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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진영의 구의 증명 –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사랑과 상실을 증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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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에 출간된 작가 최진영의 글, 구의 증명은 너무 담담하고 담백하게도 청춘과 같은 나이에 불같이 사랑했고 그 상대를 잃은 이의 감정을 열거한다. 또한 인간의 복잡한 감정과 관계, 상실을 다룬 작품이며, 그들의 사랑과 그 사랑이 주는 고통을 통해 인간 존재의 깊이를 탐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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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에 구는 더 시골로 들어가자고 했다. 경찰도 공무원도 CCTV도 없는 산골로 들어가자고. 우리는 번개 맞아 죽은 고목 같은 집에서 까만 청설모처럼 살아야 한다고. 지상으로는 최대한 내려오지 말고 고목 안 고목 위에서만 살면 아무도 우리가 사람인 줄 모를 거라고. 나는 사람이 무엇인가 생각했다. 사람 대접 받으려고 안간힘 쓰던 날을 생각했다. 이제 구는 사람이기를 아예 포기하려 하는구나. 사람보다 고목이나 청설모가 되려고 하는구나. 그래 그게 낫겠다. 사람 대접 받겠다고 평생을 싸우느니 그냥 이쯤에서 청설모가 되는 게 나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나는 기꺼이 그러자고 했다. 사람 말고 다른 것이 되자고 했다.
구의 증명을 읽으면서 몇 번을 멈추고 다시끔 읽었는지 모르겠다. 작가의 글에는 힘이 있었다. 나를 소설 속으로 이끌게 하는 힘. 그리고 담이와 구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보게끔 하는 힘.
담이와 구의 감정에 휘말려 그들의 이야기에 깊이 빠져들었다. 구의 죽음과 그로 인한 담이의 고통은 마치 내가 그 자리에 있는 듯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기까지 했다. 이 모든 감정이 너무나도 생생해서, 어느새 내가 담이가 되고, 내가 구가 되고 있었다. 작가의 글은 차분하면서도 강렬하게, 젊은 날의 뜨거운 사랑과 그 상실을 일상의 언어로 풀어냈고, 때로는 가끔은 그 감정과 시선이 너무 버거워 잠시 멈춰 숨을 골랐다. 책 속의 담이가 느끼는 감정, 구의 상실을 견뎌내는 이야기는 마치 내 삶 속 어느 순간을 꺼내어 쓴 것 같았다. 특히, 담이가 구를 먹으면서도 스스로가 미쳐가는 것 같다고 의심하면서도 정신을 다시 다잡을 때. 그 말도 안 되는 감정의 소용돌이는 정말 강렬했다. 이걸 읽으면서 작가가 자신의 일기를 소설로 쓴 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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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예닐곱 살 때부터 매일 짐을 이고 나른 구의 팔 근육은 마르고 팽팽하여 근사했다. 솜씨 좋게 깎아놓은 연필 같았다. 그 시절, 내 손을 꼭 쥐고 나의 방향을 가늠해주던 구의 손과 팔. 그것을 뜯어먹으며 나는 절반쯤 미쳤다. 완전히 미치지는 않기 위해 나를 때리며 먹었다. 내 볼을, 눈을, 내 사지를 때렸다. 내가 무엇을 먹고 있는지 똑똑히 보기 위해서. 잊지 않기 위해서.
맨 정신으로 행하기 어려우나 담은 구가 그 누구에게도 발견 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하나로 구를 몸 안에 숨겨냈다.
구와 담이가 하는 생각이 우리가 일상적으로 고민하는 것들과 너무 닮아있었다. 사회적인 문제나 삶에 대한 방황, 타인에게 느끼는 복잡한 감정들, 그리고 죽음의 불합리함을 고민하는 모습들. 마치 우리가 늘 마음속 깊이 품고 있던 질문을 그들이 대신하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 죽음에 대한 묘사는 정말로 작가가 자신의 경험을 바탕으로 쓴 게 아닐까 싶었다. 교통사고로 죽은 노마, 병으로 죽은 이모, 돈에 의해 죽은 구... 이런 것들이 과연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작가는 우리 모두가 느끼는 이 불합리함을 너무나도 솔직하게 표현했다. 그 불합리함을 의연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태도까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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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 살아 있다.
나만 이 몸에 갇혀 있다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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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구의 생에 덕지덕지 달라붙어 구의 인간다움을 좀먹고 구의 삶을 말라비틀어지게 만드는 돈이 전쟁이나 전염병과 마찬가지라고 생각했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다를 게 없었다. 그건 구의 잘못이 아니었다. 부모가 물려준 세계였다. 물려받은 세계에서 구는 살아남을 방도를 찾아야 했다.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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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통사고와 병과 돈. 그런 것이 죽음의 이유가 될 수 있나. 성숙한 사람은 죽음을 의연히 받아들이는가. 그렇다면 나는 평생 성숙하고 싶지 않다. 나의 죽음이라면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의연하게 받아들일 수는 없다. 죽어보지 않아서, 죽는 게 어떤 것인지는 아직 모르겠다. 그러나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홀로 남겨지는 것이 어떤 것인지는 잘 안다. 지겹도록 알겠다. 차라리 내가 죽지. 내가 떠나지.
이 점에서 최진영 작가의 글은 단순히 창작 소설이라기보다는 우리가 평소에 느끼는 감정들을 진솔하게 쏟아낸 자서전 같은 느낌이었다.
작가는 왜 이 소설의 제목을 구의 증명이라고 했을까? 구는 무엇을 증명하려 했을까? 구는 증명을 해냈을까? 구는 무엇을 증명했어야만 하는가?
구의 존재와 그의 죽음, 그리고 그 후에도 계속 살아가는 담이가 곧 구의 증명이란 것을 깨달았다. 구는 담이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고 있었다. 모두가 단순히 구의 증명을 담이가 구를, 사랑하는 과정에서 연인을 '뜯어먹는' 행위에만 집중하지만, 이 소설은 단순히 뜯어먹는 것 그 이상을 내포했다. 작품 속에서 '담이가 구를 뜯어먹는 행위'는 단순한 연인의 관계를 넘어선다. 이 장면을 단순히 직관적으로 해석하기보다, 사랑하는 존재와의 관계를 통해 자신을 증명하고자 하는 인간의 본질적인 욕망으로 해석할 수 있다. 또한 직관적으로 해석하더라도 담은 구가 원했던 것처럼, 구가 죽어서 먹는 것이 아니라 무로 돌려주는 것 뿐이라고.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작품이 다루는 주제의 깊이는 단순히 로맨스나 상실을 넘어, 존재에 대한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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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째서 사망신고를 해야 하는가. 무엇을 위하여. 누구를 위하여. 구가 죽었다고, 내 이름으로 그것을 증명해야 하는가. 그럴 수 없다. 여기 내 눈앞에 있는데. 이렇게 아름다운 몸이 있는데. 만지고 안을 수 있는데.
이 소설 속에서 구는 담이고 곧 담이 구이기에 담이 살아나아가는 것이 곧 구의 증명이라, 그래서 제목을 구의 증명으로 지었는가 싶었다. 구는 담을 통해 증명해나아가고 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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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그냥 무로 돌려주세요. 아무것도 아닌 상태, 그래서 모든 것인 상태로.
싫어. 그것도 죽는 거잖아.
죽는 거 아니야. 그냥 좀 담대해지는 거야.
 
그때 구의 소원을 마음으로 거듭 외워본다. 고통과 생과 담대함, 그 의미가 점점 뭉개지고 흩어진다.
다 읽고 나서는 제법 궁금한 것이 하나 남았다. 그래서 담이는 오래 살았을까하는. 구도 담이 오래오래 살길 바랐고, 담이도 그랬는데. 이 소설에서 구는 담이고, 담이 구라서 결국 담이가 살아가는 것이 구의 증명일텐데, 담이는 증명해낼 수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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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네가 죽는다면, 그때가 천 년 후라면 좋겠다.
천 년토록 살아남아 그 시간만큼 너를 느낄 수 있다면 좋겠다.
나는 이미 죽었으니까.
천만년 만만년도 죽지 않고 기다릴 수 있으니까.
또한, 이 작품의 또 다른 강점은 성별에 대한 모호함이다. 초반에는 구와 담의 성별이 구체적으로 드러나지 않으며, 이는 독자로 하여금 성별을 넘은 감정적 연결에 집중하게 만든다. 이로 인해 독자는 특정한 성별의 프레임 없이 인물들을 받아들이게 되며, 퀴어한 해석도 가능하게 한다. 구와 담의 이름조차도 성별을 명확히 드러내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관계는 더욱 보편적으로 느껴진다.
읽다보면 정말 뭉클해지는 부분이 많았는데, 개인적으로 순애적인 사랑 이야기를 좋아해서 그런지, 이 책의 감정선이 더 크게 와닿았던 것 같다.
"구의 증명"은 단순히 사랑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는 우리가 사랑할 때, 상실할 때, 혹은 외로울 때 느끼는 감정을 몇 배로 증폭시킨 소설이다. 그 과정에서 느낀 감정들이 너무 과하지 않나 생각하다가도, 곧 그것이 우리 모두가 겪는 감정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 소설은 우리 내면에 존재하는 고통과 사랑의 증명일지도 모른다.
천 년 후 사람들은 과연 어떤 일에 충격을 받을지, 혐오를 느낄지, 공포를 느끼고 불안해할지, 모멸감에 빠질지. 어떤 일을 비난하고 조롱할지. 어떤 자를 미친 자라고 부를지. 어떤 이야기에 공감하고 무엇을 갈망할지. 천 년 후의 아름다움과 추함. 선과 악. 그때에도 돈이 존재를 결정할까. 대체 뭘 먹고 살까. 지금의 ‘인간적’이라는 말과 천 년 후의 ‘인간적’이라는 말은 얼마나 다를까…… 천 년 후 사람들은 지금과 완전히 다르리라 믿고 싶다. 아니, 천 년 후에는 글을 쓰고 읽는 인류 따위 존재하지 않으면 좋겠다. 그렇다. 글을 쓰고 읽는 인간으로서, 내가 마지막이었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나는 그만큼, 오래 살아남아야 한다.
성서는 언제 쓰였지? 적어도 이천 년은 넘지 않았나? 어떤 사람은 이천 년 전에 써진 글을 읽으며 감동하고 위로받고 황홀해하고 미친다. 그리고 믿는다. 섹스 없이 아이를 낳았고 죽은 자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를. 그건 사십 일 동안 비가 내렸다거나 바다가 갈라졌다는 것과 차원이 다른 사건인데…… 터무니없는 것을 받아들여야 할 때 믿음은 아주 유용하다. 말도 안 돼, 라는 말이 튀어나오는 일에야 믿음이란 단어를 갖다붙일 수 있다는 말이다.
일단 믿으라. 그러면 말이 된다.
내겐 부활과 동정녀의 잉태가 필요하다. 윤리나 과학이 끼어들 여지없는 기적이 필요하다. 천 년 후가 필요하다. 종말 혹은 영생이 필요하다. 미친 자아가 필요하다. 인간이 아닌 상태라도 좋으니, 당신이 필요하다.

믿음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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