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하철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난다면 용서해 주세요
풀칠 주제가 ‘비상’으로 정해진 뒤 무슨 얘기를 써볼까 나름 머리를 굴렸던 나를 반성한다. 사실 모든 비상사태가 그렇듯 닥치기 전까지는 모두가 여유로우며 저 나름의 계획을 가지고 있기 마련이다. 더욱이 비상사태는 당해봐야 그 의미를 알 수 있는 주제였던 것이다. 마감도비에게 가장 어울리는 비상은 비상(非想, 상념을 끊고 득도의 경지에 들어감.)도 비상(飛翔, 공중을 날아다님.)도 아닌 비상(非常, 큰일 남.)이었던 것이다. 도가도 비상도는 개뿔. 제길 마감이 두 시간도 안 남았다. 진짜 비상이다! 매일 지면 마감을 해야 한다는 일의 특성 탓이기도 하겠지만 비상사태에 자주 부닥치는 편이다. 특히 마감시간이 다가올수록 더욱 그렇다. 여유로운 마감은 없고 마감 전 컨디션은 늘 좋지 않다. 아침에는 전날 마신 술로 속이 안 좋고, 낮에는 사람을 만나 얘기를 하고 행사에 참석해 어려운 단어를 주워듣느라 모든 기운이 소진된 상태에서 노트북 화면 앞에 앉아야 하니 말이다. 머리는 지끈거리고 눈앞은 캄캄하다. 커피도 아무 소용이 없다. 때로는 마감이라는 녀석이 체할 듯이 백주 대낮에 찾아올 때도 있다. 아니 오후 일정은 이미 정해져 있고 점심엔 미팅을 하기로 했는데 지금 마감을 하라고? 이게 무슨 개떡 같은 지시인가 싶지만 아 맞다! 나 마감도비지, 하며 노트북을 펼친다.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펼쳐야 하는 불상사가 벌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사실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펼치는 건 이제 익숙한 일이 되었다. 좁은 좌석에 앉아 자판을 두드리고 있는 동안 분명 옆 사람들에게 민폐일 거라는 게 유일한 걸림돌이다. 더구나 한 겨울에는 두꺼운 롱패딩을 입고 있는 탓에 사실상 옆구리를 찌르는 것과 비슷한 실례가 아닐까 생각한다. 다행히 아직까지는 신기하다는 듯 같이 한 화면을 바라보는 아저씨들 외에 큰 피드백을 받은 적 없지만 언제 봉변을 당해도 할 말은 없다. 이 자리를 빌어 사과를 하고 싶을 뿐이다. 지하철 민폐남의 경험을 교훈 삼아 이따금 택시를 잡기도 하지만 역시나 가는 날이 장날이다. 운전기사님의 (정말 옆 차와 싸울 것만 같은) 파이팅 넘치는 운전 스타일 덕분에 여유롭게 노트북 화면을 쳐다보기는커녕 미식거리는 속과 욱신거리는 관자놀이를 부여잡아야 할 때도 있었다. 물론 그럼에도 마감은 어찌저찌 끝내긴 했지만 말이다. 우욱, 기사님 조금만 천천히 가주세요. 네네, 속이 안 좋네요. 아니요 술 마신 건 아니고요. 가끔 친구들이나 가족들은 내가 왜 이렇게 비상사태에 자주 처하는지 궁금해 하곤 한다. 그건 회사의 업무 분장이 엉망진창인 탓이 가장 크고, 내 머리와 손이 다 같이 합심해서 느려 터진 영향도 있겠지만 아마 비상사태가 닥치기 전까지는 제대로 일을 시작하지 못하는 내 성격도 한 몫 할 것이다. 참고로 내 MBTI의 끝자리는 P다. 성격이 운명이라고 누가 그랬던가. 시간 여유가 있을 땐 기획이다 뭐다 하며 머리를 굴리는 척하지만 결국 위기에 당면해야 일을 끝내게 되는 내가 잘못이다. 내 잘못이오. 사실 이 글을 시작할 때만 해도 일 앞에서 초연해야 하니 흘려보내야 하니 따위의 교훈을 읊으려 했지만 역시 그런 건 내게 어울리지도 않고 애초에 쓸 수도 없었던 것이다. 비상사태를 극복하는 건 내가 하는 게 아니라 비상사태라는 말만이 진실하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나는 비상사태 속에 살고 있다. 모든 일을 계획대로 착실히 해치우는 또 다른 나는 아마 평행세계에서 잘 살고 있을 것이다. 헥헥, 마감이다. 마감. 결국 해내고야 마는 나는 직장인이다. 발행일 2024년 2월 21일 글 마감도비 *이 에세이는 풀칠 제 174호 : 💻 지하철에서 노트북을 두드리는 사람을 만난다면 용서해 주세요에 실렸습니다. 위 카드를 누르시면 다른 필진의 코멘트도 읽어보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