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주의 역사
1 내 인생의 첫 번째 탈주는 유치원에 처음 간 날이었다. 선생님은 내 앞에 사과가 그려진 종이를 내려놓고는 말했다. “빨간색으로 칠해볼까?” 사과를 칠하다보니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 여기서 뭐 하고 있는 거지?” 나는 그 길로 조용히 크레파스를 내려놓고, 유치원 밖을 슬쩍 빠져나가 집으로 돌아갔다. 집에는 상어 인형과 함께하는 흥미진진한 모험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 의미있다고 믿는 일(상어 인형)을 위해선 왜 하는 지 당최 모르겠는 일(사과 색칠하기)을 때려치워야 한다는 교훈을 얻은 최초의 사건이었다. 다음 탈주는 다행히도 학교를 모두 마치고 난 다음이었다. 물론 학교 다니는 동안에도 탈주하고 싶었던 적이 많았지만, 그땐 ‘땡땡이'라는 수습 가능한 일탈로 탈주 욕구를 적당히 관리할 수 있었다. 그러나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을 잡고 나니 더 이상 땡땡이는 가능한 옵션이 아니었다. ‘존버'하거나, 탈주하거나 두 가지 옵션이 전부다. 이 냉혹한 이분법을 견디는 것이야말로 어른이 갖춰야 할 자질이겠지만, 나는 늘 어른 되기보단 탈주닌자로 남는 편을 택했다. 2 나름 크고 안정적이었던 첫 번째 회사는 모든 게 너무 지루하고 좀 우습게 돌아가는 것 같았다. 오만한 생각이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어야 한다면 이왕이면 재밌는 일을 해야겠다 싶었다. 절이 싫으면 별 수 있나, 중이 떠나야지. 탈주. 재밌는 일을 찾아 들어간 두 번째 회사도 그럭저럭 괜찮은 곳이었다. 적당히 재밌고, 업무량도 적당하고. 그런데 이번엔 그 적당함을 참을 수 없었다. 하루 종일 회사에 있는데 그 시간을 적당히 흘려보내는 게 젊음에 대한 죄악처럼 느껴졌다. 어딘가에 다른 삶이 있지 않을까? 매 순간 살아있음을 느끼며 돈과 재미도 놓치지 않는 삶이 있지 않을까?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한, 치기 어린 향수병을 대차게 앓다 또다시 탈주. 두 번의 연이은 탈주는 나를 좀 취하게 했던 것 같다. 도망친 곳에 천국은 없다지만 탈주를 결심하는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카타르시스가 있다. 내 삶의 방향타를 두 손으로 꽉 쥐고, 온몸의 근육을 동원해서 녹슬고 둔중한 이전까지의 삶이 다른 곳을 향하도록 돌려낼 때의 해방감은 얼마나 상쾌한가. 정해진 항로를 이탈하고도 불안이 아니라 자유를 느낄 수 있는 힘이 스스로에게 있다는 걸 느끼는 순간은 얼마나 벅찬가. 저 멀리 새로운 수평선이 보이고, 심심하기 그지없는 무늬로 내 뒤를 쫓아오던 삶의 물결은 청량한 물보라가 된다. 나는 자유다! 어디로 가야 할진 모르겠지만, 어디로든 갈 수 있다! 그러나 방향을 트는 순간의 청량한 물보라는 사실은 금세 꺼질 물거품이다. 물거품이 꺼지고 난 자리엔 깊이를 알 수 없는 대양이 있다. 언제든 아가리를 벌려 모든 것을 집어삼킬 수 있는 검은 대양. 그 표면 위에서의 위태로운 항해. 위태로움을 깨닫게 된 건 한참 뒤의 일이지만.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