전부터 친구 마감도비와 대화를 할 때면 우리는 사라진 것들을 되짚는다. 온스테이지, 미야자키 하야오, 언니네이발관, *미각… 왜 좋은 것들은 사라지는가. 아니, 어쩌면 우리가 사라질 만한 것들을 좋아하는 건 아닐까.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지도 모를 것들을 이야기하며, 기나긴 한탄을 한다. 구질구질한 종류의 인간인 나는 몇 년째 이미 사라진 것들과 사라질 것만 같은 존재를 곱씹으며 산다. 어쩌면 이게 나의 생존방식일지도 모른다. *미각: 연신내 최고의 중식집. 지금은 사라지고 없다. 얼마 전에 본 수학강사 정승제님의 예능이 퍽 인상적이었다. 과거 좋아하던 피자(피자헛 치즈크러스트 골드 시즌1)가 단종된 사건 이후, 자신이 마음에 드는 물건을 여럿 구비해 놓는다고 한다. 리모컨 꽂이는 3개, 방석은 8개, 티셔츠는 검정색만 300개, 뭐 이런 식이다. 세상에서 좋아하는 것들이 사라질 것만 같은 거대한 공포. 단종포비아의 원인이 된 피자를 먹어본 적은 없지만, 그 공포감의 크기가 무엇인지를 알고 있다. 내일 당장 고미태의 닭콩국수를 먹을 수 없게 된다면? 내년부터 뉴진스의 새 앨범을 들을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상상은 도저히 구체화하기조차 싫어질 정도로 끔찍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