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린 무엇을 기대하고 있나 ― 스토너 독후감
이 소설은 시작부터 주인공이 결코 대단하거나 선명하게 기억될 인물이 아님을 분명히 밝힌다. 남들이 상상하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인물도, 시대를 바꾼 영웅도 아니다. 그저 묵묵히 자신의 자리를 살아간 한 인간의 삶이 펼쳐질 뿐이다. 그렇기에 이 소설은 이미 중·노년기에 접어든 이들에게는 "나와 같은 말로를 걸어온 사람이 있었구나"라는 조용한 위로로 다가오고, 한창 청년의 시기에 있는 이들에게는 이렇게 살아가는 삶 또한 나름의 충만함과 존엄을 가질 수 있음을 보여준다. 더 나아가 청소년이나 그보다 어린 독자들에게는 성공과 성취만이 삶의 전부는 아니라는 또 하나의 가능성을 제시하며, 새로운 시야와 함께 잔잔한 위로의 손짓을 건넨다. 이 소설이 출간된 지 50여 년이 지난 지금에 와서야 다시 빛을 발하는 이유 역시, AI가 많은 것을 우리로부터 빼앗아 가고 있다고 느껴지는 이 시대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조용한 응답을 건네기 때문이 아닐까. 1891년 미주리 주의 작은 농가에서 태어난 스토너는 농부인 부모 밑에서 성장하며 농업을 배우고, 기계화가 진행되는 시대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기술을 익히기 위해 대학에 진학한다. 그러나 대학에서 그는 농업이 아닌 영문학의 아름다움에 매료되고, 결국 영문학도의 길을 걷게 된다. 이후 그가 사랑이라 믿었던 여인 이디스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으며, 교수라는 직업을 가진 채 살아가다 암으로 생을 마감한다. 그의 삶에는 미주리를 벗어나는 극적인 사건도, 가치관을 송두리째 뒤흔드는 전환점도 없다. 괴수가 등장해 영웅이 되거나, 도망자의 신세가 되거나, 큰돈을 손에 쥐는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저 작은 말다툼과 오해, 타인으로부터의 적대가 조금씩 쌓여 작은 틀어짐이 더 큰 균열로 이어질 뿐이다. 그럼에도 그의 이야기가 큰 울림으로 남는 이유는, 영웅이 될 수 있을 것이라 믿으며 성장해온 이들 앞에 놓인 커다란 장벽 앞에서 굳이 그것을 넘지 않더라도 삶은 완성될 수 있다고 말해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랑하는 것,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가고, 그것이 큰돈이 되지 않더라도 스스로 납득할 수 있다면, 그 삶 역시 충분히 의미 있지 않겠느냐고 묻는다.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 좋아하는 일을 하며 살아간다면 설령 삶이 조금 힘들어지더라도 그것을 견디며 살아갈 수 있지 않겠느냐고. 스토너의 삶은 실패도, 성공도 아니다. 아니, 애초에 삶을 성공과 실패로 나눌 수 있는가. 그는 죽음 앞에서 큰 후회 없이 삶을 마주한다. 물론 "그랬다면 어땠을까"라는 가벼운 미련은 남지만, 자신의 삶 전체를 부정하거나 다시 살고 싶다는 후회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삶을 실패라 부를 수 있을까. 그렇게 부르기 시작한다면, 과연 이 세상에 성공한 삶은 얼마나 남게 될까. 죽음 앞에서 우리는 누구나 과거의 선택을 떠올린다. 그때 돈이 아니라 가족을 택했더라면, 가족이 아니라 돈을 택했더라면, 떠났더라면, 머물렀더라면. 선형적인 단 한 번의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피할 수 없는 질문이다. 그렇다면 성공한 삶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을 읽다 보면 안도현의 「너에게 묻는다」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 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이 시가 사랑에 대해 묻는 질문이라면, 『스토너』는 그것을 삶 전체로 확장시킨다. 누구에게가 아니라, 그 어떤 무엇에게라도 우리는 한 번쯤 뜨거웠던 적이 있었는가. 무엇인가에 진심을 다해본 적이 있었는가. 우리는 살아가며 얼마나 많은 것에 마음을 걸 수 있을까. 너에게 묻는다 너에게 묻는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 너는 누구에게 한번이라도 뜨거운 사람이었느냐 반쯤 깨진 연탄 언젠가는 나도 활활 타오르고 싶을 것이다 나를 끝 닿는데 까지 한번 밀어붙여 보고 싶은 것이다 타고 왔던 트럭에 실려 다시 돌아가면 연탄, 처음으로 붙여진 나의 이름도 으깨어져 나의 존재도 까마득히 뭉개질 터이니
- 보미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