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사]

탈주의 역사
1 내 인생의 첫 번째 탈주는 유치원에 처음 간 날이었다. 선생님은 내 앞에 사과가 그려진 종이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빨간색으로 칠해볼까?” 사과를 칠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 길로 조용히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유치원 밖을 슬쩍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상어 인형과 함께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의미있다고 믿는 일(상어 인형)을 위해선 왜 하는 지 당최 모르겠는 일(사과 색칠하기)을 때려치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다음 탈주는 다행히도 학교를 모두 마치고 난 다음이었다. 물론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탈주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지만, 그땐 ‘땡땡이'라는 수습 가능한 일탈로 탈주 욕구를 적당히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나니 더 이상 땡땡이는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존버'하거나, 탈주하거나 두 가지 옵션이 전부다. 이 냉혹한 이분법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갖춰야 할 자질이겠지만, 나는 늘 어른 되기보단 탈주닌자로 남는 편을 택했다. 2 나름 크고 안정적이었던 첫 번째 회사는 모든 게 너무 지루하고 좀 우습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재밌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절이 싫으면 별 수 있나, 중이 떠나야지. 탈주. 재밌는 일을 찾아 들어간 두 번째 회사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적당히 재밌고, 업무량도 적당하고. 그런데 이번엔 그 적당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는데 그 시간을 적당히 흘려보내는 게 젊음에 대한 죄악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며 돈과 재미도 놓치지 않는 삶이 있지 않을까?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한, 치기 어린 향수병을 대차게 앓다 또다시 탈주. 두 번의 연이은 탈주는 나를 좀 취하게 했던 것 같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지만 탈주를 결심하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내 삶의 방향타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온몸의 근육을 동원해서 녹슬고 둔중한 이전까지의 삶이 다른 곳을 향하도록 돌려낼 때의 해방감은 얼마나 상쾌한가. 정해진 항로를 이탈하고도 불안이 아니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벅찬가. 저 멀리 새로운 수평선이 보이고, 심심하기 그지없는 무늬로 내 뒤를 쫓아오던 삶의 물결은 청량한 물보라가 된다. 나는 자유다! 어디로 가야 할진 모르겠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러나 방향을 트는 순간의 청량한 물보라는 사실은 금세 꺼질 물거품이다. 물거품이 꺼지고 난 자리엔 깊이를 알 수 없는 대양이 있다. 언제든 아가리를 벌려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검은 대양. 그 표면 위에서의 위태로운 항해. 위태로움을 깨닫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지만. 3
  • 풀칠
무작정 퇴사 후 1년...
퇴사할 땐 하고 싶은게 참 많았다. 매일 만화도 그리고, 내 브랜드도 런칭하고, 글도 꾸준히 써서 그걸로 먹고 사는 멋진 디지털 노마드가 되려 했었다. 1년 뒤, 하려 했던 것들을 조금씩은 다 건드려보긴 한 것 같긴 한데 결과는 영 신통찮다. 나는 과연 성장했나. 성장했다고 말하려면 이전엔 몰랐던 것, 할 수 없었던 것을 이제는 할 수 있어야 할 텐데 나는 되려 이전만 못 한 것 같은 느낌이 자주 든다. 멈춰있진 않은 것 같은데 그렇다고 멀리 온 것 같지도 않고. 출정과 퇴각을 번갈아가며 어지러운 발자국만 남긴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아직도 어떻게 살아야 할지 잘 모르겠다. 얻은 게 아주 없진 않다. 이런 저런 툴들을 조금 더 잘 만지게 되었다. 몇십 개의 SNS 게시물이 남았다. 두세 개의 프로젝트가 남았다. <풀칠>도 남았다. 하지만 이것들을 뜯어먹고 살 수 있을까. 내가 이룬 것들은 어쩌면 부지런한 직장인이 연차를 붙인 주말 서너 번으로 이룰 수 있던 게 아니었을까. 이런 생각은 언제나 나를 깊은 불안에 빠트린다. 내가 애지중지하는 것들이 남들에겐 그저 사이드 프로젝트나 부업이란 이름으로 열정을 증명하고 돈을 벌어내는 바람직한 취미활동에 불과하다는 생각. 내 생각에 이건 진지해질수록 무능해지는 게임이다. 가볍게 시도하라는 조언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걸 보면 아주 틀린 생각은 아닌 것 같다. 그러나 나는 자꾸만 진지해지고만 싶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생산성은 조금 떨어지더라도 쉽게 떠오르는 진부한 이야기는 미뤄두고 자부심을 가질 만한 이야기를 만들어 보고 싶다. 조금 더 욕심을 낸다면 완전히 새로운 이야길 만들어내고 싶기도 하다. 부끄러움 없이 나 자신을 창작자로 소개하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이것저것 하고 싶은 거 다 해보려구요”에서 “창작자가 되어 보려구요”라고 간단하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 어쩌면 1년 동안의 유일한 성과인지도 모르겠다. 돈을 많이 벌겠다고 이야기하는 건 전혀 창피하지 않은데, 내 맘에 드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는 건 왜 이렇게 머쓱하고 부끄러운지 모르겠다. 물론 나를 먹여살릴 돈을 벌어야하므로 일을 하고 있긴 하다. 내 일을 하고 싶어서 회사를 때려쳐도, 당장 돈 벌기엔 역시 남의 일을 하는 것이 가장 편리하니까. ‘시켜만 주시면 무엇이든!’을 외치며 잡식성 프리랜서로 많이 일하고 적게 벌고 있다. 남들은 퇴사하고 잘도 ‘월천’을 찍는다던데...나는 딱 굶어죽지 않을만큼만 번다. 통장잔고가 유난히 성에 안 차는 날엔 ‘나는 이렇게 월 천만원을 벌었다’는 유튜브 영상을 찾아보기도 했다. 부지런히 스스로를 포장해서 실제보다 더 대단해 보일 수만 있다면 경제적 자유에 다가갈 수 있다고 한다. 이것은 어쩌면 ‘바쁘다 바빠 현대사회’를 살아가는데 꼭 필요한 능력치인지도 모른다. 나도 몇몇 방법은 직접 찍어 먹어보기도 했다. 해시태그(#퍼스널브랜딩)도 열심히 달고, 유튜브(흑역사로 남을)도 해봤다. 해보고 나서야 알았다. 난 나를 밑천으로 쓰는 걸 그닥 재미있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하고 싶은 일을 크게 이야기하는 것보단 조용히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걸 더 선호한다는 것을. 이걸 깨달은 것도 나름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얼핏 보면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 같다. 여전히 먹고 살기 힘들다고 생각하며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른다. 눈에 확 띄는 성취도 없다. 하지만 아직 관두고 싶진 않다. 준비도 없이 1년 만에 새로운 삶을 꾸릴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게 오만이라고, 자기합리화를 시전할 여유도 약간은 남아있다. 무엇보다도 위안이 되는 것은 언제 겪어도 겪었을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것이다. 매일이 불안하긴 하지만 후회가 남진 않는다. 계속 이렇게 후회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결국엔 지난 모든 선택을 옳은 것으로 만들 수 있으리라 믿는다. 발행일 2021년 8월 12일 글 야망백수 *이 에세이는 풀칠 제 54호 : 무작정 퇴사 후 1년...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 풀칠
대체불가한 사람은 없어요
우리 셋은 반 년씩 텀을 두고 차례로 퇴사한 '전 직장 동료'다. 마지막 순서였던 나의 퇴사 이후 또 반 년이 지난 어느 날이었다. 각자 직장에서 퇴근한 뒤 옹기종기 모여 술자리를 가졌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며 겪었던 고충이나 앞으로의 커리어에 대해 실컷 떠들었다. 저마다 다른 경력을 쌓고 있었지만 모두 동의하는 결론 하나는 분명했다. 현재 직장이 자신과 꼭 맞는 건 아니지만 적어도 '구관이 명관' 소리가 나오지는 않는다는 것. 우리는 커리어 패스에 기어코 (미세하지만) 우상향곡선을 그려냈던 셈이다. "이제 와서 하는 얘기지만 그때 네가 합격했으면 내가 퇴사 못 했지. 우하하하!" A는 자신이 퇴사 소식을 알렸던 때 얘기를 꺼냈다. 당시 나는 몰래(?) 이직 면접을 보고 최종 결과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A가 선수를 쳤다. 머리를 바쁘게 굴렸다. 결과에 따라 A와 내가 동시에 퇴사할 수도 있다. 그럼 우리 팀에 남는 이는 입사한 지 3개월 된 신입 하나. 물론 대단한 일꾼도 아닌 나 하나 없다고 회사가 멈춰서진 않겠지만 적어도 신입에겐 못할 짓 아닌가. 우선 재빨리 털어놨다. 나 여기 붙으면 갈 거고, 가게 되면 당장 다음주가 마지막일 수도 있다. 당신이 상사니까 대책 마련을 부탁합니다… 주말 동안 '대체 가능성'에 골몰했다. 경우의 수는 세 가지였다. (1) 아매오 이직 성공 + A 퇴사 (2) 아매오 이직 성공 + A 잔류 (3) 아매오 이직 실패 + A 퇴사 내 입장에서는 (1)이 가장 찝찝하다. 우선 이직을 하려는 이유 자체가 '여기가 아니면 어디라도' 같은 게 아니었다. 안 그래도 남겨진 사람들에 약간의 부채의식 비슷한 걸 가질 수밖에 없었는데, 의도치 않게 더 큰 부담을 떠넘기게 되는 꼴이었다. 이 경우 회사는 팀을 확실하게 리드할 경력자(A)를 구해야 한다. 내 자리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테다. 사실 나는 신입을 뽑아도 충분히 대체될 수준이었기도 하고. (2)가 베스트다. 나는 원하던 곳으로 옮길 수 있고, A가 남아준다면 내 자리를 대체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물론 A에게 미안한 마음이 좀 들겠지만, 그가 당장 퇴사 계획을 세워놓은 것은 아닌 듯하니 아무래도 (1)보다는 부채의식이 덜했다. (3)은… 가슴이 좀 아플 뿐 찝찝함은 없다. 현재 나는 (3)의 경로를 따라 구축된 우주에 살고 있다. A를 대신해 줄 분이 왔고 그는 경험이 풍부했다. 그에 비하면 초라할 게 분명한 나를 존중해주며 적극적으로 팀을 리드해 줬다. A의 공백은 금방 채워졌고 나도 이후 6개월 동안 그럭저럭 잘 다녔다. 어쩌다 보니 이직도 하게 됐고, 여차저차 적응해서 다니고 있다. (1)과 (2)의 우주에 살고 있는 아매오, 행복하니? 거기선 나도, A도 지금과는 완전히 다른 커리어를 쌓고 있겠지? 그러고 보니 사회 속에 던져진 우리는 대체 가능성에 따라 움직이는 게 아닐까 싶다. 커리어 패스가 상하좌우 어느 곳을 향하든지 그 모양을 결정하는 요소가 대체 가능성이기 때문이다. 우린 항상 누군가를 대체하거나, 누군가에 의해 대체된다. 물론 여기서 '대체'는 수동적인 개념이 아니다. 그 판단에는 나의 지분도 들어간다. 예를 들어 A는 내가 이직에 성공했다면 퇴사를 미루려고 했다. 애초 자신의 퇴사와 후임자의 입사 사이에 짧지만 공백이 생겨도 괜찮다고 판단한 건 '아매오가 그 역할을 이 정도까지는 커버할 수 있겠지'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누가 누구를 얼만큼 대체할 수 있는가. 여기에 답을 내리는 과정에서 소속이 바뀌고 동료가 바뀌고 일이 바뀐다. 그러한 변화가 발생시키는 동력으로 이번에는 상품이, 기업이, 산업이, 사회가 변화한다. 그리고 우리는 또 그 변화에 맞춰서 변화한다. 사회는 거대한 큐브 같다. 정육면체의 모든 면이 같은 색이 되도록 끊임없이 회전하지만, 그와 같은 상태로 무한히 수렴할 뿐 영원히 도달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회전 궤도를 따라 움직이는 블럭이고. 대체 가능성을 생각하다 보면 항상 첫 알바를 그만둘 때가 떠오른다. 개인적인 사정으로 바로 다음주부터 근무에서 빠져야 했다. 일주일마다 스케줄 표를 만들어 공지하는 시스템이었기 때문에 매니저와 알바 친구들에게 미안했다. 그런데 퇴사 면담에서 매니저는 이렇게 말했다.
  • 풀칠
세 번의 퇴사와 세 권의 오답노트
4대 보험의 온기 속으로 들어가게 된 건 이번으로 벌써 네 번째다. 정기적으로 통장에 꽂히는 월급과 매일 출근하며 얻는 은근함 안정감이 생겼지만 마음 한 켠에서 왠지 모를 두려움이 솟았다. 지난 세 번의 입사, 그리고 퇴사를 경험했기 때문에. 무언가 큰 변화가 없다면 지난번처럼 관성적으로 퇴사를 반복하게 될까 무서웠다. 결심의 일환으로 출근길에 <일꾼의 말>이라는 책을 집어 들었다. 좋아하는 일을 더 잘하기 위해 고민하는 일꾼들의 이야기. 마흔 명 일꾼이 일에 대해 가진 저마다의 철학을 털어놓고, 두 명의 저자가 그것들을 잘 버무려 낸 비즈니스 에세이다. 일을 하러 가는 길에 일을 다룬 책을 읽는다는 게 조금 변태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몸이 회사로 배송되는 동안 직장인의 자아를 씌우려는 일종의 워밍업이라고 스스로에게 변명했다. <일꾼의 말>에서 가장 흥미로운 지점은 어느 누구도 일을 바라보는 시각이 동일하지 않다는 거다. '일꾼 1'은 회사는 알바생의 마음으로 다녀야 한다고 말하고 '일꾼 10'은 자신이 회사를 이기적으로 이용하겠다는 포부를 밝힌다. 디테일이 일의 전부라고 말하는 섬세한 '일꾼 28'이 있는 반면 일단 하는 게 중요하다고 주장하는 행동파 '일꾼 29'도 있다. 100명의 일꾼이 있는 곳에 100개의 직장 철학이 있는 셈이다. 직장인의 수 만큼이나 다양한 일의 방식이 있다는 것. 그러므로 절대적으로 좋은 일꾼은 없고, 상대적으로 좋은 일꾼만 있을 뿐이라는 것.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건 결국 이 두 마디가 전부인 게 아닐까 싶었다. 책의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 한동안 고민에 빠졌다. 나는 그동안 어떤 일꾼이었을까. (전지적 사장 시점에서) 제 연봉값은 거뜬히 해내는 좋은 일꾼이었을까. 아니면 월급만 축내는 눈엣가시 일꾼이었을까. 직장을 옮길 때마다 우리는 다른 종류의 일꾼이 되기도 한다. 당장 나라는 일꾼부터 이직을 할 때마다 다른 일꾼의 옷을 입었다. 취업준비의 겨를도 없이 어영부영 입사한 첫 직장은 주간 마감을 루틴으로 돌아가는 곳이었다. 그때의 일꾼 파주의 모습을 회상하면 정말로 엉망진창이었다. 학생 시절에 익힌 생존형 글쓰기는 정말 용돈벌이나 겨우 가능한 수준일 뿐이었다. 무엇보다 타인과의 대화를 통해 글감을 찾아야 하는 그 직업이, 내게는 매번 어색한 연기를 선보여야 하는 연극놀이처럼 느껴졌다. 덕업일치를 좇아 간 두 번째 직장에서는 열정이 과한 나머지 자신의 체력을 고려치 않은 채 달려드는 불나방 일꾼이었다. 몇 달 간 준비한 큰 프로젝트가 끝나면 퇴사를 하겠다고 결심했다. 한강을 배경으로 콘서트의 끝을 알리는 폭죽이 터지는 순간, 나는 내 인생도 저렇게 터졌다는 생각을 했다. 그간 내 취향으로 공들여 쌓은 탑이 무너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망한 건 내 인생이 아니라 그 회사에서의 경력이었다는 걸 깨닫는 데에만 족히 두 달이 넘는 시간을 할애해야 했다. (이 처절한 실패담은 29호 <덕업일치에 실패했다>에서 볼 수 있다.) 세 번째 직장에서 나는 '뭐 해 먹고살지'만 고민하다가 지금 당장 해 먹고 있는 일을 그르치고 마는 근심 만근의 일꾼이었다. 특히 이곳에서 실력도 재능도 아닌 끈기의 벽을 자주 느꼈다. 같은 문장을 끊임없이 읽고 고치고 다듬고 또 이리저리 뒤엎어 가며 일에 몰입하는 동료들이, 내 눈에는 성에 차지 않는 도기를 내던져 깨뜨려 버리는 (문장 깎는) 장인처럼 보였다. 시간에 있어 혹독할 정도로 효율을 따지는 나는 책을 만드는 일이 끈기라는 천재성이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라 느껴졌다. 네 번째 직장에 입사하는 날짜가 다가오자 불안감이 증폭됐다. 정상적인 일꾼이라면 이쯤에서 퇴사 버튼을 봉인해야 했으니까. 더군다나 세 번의 퇴사로 회사나 환경 탓이 아니라 나에게 문제가 있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런 이유로, 지나온 세 번의 퇴사 과정을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한 거다. 직장인의 탈을 쓴 몇 년 동안 자잘한 업무와 밀려드는 프로젝트를 간신히 해치우면서 나는 크고 작은 성공과 실패를 맛봤다. 그러는 동안 내가 어떤 것을 잘하고 또 못하는지를 잘 알게 됐다. 일꾼 파주뿐만이 아니라 어쩌면 '나'라는 인간에 대해서도. 세월의 맛을 내는 국밥집이 매일 씨육수를 섞어내듯이, 비틀거리면서도 꾸역꾸역 출근하던 일꾼의 기질이 알게 모르게 축적돼 지금의 N년차 에디터 파주가 된 거다. 어쩌면 지난 직장에서의 퇴사는 세 번의 실패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렇다면 나 자체가 인간 오답노트인 셈일 테고. 위안으로 삼을 수 있는 건 앞으로 정답을 단번에 찾진 못하더라도, 적어도 지난번과 똑같은 오답을 적어내는 일은 없을 거라는 거다. 이제 습관처럼 내뱉던 '뭐 해 먹고 살지'를 더이상 입에 담지 않는다. 대신 그 빈자리를 다른 고민으로 채웠다. 네 번째 직장에서 나는 어떤 일꾼이 될 것인가. 그보다 어떤 일꾼이 되고 싶은가에 대해. 쉬이 답이 나오지 않지만, 장고 끝에 꼭 악수를 두지는 않을 거라는 예감이 든다.
  • 풀칠
덕업일치에 실패했다
엄마의 오랜 말버릇 중 하나는 '너 좋은 대로만 살 수는 없다’라는 말이다. 이것저것 간만 보다가 끈기 없이 그만두는 아들내미가 아무래도 위태로웠는지, 그 배려심 깊은 이인숙 여사는 내가 무언가를 그만둔다고 말할 때마다 핀잔을 주었다. 나는 엄마가 뭘 몰라서 그런다며 항변했다. 아웅다웅하던 우리의 대화는 늘 '저 좋은 거만 하려 한다’는 이인숙 여사의 수미쌍관씩 일갈으로 마무리됐다. 나보다 곱절의 세월을 더 살아온 그녀는 이미 알고 있었던 거다. 사회에 발을 들이고 나면 무엇 하나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하기란 불가능하다는걸. 어린 시절에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되려 제대로 심통이 나 공부하라는 잔소리를 들으면 냅다 연필을 내던지듯이 청개구리 기질을 십분 발휘해 늘 좋아하는 것만 하려 했다. 그렇게 피아노도 쬐끔, 글쓰기도 쬐끔. 문제는 어느 것 하나 끈덕지게 좋아하질 못한다는 거였다. (심지어 드럼은 귀가 아프다는 핑계로 고작 두 달 만에 그만두었다.) 그렇게 기나긴 허송세월을 보낸 뒤 나는 이도 저도 아닌, 그저 애매하게 좋아하는 것만 많은 어설픈 어른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시간은 내 편이 아니었다. 이내 나이에 등을 떠밀려 사회에 진출(당)하고 말았다. 어영부영 사회생활을 시작한 뒤 이인숙 여사의 말이 옳았음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회사라는 조직 안에서 어느 것 하나 마음 내키는 대로 할 수는 없었다. 빌어먹을 출근길과 그보다 괴로운 야근을 반복하며 어떤 날은 차라리 지금 타고 있는 버스에 작은 사고가 나서 부득이한 이유로 출근하지 못했으면, 하는 데까지 생각이 미쳤다. 회사의 업무라는 게 마치 좋아하는 것 외의 일만 딱 떼어놓은 여집합을 해내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다.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는다면 조금 달라질까. 그렇게 나는 덕업일치를 좇아 도망쳤다. 돈 깨나 쓰는 게이머들은 자기가 넥슨 본사 기둥을 하나씩 세웠다며 허풍을 떨곤 하는데, 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취미로 이 회사에 쓴 돈을 헤아리면 기둥 두어 개는 너끈히 세웠을 거라며 내심 자부했다. 두 번의 면접을 거쳐 쟁취한 덕업일치를 동네방네 자랑했다. 한 선배는 '지금보다 월급이 더 낮아질 수가 있어?'라며 황당해 했지만, 해맑은 웃음으로 답을 대신했다. 덕업일치를 이룬 그때의 나는 쌍팔년도 시절 스포츠스타라도 된 거처럼 헝그리 정신으로 무장한 상태였으니까. 좋아하는 일이라면 대가리를 처박은 채로 뭐든 해낼 수 있을 거라고 믿었다. 멍청하게. 덕업일치의 행복은 얼마 지나지 않아 풍비박산이 났다. 새로운 회사에 출근하자마자 한강공원에서 5m 높이의 사다리에 안정장비 하나 없이 올라야 했고(심지어 사대보험도 가입하지 않았을 때다), 택시 할증으로부터 자유로운 새벽 4시 이후의 퇴근도 잦았다. 또 어떤 날은 출근 30시간 만에 퇴근하는 진기록을 세웠다. 끝을 모르는 업무로 몸도 마음도 망가졌다. 하지만 무엇보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건 좋아하는 일을 만드는 회사에서 정작 내가 좋아하는 일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는 거였다. 기세등등했던 덕업일치는 7개월 만에 싱겁게 끝이 났다. 즐겨 듣던 노래가 트라우마를 유발하는 트리거로 전락했고, 좋아하던 것들을 더이상 좋아할 수 없게 되어버렸다. 그제서야 '너 좋은 대로만 하고 살 수 없다'라는 이인숙 여사의 말버릇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덕업일치라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는 걸 바보 아들에게 에둘러 말한 거라는 사실을. 그렇게 개박살이 나고 다시 한번 도망쳤다. 새로운 곳에서 조금씩 상처를 회복할 무렵 좋아하는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이들과 만날 기회가 생겼다. '일은 어때요?'라는 안부에 나는 '재미있지만 힘들어요'라며 별생각 없이 너스레를 떨었다. 분명 1년 전 동일한 질문에 나는 '힘들지만 재미있어요'로 대답했던 것 같은데. 고작 어순만 바뀌었는데도 그 두 가지 말에는 엄청난 간극이 있었다. 힘들지만 재미있다는 말이 아직 충분히 버틸만하다는 뜻이라면, 그 반대는 '재미와 힘든 노동을 저울질 하고 있지만 언제든 내던져도 이상하지 않을 위기'라는 의미일까. 그날 맞은 편에 앉아있던 덕업일치의 현신은 새롭게 맡게 된 업무를 두고 '재미있지만 힘들다'고 말했다. 당시에는 생각지 못했지만 회사일이라는 게 모두 그렇듯, (좋아하는 것과 관련된 일을 하고 있지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의 업무도 덕업일치와 크나큰 간극이 있지 않았을까. 좋아하는 일을 하기 위해 힘든 것을 꾹 참고 이겨내는 애정과 노력, 그 정도의 정성이 내게는 부족했던 걸까. 최근 코딱지만 한 연봉을 조금 인상하여 낯선 업계로 이직할 기회를 얻었다(그래봐야 조금 큰 코딱지지만). 충분히 쉬었으니 망설일 것도 없었지만 괜한 거북함이 발목을 잡았다. 내가 좋아하는 일로부터 너무 멀리 가는 것처럼 느껴져서다. 인상된 금액을 무엇에 소비할지 빈 종이에 몇 가지를 끄적이곤 이내 결론을 내렸다. 이인숙 여사의 표현을 빌리면 어차피 '내가 좋아하는 것'만 할 게 뻔했기 때문이다. 새 회사에서 평소에 거들떠보지도 않던 외신을 뒤적이고 잘 알지도 못하는 내용을 끄적이는 게 아무래도 못할 일 같았다. 미련 없이 입사를 반려한다는 메일을 전송했다. 아무래도 나는 요령부득 구제불능의 인간인 걸까. 이미 덕업일치에 실패했으면서, 아직까지도 저 좋은 것만 하려는 미성숙의 애새끼맨인 걸까. 메일을 보내고 나자 이인숙 여사님의 착신을 알리는 벨소리가 울렸다. 한 줌도 안 되는 스마트폰이 왜이리도 무거운지. 엄마, 미안해요. 저는 글렀나 봐요.
  • 풀칠
오늘 퇴사가 결정됐다. 어쩌면 어제
퇴사한다. 평생 직장 개념이 사라지는 시대다, 라는 말조차 식상하기 그지 없는 시대인데다 놓는답시고 놓는 한줌이 대단한 기회비용이라 하기에도 민망한 수준이다 보니 사실 그렇게 유난 떨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한 시절이 저무는 순간을 지켜보는 마음은 어쩔 수 없이 조금 감성적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서 보낸 시간이 어떤 모양과 성질의 경험으로 쌓일지 지금 당장 알 길은 없으나, 그것이 내게 남긴 무언가를 잔잔하면서도 길게 곱씹어 보게 되는 것이다. 마치 노을을 보며 하루의 여운을 느끼듯이. 물론 버티다 버티다 못 버텨 떨어져 나가는 상황이 아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일지도 모른다. 원래 결정을 내리는 데 오래 걸리는 타입은 아니다. 이번에도 그랬다. 금요일에 풀칠 멤버들과 '계속하고 싶은 일'과 '계속 다닐 만한 회사'에 대한 이야기 나눴고 주말을 혼자 보내며 고민한 뒤 월요일 출근하는 지하철에서 차우진 님의 글을 읽으며 퇴사하기로 마음 먹었다. 유료 뉴스레터이기 때문에 링크를 걸거나 전문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인상 깊었던 문장 몇 개를 써본다. “그런데 조금 관점을 다르게 하면, 그러니까 저를 ‘글 쓰는 사람’이 아니라 ‘기획하는 사람’이나 ‘글을 토대로 다른 영역으로 확장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하면 조금 애매해져요. 그래서 키워드가 ‘성장’과 ‘불안’인 것 같아요.” “제게 ‘지속적인 성장’이란 다르게 느끼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제게 ‘정체된 느낌’은 곧 식상한 관점과 표현이 나올 때에요.” “글이란 생각과 관점을 반영한다는 점에서 곧 정체성의 문제고, 그건 내 위치와도 직결되는 문제라고 보는데요. 그러면 내가 하는 일은 계속해서 ‘나는 누구일까?’라는 질문을 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해요. 그 정의가 매번 달라질 수 있다는 것, 어쩌면 스스로 그걸 매우 중요하게 여긴다는 점 때문에 이 불안감은 나의 정체성과 동일한 문제이기도 하고요.” - 차우진, 숨참 뉴스레터, 시간과 공간의 방에서 다음은 일사천리였다. 점심시간, 동료에게 넌지시 이야기를 한 뒤 상사에게도 퇴사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친구들에게도 소식을 전했다. 물론 이 레터를 쓰고 있는 지금도 가족들은 모른다. 다들 궁금해하는 건 나의 넥스트였다. 이 시국에 믿는 구석이 있으니 저리 당당하게 퇴사를 결정한 거겠지. 하지만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없는데요… 최대한 공백 없이 이직하는 걸 목표로 이제 열심히 지원해봐야죠… 술자리는 내 뜻대로 시작되지 않고 제멋대로 흘러가다 결국은 결핍을 남기고 끝난다. - 권여선, 『안녕, 주정뱅이』 몇 번이나 인용했고 그만큼 많이 읽었으며 더 자주 떠올렸던 문장이다. 가장 아끼는 문장이기도 하다. 왜 아끼냐고? 내가 사람 다음으로 좋아하는 두 가지가 술과 글이라서. 그런 의미에서 이 문장은 완벽하게 아름답다. 얼핏 보면 술자리에 대해 쓴 글이지만 실은 그것이 인생의 비유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문장을 주로 편지에 쓰곤 했다. 수신인은 대개 삶의 한 시절을 마무리하는 사람들이었다. 졸업하는 후배, 이별한 친구, 퇴사하는 동료… 디테일은 달랐지만 담긴 의미는 비슷했다. 치열하게 ‘다음’을 고민하되, 걱정에 잠기지 말 것. 때로 예상치 못한 불운이 불행을 불러오더라도 늘 자신의 마음을 소중하게 가꿀 것. 보면 알겠지만 사실 이건 나 자신을 향한 메시지였다. 시절과 시절이 교차하는 곳에 서 있는 누구나 불안에 떨 수밖에 없다.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기 때문이다. 내게도 잠 못 이루는 밤이 숱하게 있었다. 매일 밤 마주해야 했던 불 꺼진 방은 침대만큼 좁았고 우주만큼 고독했다. 매일 좁아졌고 그만큼 매일 고독해졌다. 계획을 세우는 속도보다 그것이 무너지는 속도가 언제나 더 빨랐다. 20대의 미숙한 경험과 통찰에서 비롯되는 계획은 거의 대부분 이뤄질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완벽하게 쓰레기라는 문장을 어디선가 읽었는데, 내 생각엔 이 문장 또한 미숙한 통찰이다. 왜냐면 우리 엄마만 하더라도 쉰이 될 때까지 이뤄지지 않을 계획 세우기를 무수히 반복했다고 하셨으니까. 여러 회사에 지원을 했고 몇 군데에서 인터뷰를 진행했다. 그 중 한 곳과 이야기가 잘 되어 입사가 결정됐다. 딱히 쉬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바로 출근할 수 있도록 퇴사와 입사 일자를 조정했는데, 남은 연차를 태웠더니 꽤 긴 연휴가 생겼다. 뭐할지는 모르겠다. 여행을 가볼까? 거리두기 2단계구나. 친구 만나러 전국투어? 아…코로나… 업무용 툴이나 좀 공부해볼까. 그런 생각을 하다 보니 마지막 휴가와 전역을 기다리던 말년 병장 때 기억이 조금 떠오르기도 했다. 미래에 대한 기대감과 과거를 털었다는 시원함, 남은 사람들에 대한 고마움이 교차하는 복잡한 심정이었다. 떠나는 사람의 심정은 언제나 이렇구나. 아무도 눈치 못 챘겠지만 나는 조금씩 이별을 준비했다. 쌓아 뒀던 벽을 허물고, 그었던 선을 지웠다. 이 관계를 없었던 걸로 하려고? 아니, 처음부터 제대로 시작하고 싶어서. 과연 직장 동료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노. 그럼 (전) 직장 동료는? 여기에 답하려면 나름 정교한 셀프 검증 시스템을 거쳐야 했다. 이들 개개인은 나와 성향이 맞나? 나는 이들을 어떻게 느끼나? 반대로, 내가 그들에게 친구가 될 만한 사람으로 비쳤을까? 그제서야 무심했던 말과 행동들이 조금 후회됐다. 음, 아니. 솔직히 말해 후회는 안 했던 것 같다. 굳이 그럴 것까진 없었는데 오바했네, 뭐 이 정도? 아직 어리구나. 여전히 내 기준만 고집하네. 아이고, 못난 자슥. 뭐 이런 느낌.
  • 풀칠
퇴사와 이직
행복한 직장은 서로 닮았지만 불행한 직장은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 소설 ‘안나 카레니나’의 첫 문장을 조금 비틀어봤다. 아마 많은 직장인들이 퇴사를 하고 이직을 하는 이유를 가장 잘 보여주는 문장이 아닐까 싶어서. 이제 겨우 3년차에 접어든 주제에 모든 경우를 다 알 수는 없지만 친구들, 일로 만난 사람들, 들려오는 얘기들. 모두가 조금씩은 다른 고민을 안고 오늘의 직장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내 경우에는 자괴감이라는 요인이 가장 컸다. 더 이상 성장하지 않는 기업에서 일한다는 자괴감. 이전 직장은 사기업치고는 워라밸이 나쁘지 않았다. 막내였지만 인간관계로 고민한 적도 없고 처우도 지역과 업종을 고려하면 박하다고 할 만한 수준은 아니었다. 기간의 정함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일에 대한 만족을 내려놓고 적당히 다니기에는 괜찮은 직장이었다. 미래에 대한 고민이라는 변수를 내려놓는다면 말이다. 나는 스타트업에서 일했다. 좀 더 정확을 기한다면 소규모 사업장에 해당하겠지만. 그래도 대표는 어디선가 투자처를 찾아왔고 스타트업이라면 겪기 마련이라는 보릿고개를 겪지 않아도 됐다. 월급이 밀린 적도 없었다. 문제는 모멘텀도 없었다는 거다. 회사를 다닌 지 일 년 정도 됐을까. 수익모델을 찾지 못해 이런저런 궁여지책을 내놓는 회의 가운데서 앞으로도 성장은 없겠다는 불길한 확신이 스쳐지나갔다. 그래서 이직은 나에게 마치 못다한 숙제처럼 다가왔다. 이직을 통해 직업을 바꾸거나 직장을 옮기는 친구들을 보고 난 뒤에는 그런 마음이 더 커졌다. 대개의 경우 그들은 더 나은 처우와 목표를 향해 걸어가는 듯 보였다. 부러웠다. 그럼에도 ‘해야지, 해야지’ 하면서도 하지 못한 건 현실에 안주하고 싶은 마음이 없지 않아서였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이직을 준비하는 건 많은 인내심을 요하는 일이었다. 무엇보다 체력적으로 지쳤다. 퇴근하고 나서 곧바로 집 근처 카페에 들어가 경력 기술서와 지원서를 썼지만 횡설수설하는 경우가 많았다. 꼭 내겠노라 마음먹고 있던 기업도 기한에 다다라서야 겨우 원서를 제출하곤 했다. 그때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제대로 이직을 하려면 결국 퇴사를 하고 온전히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나봐, 라고 생각도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직장에 대한 자괴감은 이직 시장에 대한 불안감으로 이어졌다. 쉽게 말해서 겁이 났다. 내가 여기를 나와서 다른 곳에 갈 수 있을까? 이런 물경력을 어디에 내밀지? 같은 생각을 늘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이직에 대한 갈망(?)과 현 상황에 대한 자괴감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악순환하면서 불편한 허리띠처럼 늘 나를 졸라맸던 셈이다. 그러던 중 지난 6월 갑작스럽게 이직을 하게 됐다. 내가 달라진 것도 회사가 달라진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운이 좋았다, 라고 써도 무방할 것 같다. 사람인을 통해 지원한 이력서가 운 좋게 면접으로 이어졌고 당장 내일 모레 면접을 보러오라는 전화에 부랴부랴 연차를 쓰고 서울로 올라왔다. 이직 시도가 면접으로 이어진 건 이번이 처음이라 양복까지 갖춰 입고 덜덜 떨면서 신입과 별반 다르지 않은 채로 면접을 치뤘다. 다음 날 언제 나올 수 있겠느냐는 전화를 받았다. 만일 이번 이직에 만족하느냐고 묻는다면 아직은 머뭇거리게 된다. 급하게 내린 결정이었지만 다행스럽게도 더 괜찮은 처우를 보장받을 수 있었고 하고 싶은 일에 조금 더 가까워지게 됐다.(이건 다음 번 글에서 좀 더 풀어쓰고 싶다.) 그렇다고 완벽하게 만족한 건 아니지만. 이제 갓 한 달이 지났으니 새 직장에 대한 평가를 내리는 건 조금 불공평한 처사 같다. 일단 탈출은 했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하자. 이직에는 쟁취형 이직과 탈주형 이직, 이 두 가지가 있다는데. 애매하게도 나는 그 어딘가로 향하고 말았고 오늘도 헤매고 있다. 그럼에도 이직의 경험으로 얻은 게 있다면 내가 어떤 조직에 있었던 간에 안락했을지도 모를 그곳에서 엉덩이를 털고 일어날 힘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저마다의 불행이 더 나은 곳으로 스스로를 밀어낼 수 있는 힘이 될 수 있기를. 이 글을 읽는 당신을 응원하고 싶다. 발행일 2020년 7월 29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3호 : 퇴사와 이직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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