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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參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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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선을 하려고 하면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이 깊으면 깊을수록 이 참선을 아주 깊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자기가 자기 자신을 볼 줄 모르고 다른 사람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보려고 하는 그런 버릇이 있거든요. 어떤 일을 할 때 남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남들 생각이 더 중요하게 여겼거든요. 또, 과거에는 어떻게 했는데 하면서 지금 현재 일을 하고 있는 거죠. 그러면, 또한 현재 내가 주인이 되지 못하고 과거가 현재의 주인이 돼 버린 경우 구조, 또 미래에 대한 걱정을 또 하면서 일을 대하게 된 경우도 많거든요. 그러면, 미래가 나의 주인이 돼 버리는 거죠. 그러니까 다른 사람이 또 과거가 미래가 현재에 나의 주인이 되면은, 아무것도 할 수 없어요. 현재 내가 나의 주인이 돼야 어떤 것을 잘 살피고 정말 귀하게 살 수 있는 그런 힘이 생겨나는 겁니다. 그러려고 한다면 먼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을 아주 깊이 해야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 세 가지 이야기를 할까 합니다. 먼저,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 있습니다. 기고, 기하구나, 일체 모든 중생이 여래와 같은 지혜와 덕상이 끝말 분별망상으로 인해서 알지 못하고 있구나.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 깨닫고 난 뒤에 세상을 보니까 모든 존재들이 나와 똑같이 완전한 지혜와 자비를 갖춘, 그런 깨달은 사람들이라는 거죠.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자기가 자기를 바라보지 못하고 남들만 쳐다보고 있구나, 예, 번뇌와 망상을 보물로 여기고 있다는 거죠. 그래서,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은 그때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또, 요지에, 그림이 달마대사거든요. 중국 선종의 초조, 달마대사, 본래 인도의 향지국이라고 하는 나라의 왕자였어요. 석가모니 부처님으로부터 쭉 이어지고 이어지고 이어진, 그런 정통을 이은 분이 바로 달마대사거든요. 이분이 중국으로 건너옵니다. 그래서 중국의 숭산에, 소림굴에 9년 동안 머무셨는데요, 그때 이제 제자들이, 수 없는 제자들이 찾아옵니다. 그래서 법문 한 내용 중에 그걸 글로 표현을 해 놓은 것이 있는데, 이 사회의라고 하는 책에 보면 이런 대목이 있어요.
중생과 성인은 동일한 진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나나,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똑같은 참 성품을 지니고 있다. 그런데 객진 번뇌로 말미암아서, 이 중생들은 그걸 알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벽관을 통해서 벽을 쳐다보고 참선을 하면 바로, 그 참 진성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야기해보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2600년 전에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나나 똑같은 성품과 똑같은 크기라는 거죠. 다른 성품이 아니라, 그러니까 여기서 수행하고 있는 스님이나, 또 이걸 방청하고 있는 여러분들이나, 세상의 모든 사람들, 나와 친한 사람들이나, 또 내가 모르는 사람들까지도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의 그 참 마음은 똑같다,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1,4,5백 년 전에 그 서상 대사라는 분이 계셨는데요, 이분은 5백 년 전에 태어나서 85세까지 사셨는데, 그분이 이제 13살 때 유학 공부를 해서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이라고 한 곳에서 공부를 하셨어요. 그러고 난 뒤에 그건 이제 세상 공부였죠. 그리고 18살에 지리산에 가서 불교 공부를 3년 동안 합니다. 그러고 난 뒤에 "나는 그동안 밖에서는 이렇게 좋은 시험을 합격을 해서 높은 지위에 오르는 출세를 하겠다고 생각을 했는데, 이게 전부가 아니구나. 삶이라고 하는 것은, 이 귀하고 귀한 이 삶은 남과 비교 속에서 내가 높은 지위에 올라 많은 것을 누리고 그런 것이 아니라 마음을 깨우치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라." 그래서 21살에 출가를 해요.
그래서 참선을 합니다. 10년 동안 참선을 하고 깨달음을 얻어요. 그러고 난 뒤에 이제 다시 그 불교에 관련된, 또 선사들의 관련된 그런 책들을 베끼면서 이제 써 놓은 책이 있습니다. '선가귀감'이라고 한 책이 있는데요, 거기에는 이렇게 기록돼 있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원래부터 아주 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럽다, 이것은 잠깐도 멸한 적이 없고 잠깐도 생각한 적이 없다라고 죽음이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다,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의 본래 마음, 그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그 마음, 달마대사의 성인과 중생과 구별이 없는 그 참 성품, 그 마음을 서산대사는 더 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럽다, 이렇게 평했습니다. 다들 깨달음을 읽은 분들은 그렇게 온, 마음을 표현했습니다. 또, 달마대사로부터 6번째, 에, 굉 제 스승인 육조 혜능 대사라는 분이 있습니다. 그분은,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 깨달음의 마음을, 우리의 본심을 무념, 무상, 무주, 무념이라고 하는 것은요, 번뇌와 망상이 없이 아주 고요하고, 고요하고, 평화롭고, 평화롭다, 이렇게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실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거든요. 하루에 뇌 과학자들은, 이제 요즘엔 제 뇌파 측정을 하니까, 이제 하루에 일반적인 사람이 몇 가지 생각을 하는지 하는 것을, 잘, 그 데이터가 나왔어요. 연구결과가 나왔는데요, 일반적인 사람이 1 47,000가지 생각을 한대요. 하게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죠.
우리 한국의 옛날 어른들은 오만가지 생각에 라는 표현을 했습니다. 그럼 하루에 일반적인 사람이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하는 거죠. 이 눈으로, 어떤 대상을 보고 모양이나 색깔을 보고, 생각을 하는 거죠. 생각을 하는데 어떤 생각을 하냐면, 비교하는 생각을 합니다. 단순하게 보는 것 뿐만이 아니라 비교하게 되는 거죠. 이것과 이것을 비교하기도 하고, 과거에 봤던 것과 이것을 비교하기도 하고, 또 이것을 나중을 생각하면서 각가지 상상을 하게 되죠. 단순히 한 물건을 보는 데도 굉장히 많은 생각을 합니다. 또 귀로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 소리를 비교를 합니다. 다른 소리와 비교하고, 과거의 생각, 그 소리와 비교하기도 하고, 이 소리를 가지고 나중에 추측, 상상을 하기도 하죠.
코도 어떤 냄새를 맡았을 때, 지금 단 냄새와 비교하기도 하지만, 과거의 생각과 비교하기도 하고, 또 미래에 대한 추측, 상상을 합니다. 또 이 입으로도 마찬가지죠. 어떤 사과를 먹었다, 음, 이 사과의 맛을 현재에, 내 입맛과 비교하기도 하지만, 또 과거에 먹었던 사과의 맛과 비교하기도 하고, 또, 이 사과를 모르면서 나중에 추측, 상상도 하게 된 거죠. 또 이 피부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떤 느낌을 느끼면서 그 느낌을, 지금, 덥다, 시원하다, 또, 과거에는 어떤 것을 통해서 시원하기도 했는데, 따뜻하기도 했는데, 각가지 생각을 일으키는 것, 이런 것들을 이제 분별 의식이라 합니다. 이것과 이것을 분별하는 거죠. 깨끗하다, 더럽다, 맛있다, 맛없다, 크다, 작다, 아름답다, 추하다, 그런 분별을 하게 되는 거죠. 이 분별을 하게 되면 이제 자연스럽게 차별을 하게 됩니다.
그래서 차별을 하게 되면, 깨끗한 거, 아름다운 거, 맛있는 거, 큰 거를 찾게 된 거죠. 그래서 욕심을 부리게 됩니다. 그 욕심을 부리게 되면 각가지 그 안에서 생각이 일어나게 되고, 경쟁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죠. 그 바로 그 마음이, 현재 욕심 부리고 있는 마음이 내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이건 사실 가짜의 마음이거든요. 이런 마음이 일어나기 이전에 마음이 나의 본래 신이다.
그러니까 어떤 생각을 일으키기 바로 직전, 어떤 말을 듣기 바로 이전, 바로 그 마음은 차별하는 마음이, 분별하는 마음, 욕심이 있는 마음이 아니거든요. 바로 그 마음이 바로 아주 고요한 마음이고, 번뇌가 없이 아주 평화로운 마음이 겁니다. 그게 나의 본래 마음이라고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그것을 육조 혜능 대사는 그걸 무염이라고 했습니다. 그 마음이 바로 내 마음입니다. 또 무심이라고 있어요. 우리는 어떤 것을 보고는 바로 과거의 경험, 지식, 정보 가지고 이것을 보려고 하거든요. 어떤 물건을 볼 때도 지금 현재 앞에 있는 이것을 그대로 보기 보다는 내가 학습되어 진 대로, 나의 정보대로, 나의 경험대로 이걸 끌어다가 봅니다. 아버지를 볼 때도 그러고, 어머니를 볼 때도 그러고, 동생을 볼 때도 그러고, 친구를 볼 때도 모르고, 선생님, 선임, 4 이런 대상을 볼 때의 기본적인 개념이 있잖아요. 그러니 그 개정 가지고 다 봅니다. 그런데 다 똑같지가 않죠. 나의 경험, 지식, 정보 가지고 이걸 보게 되는 것이죠, 그걸 상이라고 합니다. 그게 있게 되어지면 앞에 있는 대상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되어 집니다. 심지어는 이것 때문에 내가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것이 나의 행복을 장애하는 가장 큰, 그런 장애되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누구나 행복하길 원하죠. 이게 누구에게나 의무인 것 같기도 하지만, 행복하길 원하면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는 것을, 않는 쪽으로 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가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 동쪽으로 발걸음을 옮겨야 되잖아요. 그런데 동쪽으로 가고 싶으면서 발걸음은 서쪽으로 가면 동쪽으로 절대 갈 수가 없죠.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길 원하면 행복한 쪽으로 가야 됩니다. 그런데 행복하길 원하면서 우리는 내 기대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 기대하는 마음이 사실은 행복을 방해하는 마음이거든요. 이곳은 이제 미황사라고 한 곳인데요, 20년 전에 미황사에 왔던 사람이 내 가슴속에 20년 전에 봤던 그 상상을 하면서 20년 후에 지금 온다 그러면 같은 대목이 한군데도 없잖아요. 그러면 이 사람은 늘 20년 전과 현재를 비교하면서 실망하는 마음이 많겠죠. 그러면 내가 20년 동안 너무나 좋아했던 곳이라고 생각을 했다가 현재를 보게 되면 실망하게 되잖아요. 이 실망한 마음은 어디서 오는 걸까요? 20년 전에 왔다는 것을 내가 기본 틀로, 상으로 생각을. 하고 현재를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현재를 볼 때는 항상 현재 있는 그대로 인정해야 됩니다. 그래야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죠. 살아있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현재의, 이것을 이루고 있는 수많은 것들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면 정말 기적적인 일들이 수없이 많죠. 그리고 너무나 현재의 살아있으니, 또 이 주변에 있는 것들이, 너무 고맙고, 그래서 행복한 마음이 무한히 일어나게 되어 줍니다. 그래서 어떤 대상을 볼 때에, 그런 상이 일어나지, 일어나기 바로 직접 이전, 바로 상의 일어나기 이전에 마음이 바로 생생하게 살아있는 마음이고, 바로 그 마음이 행복할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인 것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는, 무주라고 하는 건데요. 없을 "무" 자에 머무를 "주" 자, 머무르지 않는다, 이것입니다. 우리는, 나의 수많은 행위들의 기억을 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한 것에 대해서, 거기에 남들이 알아주지 못하면 화가 나죠. 각가지 감정이 일어난 이유는 내가 무엇을 했다, 근데 이걸 알아 주지 못한다, 이런 데서 오는 것들입니다. 나, 내 것, 또 내 자존심, 또 내가 쓴 논문들, 내가 쓰는 말들, 이런 것들이 조금이라도 침해를 받으면 화가 납니다. 각가지 감정 거기서 일어나게 되는데요.
내가 한 행위들의 생각이 머물러 있게 되면 자유롭지 못하게 됩니다. 오직 할 뿐이 돼야 되는데, 그러지 못하죠, 내가 잊어 먹었더라도. 또 그 시점에 보면, 아내 깊은 곳에서는 기억하고 있고, 생각하고 있고, 거기에 기대하고 있는 마음이 있습니다. 이런 것들이 사실은 나를 자유롭지 못하게 만듭니다. 아주 친한 친구가 있는데요, 그 친구에게 언제나 전화를 하고, 어떤 말이든 해도 서로 대화를 하고 받아들일 수가 있었는데, 만약에 친구가 어렵다, 그래서 얼마 정도 빌려줬다고 생각을 해 봅시다. 그러면 그 다음에는 수스럼없이 전화하기가 어렵습니다. 내가 저 친구에게 도움을 줬는데, 내가 전화하면 혹시 오해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불쑥 일어나는 거죠. 그러면 이제는 자유롭게 전화하고 이야기했던 것도 조심스러워지게 된 거죠. 또, 내가 친구에게 스스럼없이 이야기하고 받아들이고 했던 것도, 나중에 친구가 조금 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했다, 그러면, 내가 이런 말 들으려고 도와줬나, 이런 생각을 하게 된 거죠. 이건 굉장히 섭섭한 마음도 거기에서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내 행위의, 내가 생각을 머물러 있어서, 그것 가지고 각가지 감정이 일어나는 거죠.
특히나 화가 나는 감정은 바로 나, 내 것, 나의 자존심, 여기서 일어난 거거든요. 그러나 사실 내 거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게 없습니다. 그 내 건 나라고 하는 것은 사실 내가 만든 납니다. 내가 만든 나를 떠나야 나를 볼 수 있거든요. 그런데 갑자기 나를 나라고 생각하는 것이죠. 사실 나, 라고 했을 때 가장 기본 되는 겉이 내 몸이잖아요.
이 몸이, 내 거라고 자세히 살피고 주장하려고 하면 그렇지 못합니다. 근본적인 몸의 주인은 누굴까요? 부모님이겠죠. 그리고 3.5kg으로 태어납니다.
그 몸이 지금 현재의 몸입니까요? 그렇진 않죠. 끝없이 우리는 밖으로부터의 음식을 먹고, 또 끝없이 세포가 만들어지고, 또 없어지고 하면서 지금은 어려운 여러분들은 한 60조의 세포로 이루어졌습니다. 1초에 백만 개의 세포가 없어지고 만들어지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어느 때 내 몸이다, 이렇게 주장할 수 없고, 또, 내 거라고 할 수 있는, 정확한 근거는 없습니다. 다, 그 밖으로부터 습득해서 만들어진 거죠. 또 결국에는 이 몸이, 흙으로, 물로, 바람으로, 따뜻한 온기로 다 죽을 때는 또 흩어져 버립니다. 그러면, 내 거라 주장할 수 있는 겉이 사실 내 몸이라고 생각했다 하더라도 이 몸 또한 정확히 내 거라고 주장할 수 없고 어느 시점을 나라고 주장할 수가 없습니다. 그 끝없이 변화하기 때문이죠. 그래서 잘 살펴보십시오.
내 거나 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여기서부터 자유로워야 됩니다. 그러면 바로, 그 무, 우주가 됩니다. 머무르지 않기 때문에 대 자유로운 사랑이 된다.

그래서, 바로 이 지점을 잘 알아야 됩니다. 바로 번뇌와 망상이 일어나지 이전, 아주 평화로운 마음이, 아주 고요한 마음이 내 마음이다, 이렇게, 에, 또 어떤 상의 없이 여기에 생생하게 살아있는 바로 이 겉이, 예, 바로 나이 지도하고, 나의 본질이 곧 행복한 마음이라, 또, 머무르지 않는, 그 자유의 마음이 바로 나의 본래 마음이라, 번지다, 이것을 여러분들이 잘 먼저 인식하고, 그 다음에 거기에 대한 믿음이 아주 깊이에 있게 되어진다면, 좋겠습니다.
이게, 대신 신이라고 하는 것이고요, 이게 잘 전제돼야 됩니다. 이제, 밖으로 향하는 마음, 눈이, 을, 밖의 사물을 보고, 살피게 되는 마음, 또 귀가 모든 소리를 살피는 마음이, 코가 모든 냄새를 살피는 마음이, 혀가 끝없이 맛을 쫓아가는가, 이 피부가 또, 밖으로의, 에, 그런 기후 조건들을, 보면서 받아들인 마음들이, 또 거기에서 이것과 저것에 분별하는 그런 마음들이, 이렇게, 잘, 이제 밖으로 향하는 마음을 제 안으로 돌리는 것, 지 생입니다. 그래서 내가 나를 보는 시간, 그것도 바로 지혜와 자비가 가득한 나,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깨달은 분들이나, 나라 본래 한 마음이나, 그리고 아주 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운 나의, 막, 본래, 망상이 없는, 고요한 나, 평화로운, 언제나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행복한 마음, 그리고 어디에도 머무르지 않는 아주 자유로운 마음, 바로 그 마음을 찾는 여행이 바로 참선이다, 이렇게 말할 수가 있겠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이 미황사의 뒷산은, 달마산이라고 하는 산입니다. 우리나라 육지에서는 제일 마지막 산인데요, 굉장히 아름다운 산이에요. 바위 병풍이 둘러쳐져 있는 것처럼 굉장히. 아름다운 산인데, 비가 오거나 그런 날은 안개가 쫙 낍니다. 그러면 절에 대웅전은 보이는데 뒤에 산이, 산이 없어져 버려요. 안 보이게 되죠. 구름이 가리워져 있다고 해서 산이 없어졌을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그러진 않겠죠. 어느 날 또 구름이 싹 걷히면 그대로 산이 드러납니다. 구름 때문에 산이 안 보였던 것이죠. 산은 늘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우리 마음은 늘 생생하게,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그 성품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이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보고, 피부로 촉감을 느끼고, 이 6가지 의식이 있습니다.
분별하는 이런 의식 때문에 욕심이 일어난다고 했죠. 그 욕심이 일어나게 되면 앞에 있는 것이 제대로 안 보입니다. 사실 하나하나마다 귀하고 귀한 것인데, 우리는 비교해서 어떤 것에 눈이 가게 되면 다른 건 눈에 보이지 않게 되는 거죠. 그게 욕심의 구름입니다. 또 누가 나의 자존심 상하는 말을 한마디 툭 던지면, 또 내가 실컷 했는데 다 무시하게 되면 화가 나죠. 화가 나면 그 눈으로 아주 아름다운 모습을 본다 하더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죠. 아주 맛있는 밥을 먹는다 하더라도 맛이 없겠죠. 아주 지혜롭고 귀한, 또 아름다운 음악 소리 이런 것들이 들린다 하더라도 그게 눈에, 귀에 들려 오지 않겠죠.
먹구름이 닦이는 거예요. 화가 나면 그것도 하루가 아니라 뭐, 이상이 일주일, 한 달 가는 경우도 있어요. 영원히. 저층부 안 볼 거야, 이렇게 굉장히 오래 가는 경우도 있습니다. 몇 년씩, 음, 또 앞에 대상하고 상관없이 내 경험, 지식, 정보 가지고, 이것을 "내 주장이 맞아." 이렇게 고집 부리는 경우가 있습니다. 크, 이건 이 세 가지가 늘 나의 구름을, 구름을 만들어서 나의 본래 성품을 가리는 것입니다.
욕심 부리고, 성질 부리고, 고집 부리는 이 마음이, 에, 매 순간, 매 순간 일어납니다. 그래서 아무리 내가 "내 마음이 본래 평화롭다." 하더라도, "벌 행복하다." 하더라도, "어디에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다." 하더라도, 그것들이 먼저 앞서서 나의 일어나지 못하게 만드는 거죠. 그래서 이 욕심의 구름, 또 화로 인한 먹구름, 또 고집스러운 마음, 이 구름을 싹 걷어내고 나의, 에, 본래 성품을 일으켜서 쓰는 것을 선이라고 합니다.
육조 혜능 대사는 좌선을 그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자"는 밖으로 어지러운 마음을 다스리는 게 "자"다. 여기에 앉아 있으려고 왔다면, 에, 밖으로 떠다니는 마음들을 다스려야 되겠죠. 몸만 여기 있으면서 이 생각나고 저 생각나면 그게 앉아 있는 게 아니겠죠. 그리고 "선"이라고 하는 것은 아까 이야기한 대로 나의 자유롭고, 평화롭고, 행복한 바로 그 마음을 일으켜 내서 그 마음으로 쓰는 것, 그 마음의 주인이 되는 것, 이제 "선"이라 이렇게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그 마음을 쓸려고 하면, 음, 어떻게 할까 하는 거, 찌, 바로 이제 수행의 방법이겠죠.
이제, 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도록 하겠습니다. 물론 저, 송광사의 방장, 현봉 큰 스님으로부터 선에 대해서 말씀을 잘 들었겠지만 제 이야기는 이제 조금 풀어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저는 이제 미황사에서 일반인들을 위한, 그리고 또 학생들을 위한, 음, 어린이들을 위한 이제 그런 참선 프로그램들을 오랫동안 해왔기 때문에 이제 이런 좀 풀어서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예를 들어서, 저 위에는 태양이 떠 있고요, 밑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습니다. 제일 밑에는 욕심의 구름이 끼어 있고, 그 위에는 감정의, 그 화가 난 구름이 끼어 있고, 그 위에는 고집스러운 마음이 구름이 껴 있다고 봅시다. 사실 우리가 매 순간 매 순간 만들어내는 구름이거든요. 욕심 부리고, 성질 부리고, 고집 부리고, 이런 것이 매번 있는 것이죠. 그렇기 때문에, 이 구름 때문에 저 태양의 밝음이 비춰 지 못하고 구름에 영향을 받는 것이죠. 구름이 어두우면 어둡고, 비가 내리면 비를 맞고, 태풍이 불면은 그 태풍에 영향을 받는 거죠.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이 구름을 걷어내는 방법인데요, 이 한 겹 한 겹 걷어 낸다고 하는 것은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한국화된 이면 또 다른 구름이 또 만들어지게 되고, 또 다른 구름이 만들어지게 되죠.
그래서 이 참선을 한다고 하는 것은요, 이 구름에 그 영향을 받지 않는 무기를 않으면 안 되는 겁니다. 무기를 하나 만들어서 이걸 들고 날아가는 거죠. 우리가 비행기 타 봤잖아요. 비행기를 타면, 구름 위로 올라가면 구름 위에는 항상 밝잖아요. 예, 그런 것처럼, 그 무기가 있어야 됩니다. 그렇지 않게 되면 금방 생각에 휩싸이게 되거든요. 우리 번뇌라고 하는 것은요, 속성이 있어요. 끝없이 다 생겨지는 속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번뇌가 일어나면 또 다른 번뇌가 일어나고, 또 다른 번뇌가 일어나고, 그리고 유동성이 있어요. 끝도 없이 계속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수행의 키는, 예, 번뇌가 한번 내가 일어날 때, 한번 내 마음에 일어나는 독립성이 있습니다. 하나의 번뇌가 일어날 때, 다른 번뇌가 끼어들지 않는 거죠. 그래서, 수행의 길을 거기다 둡니다. 그래서 여기에는, 의심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의심이라고 하는 것은 궁금함입니다.
알고 싶어 하는 마음, 그렇죠? 이 마음이 커지게 되면, 다른 생각이 끼어들지 못하게 되는 겁니다. 만약에 석가모니 부처님이 꽃을 들어 보였는데 가섭 존자가 빙그레 미소지었다. 그런데, 나는 그, 가섭 전자의 그 빙그레 미소짓는 그 미소, 나도 짓고 싶다. 이런 것은 뭐여? 바로 나도 깨달음을 이루고 싶다. 나의 본래 마음의 주인이 되고 싶다, 이런 거거든요. 그런데, 솔직해져야 돼요. 뭐냐? 모른다, 모른다. 가섭 존자처럼 미소 짓고 싶은데, 나는 가섭 존자처럼 미소 지을 수가 없다. 나는 그 마음을 모른다. 그런 알고 싶다. 나도 가섭 존자처럼 미소 짓고 싶은데, 그 가섭 존자의 미소를 모른다, 알고 싶다, 이런 것이죠. 그래서 "모른다"가 전제돼야 되고, 그런데 알고 싶다, 궁금하다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면, 자기 자신을 찾는 마음이 생겨납니다.
하나 예를 다 들어 볼까요? 음, 고려시대 때 나옹선사라는 스님이 계셨어요. 고려시대 때 공민왕의 스승 분인데요, 이 분이 이제 깨달음을 얻고 난 뒤에 저 양주 회암사라고 하는 곳에 머물렀어요. 그러니까 수많은 스님들이 찾아와서 같이 공부하게 됐어요. 그때 보름에 한 번씩 이제 이 제자들에게 설법을 하십니다. 어느 한 날 나옹선사가 이렇게 제자들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이 설법을 듣는 자 누구냐? 말해 보라. 보고 알아내는 이 주인공은 도대체 무엇이냐? 이건 마음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일 물건이라 이름 붙일 수도 없고, 붙여라 이름 붙일 수도 없는 이건 도대체 뭐냐?" 이렇게 질문합니다. 지금 여러분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이 설법을 듣는 자 누구냐? 예, 뭐야? 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은 도대체 누구입니까? 대답해 보세요." 대부분 "나"라고 대답을 하죠.
"이 보고 듣고 하는 이것은 나죠." 그러면 이 나라고 하는 것을 진정으로 아십니까? "모릅니다. 모르죠. 알고 싶지 않으세요? 알고 싶죠." 그러면 지금 "나"라고 대답한 이것은 무엇인가, 바로 이것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것이죠. "알고 싶다. 나라고 하는 이것을 모르니 알고 싶다. 보고 듣고 하는 이것 알고 싶다." 궁금하다, 이렇게 찾는 마음이 이제 화두입니다. "나"라고 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이지, 보고 듣고 하고 있는 이것은 도대체 무엇이지? 이렇게 마음속에서 알고 싶어 하는, 궁금해 하는 마음이 일어나게 되는, 요 마음이 점점 커집니다. 어떤 것보다도 사실 내가 나를 알아야 세상을 당당하게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으면 또다시 남들 보는 것을 의식해 가지고 내가 거기에 춤추고 사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거죠.
내가 나를 반드시 알아야 되겠다, 그러려면 아주 단순한 바로 이것, 이것을 아는 것이 중요하죠. 그걸 머릿속으로 추측, 상상해서는 안 됩니다. 내 과거의 경험, 지식, 정보 가지고, 내가 봤던 불경 책들 가지고, 명상의 책 등을 가지고 이것을 해석하려고 하면 안 됩니다. 너무 단순하게 알고 싶다, 궁금하다 하는 마음을 일으키는 거죠. 그렇게 되어지면 이 마음이 커집니다. 의심하는 마음이 커지는 거죠. 그러면 바로 그 마음이 어디를 가거나, 앉아 있거나, 서서 걸어 다니거나 항상 그 마음이 작동을 합니다. 예, 그리 됐을 때 그 마음이 커졌을 때 그걸 의정이라고 하죠. 이제는 더 깊은 잠 속에서도 알고 싶어 하는 마음이, 궁금해 하는 마음이 더 커지면 커질수록 이제 깊은 잠 속에서도 찾는 마음이 있습니다.
언제 나오는 때라, 그걸 의단이라고 합니다. 이런 상태가 되면요, 수시로 보는 것마다, 들려지는 것마다 마음이 쫓아가는 마음, 분별하는, 차별하는 마음, 욕심스러운 마음 일단 멈추게 됩니다. 또 나라고 하는 것이 작동을 해서 각가지 감정이 일어나는 것도 멈추게 되죠. 또 과거의 경험, 지식, 정보 가지고 판단했던, 또 주장하던 이 고집스러운 마음 멈추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렇게 궁금한 마음으로 가득한 상태가 되어지면, 내 마음을 이리저리 끌려가는 이 마음을 다, 중심을 잡게 된 것이죠. 그래서 내가 내 마음을 잘 챙기고 있게 됩니다. 그리고 이 마음이 궁금한 마음 계속 지속되어지는 것을 삼매라고 합니다. 이 상태로 계속 이어지는 상태, 그러면 삼매의 힘이 생겨납니다. 이제 어떤 것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이 단단하게 지어지게 되죠.
그리고 이 마음은 저절로 무념무상, 무주, 안 바로 본래 평, 말 없고 본래 자유롭고 본래 늘 생생하게 살아있는 이 생각하기 전, 말하기 이전에 그 마음에 함께, 그 개합한다고 하는데요, 딱 만나게 되는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그때부터 그 마음의 주인이 된 것이죠. 우리가 이렇게 아주 아름답고 또 고유한 산속에서 방 하나 얻어 가지고 일주일간 있으면 마음이 고요해지죠. 고요해집니다, 누구나. 그런데 고요해진 이 마음 가지고 다시 마을에 내려가면, 여러분들의 일터에 가게 되면 누가 하나 탁, 찬 심상찮은 말 한마디 하면 다시 또, 일어나게 되죠. 그러한 상태에 가지고는 안 됩니다. 바로 저 마음속에 있는 가라앉아 있는 찌꺼기마저도 제거를 해야, 그래야 비로소 내 마음에 내가 주인이 되는 것이죠. 바로, 요 씸물이는 마음, 성질 부리는 마음, 고집 부리는 이 마음의 싹에 뿌리마저도 뽑아 버려야, 그 다음에 일어나지 않게 되는 것이죠.
바로 그러한 방법이, 바로 이 화두를 들고 참선하는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