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말하면, 예전엔 HPE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가 딱 하나였다. 서버실 한쪽에 덩그러니 놓인 ProLiant 서버 박스. 그게 다였다. "좋은 하드웨어 만드는 회사"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근데 작년부터 슬슬 이상한 신호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인프라 관련 컨퍼런스에서 HPE 세션에 사람이 몰리기 시작하더니, 아는 인프라 담당자들이 하나둘씩 "GreenLake 검토 중이야"라는 말을 꺼내는 거다. 처음엔 그냥 흘려들었다. 그런데 직접 파고들수록 — 이건 진짜 예전 HPE가 아니구나, 싶었다.
오늘은 내가 왜 HPE를 다시 보게 됐는지, 그리고 실무에서 직접 씨름하면서 느낀 것들을 풀어보려 한다.
숫자 먼저 보자 — 근거 없이 칭찬할 생각은 없으니까
2026년 1분기 매출이 전년 대비 18% 늘어서 93억 달러. 2025년 연간으로는 343억 달러에 14% 성장이다. 숫자만 보면 "그게 그렇게 대단한가?" 싶을 수도 있다.
근데 세부를 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네트워킹 부문이 151% 성장했다. 151%다. 두 배가 넘는다. 이게 가능한 이유가 바로 2025년에 마무리된 주니퍼 네트웍스 인수(140억 달러)다. 그냥 회사 하나 사온 게 아니라, 네트워킹 판도 자체를 바꿔버린 거다.
구독형 서비스인 GreenLake의 연간 반복 매출(ARR)이 32억 달러에 62% 급증한 것도 흥미롭다. 이건 기업들이 '장비를 산다'는 관념에서 '서비스를 구독한다'는 방식으로 실질적으로 넘어가고 있다는 신호다. 예산 구조가 바뀌고 있다는 얘기다.
예산 전쟁터에서 살아남기 — GreenLake가 왜 갑자기 설득력 있어졌냐면
IT 담당자라면 다들 안다. 기안을 올리면 꼭 한 번씩은 "퍼블릭 클라우드로 다 이전하면 안 되나요?"라는 피드백이 온다. 그리고 퍼블릭 클라우드로 일부 이전해보면 이번엔 "데이터 나가는 비용이 왜 이렇게 많이 나와요?"라는 질문이 따라온다.
결국 현실은 '온프레미스 100%'도 아니고 '퍼블릭 클라우드 100%'도 아닌, 그 어딘가의 혼합이다. 문제는 이 혼합을 제대로 관리하는 게 생각보다 훨씬 복잡하다는 거다.
HPE GreenLake Flex Solutions가 주목받는 이유가 여기 있다. 서버를 사서 놀리는 게 아니라, 실제 쓴 만큼 비용이 나가는 구조다. 그러면서도 데이터는 내 데이터센터 안에 있다. 퍼블릭 클라우드처럼 데이터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불안감도 없고, 무겁게 자본을 묶어두는 것도 아니다.
재미있는 건 HPE Financial Services(HPEFS)의 '90/9 프로그램'이다. 처음 90일은 결제를 안 해도 되고, 이후 9개월은 1%씩만 낸다. 예산 승인 주기가 긴 기업들한테는 이게 꽤 현실적인 탈출구가 된다.
실제로 이 모델로 전환한 기업들이 기존 대비 서버를 36%까지 줄였다는 데이터도 있다. 단순히 적게 쓰는 게 아니라, 진짜 필요한 만큼만 쓰게 되니 그렇게 된다는 게 합리적으로 들렸다.
오케스트레이션이 없으면 반쪽이다 — Morpheus 이야기
인프라가 아무리 좋아도 관리가 엉망이면 소용없다. AWS, Azure, 사내 데이터센터가 섞여 있는 환경에서 자원을 통합해서 보는 단일 창이 없으면, 운영팀은 매일 이 화면 저 화면 오가며 고생한다.
HPE Morpheus Enterprise Software는 그 창 역할을 한다. 어디 있는 자원이든 상관없이 단일 인터페이스에서 배포, 모니터링, 비용 관리까지 된다. 개발팀은 어디에 올릴지 고민 없이 클릭 몇 번으로 앱을 올리고, 운영팀은 전체 그림을 보면서 최적화한다.
VMware Cloud Foundation (VCF) 9.0과 결합하면 VM과 컨테이너를 같은 인프라에서 같이 돌릴 수 있다. 아직 VM 기반 레거시가 많은 기업들한테 이게 얼마나 현실적인 솔루션인지, 직접 봐야 체감이 온다.
AI 도입, '해봤다'와 '돌아간다'는 다른 얘기다
요즘 경영진한테서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우리도 AI 넣어봐"다. 근데 ChatGPT 계정 하나 만들어서 몇 가지 써보는 것과, 기업의 내부 데이터와 연결해서 24시간 돌아가는 AI 서비스를 만드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이야기다. 후자를 해보려고 시작하면 처음 부딪히는 게 인프라다.
HPE는 이걸 'AI 팩토리(AI Factory)'라고 부른다. 공장이라는 비유가 좀 진부하게 들릴 수도 있는데, 생각해보면 꽤 정확하다. AI 서비스를 제대로 운영하려면 데이터 수집, 전처리, 모델 학습, 추론, 모니터링까지 전 과정이 파이프라인처럼 돌아가야 한다. 그걸 위한 목적 기반 인프라가 필요하다는 얘기다.
NVIDIA와 파트너십으로 나온 'HPE Private Cloud AI'는 GPU 128개까지 확장 가능하고, NVIDIA Blackwell 기밀 컴퓨팅 기술을 에어갭(인터넷 차단) 환경에서 돌릴 수 있다. 공공기관이나 금융, 국방 분야처럼 데이터가 절대 외부로 나가면 안 되는 조직들한테는 이게 핵심 조건이 된다.
HPE AI 서버 백로그만 32억 달러라는 수치는 그냥 '인기 있다'는 게 아니라, 실제 수요가 그만큼 두껍다는 증거다.
"이거 네트워크 문제 아니에요?" — IT 담당자라면 너무 잘 아는 그 말
이상한 단어 하나 알려드리자면, 업계에서 MTTI라고 부르는 게 있다. Mean Time to Innocence. 직역하면 '무죄 증명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장애가 나면 가장 먼저 의심받는 게 네트워크인데, "네트워크는 문제없습니다"를 증명하기 위해 로그 뒤지고 패킷 분석하는 그 시간이다.
이 MTTI를 줄이는 게 HPE Aruba와 주니퍼 Mist AIOps의 핵심 가치 중 하나다. AI 기반 가상 어시스턴트 Marvis가 "스위치 포트 3번에 지연이 있고, 원인은 케이블 불량 확률 95%입니다"라고 먼저 알려준다. 엔지니어가 삽질하기 전에.
소매 현장 얘기를 좀 하자면, POS 단말기나 결제 터미널이 몇 초만 먹통이 돼도 고객 항의에 매출 손실까지 직결된다. Aruba CX 6000 같은 소형 스위치는 좁은 매장에도 들어가고, Marvis 분석 기능을 활용하면 네트워크 관리 그 이상으로 매장 내 고객 흐름까지 읽어낼 수 있다.
결제가 절대 멈추면 안 되는 코어 금융 시스템에는 HPE NonStop Compute(NS9 X5, NS5 X5)가 있다. 하드웨어 장애나 네트워크 리셋이 생겨도 서비스 가용성을 거의 100%로 유지해주는 결함 허용(Fault-tolerant) 아키텍처다.
백업은 있는데, 복구가 안 된다면
컨설팅을 하다 보면 간혹 가슴 아픈 케이스를 만난다. 수억 원 들여 백업 솔루션 사뒀는데, 랜섬웨어 감염 후 복구해보니 전날 새벽 백업본만 있었던 거다. 그날 하루치 거래 데이터가 그냥 사라진다.
재해 복구(DR)를 설계할 때 꼭 잡아야 하는 두 지표가 RPO와 RTO다. RPO는 '얼마만큼의 데이터를 잃어도 회사가 버틸 수 있는가', RTO는 '장애 후 시스템을 복구하는 데 최대 얼마나 걸려도 되는가'다.
모든 시스템을 동일한 DR 수준으로 맞추면 비용이 터진다. 그래서 비즈니스 중요도에 따라 계층을 나눠야 한다. 글로벌 결제 게이트웨이는 초 단위 RPO/RTO가 필요하고, 내부 파일 서버는 하루 단위로도 괜찮다. 이 계층 설계 자체가 전략이다.
HPE Zerto는 이 부분에서 강점이 뚜렷하다. 연속 데이터 보호(CDP) 기술로 트랜잭션을 실시간 저널에 기록해두기 때문에, 오후 3시 15분 10초에 랜섬웨어 암호화가 시작됐다면, 1초 전 상태로 돌아갈 수 있다. 이론이 아니라 실제로 그렇게 작동한다.
그리고 실무자들이 진짜 싫어하는 DR 모의훈련 — Zerto는 운영 환경에 영향을 주지 않고 이 테스트를 할 수 있다. "훈련이 없으면 DR 계획은 그냥 문서"라는 말이 있는데, 테스트를 주기적으로 돌릴 수 있느냐 없느냐가 실질적인 차이를 만든다.
ESG? 돈 되는 이야기부터 하자
"친환경 데이터센터 만들어라"는 말을 현장에서 들으면 솔직히 좀 막막하다. 예산은 부족한데 ESG까지 챙기라니.
근데 접근을 바꿔보면 얘기가 달라진다. 전력 낭비를 잡는 게 곧 비용 절감이다. 쓸데없이 전기 먹는 장비를 찾아내서 바꾸면 운영비(OPEX)가 줄고, 그 돈이 다시 혁신에 들어간다. ESG가 명분이 아니라 수단이 되는 거다.
HPE Sustainability Insight Center(SIC)는 이기종 장비들의 전력 데이터를 한 곳에 모아준다. HPE 장비뿐 아니라 다른 벤더 장비 데이터도 통합해서 보여주기 때문에, 실제로 "어느 장비가 비정상적으로 전력을 많이 먹고 있는지"를 찾아낼 수 있다.
하드웨어 자체도 꽤 인상적이다. HPE ProLiant Gen11은 이전 세대 대비 데이터센터 공간을 60% 덜 쓰면서, 전력 및 냉각 비용을 81% 줄였다고 한다. 처음 들었을 때 과장 아닐까 싶었는데, 고밀도 설계와 냉각 구조 개선이 실제로 이 수준의 차이를 만들더라.
스토리지 쪽에서는 Alletra Storage MP가 컴퓨팅과 용량을 분리해서 필요한 만큼만 선형으로 늘릴 수 있게 해준다. 5년 후 트래픽을 예측해서 미리 장비 사두는 그 고통스러운 과정을 줄여준다.
실무자 노트: 지금 당장 체크해야 할 것들
Azure Local 환경에 ConnectX-6 쓰고 있다면
Microsoft Azure Local(구 Azure Stack HCI) 클러스터에 NVIDIA Mellanox ConnectX-6 Lx/Dx 어댑터가 있다면 서버 로그 한 번 확인해볼 것을 권한다.
Hyper-V 라이브 마이그레이션처럼 대역폭이 순간적으로 몰릴 때, NDIS 계층에서 OID 타임아웃 오류(0x10204 등)가 발생하는 케이스가 보고됐다. 어댑터 온도가 120°C까지 치솟고, 드라이버가 응답을 멈추면서 네트워크가 강제 리셋된다. 그러면 VM이 클러스터에서 밀려나거나, 최악의 경우 블루스크린이 뜨면서 서비스가 멈춘다.
펌웨어와 드라이버 버전을 아래와 같이 맞추면 해결된다:
어댑터 모델
문제 발생 버전
안정화 버전
ConnectX-6 LX FW
26.44.10.36
26.41.10.00
ConnectX-6 DX FW
22.44.10.36
22.41.10.00
드라이버 (mlx5.sys)
25.1.26647.0
24.4.26429.0 (또는 25.4 이상)
당장 업데이트가 어렵다면 임시로 레지스트리 CheckForHangTOInSeconds 값을 132초로 올리고, RSS(수신 측 배율)를 꺼서 어댑터 민감도를 낮춰두는 방법이 있다. 근본 해결은 아니니까 빠른 시일 내에 버전을 맞추는 게 맞다.
부품 가격이 터지는 시기의 견적 전략
2026년 1분기에 AI 서버용 고성능 DRAM 가격이 55~60% 폭등했다. 그 여파로 HPE 포함 주요 제조사들이 견적 유효 기간을 30일에서 14일로 줄였다.
기안 올리고 결재받는 데만 일주일 넘게 걸리는 조직에서 14일 안에 발주를 마쳐야 한다면 현실적으로 힘들다. 이럴 땐 가격 변동이 큰 컴퓨트 자원과 상대적으로 안정적인 블록 스토리지 견적을 분리하는 방법이 유용하다. 리스크를 쪼개면 결재 단계도 나눌 수 있다.
또한 파트너사의 자동화 견적 도구를 활용해 GreenLake Flex Solutions 기반 OPEX 제안서를 빠르게 뽑아내는 것도 방법이다. CAPEX 기안보다 OPEX 구독 계약이 경영진 승인을 훨씬 빠르게 받는 경우가 많다.
마치며
HPE를 다시 보게 된 건 솔직히 말하면, 처음엔 반신반의였다. 주니퍼 인수하고, AI 팩토리니 소버린 AI니 말이 많아지니까 '또 마케팅이구나' 싶었다.
근데 GreenLake ARR 성장률, 네트워킹 부문 151% 성장, Zerto의 CDP 복구 방식, Marvis의 MTTI 단축 — 이런 것들을 하나씩 파고들수록, 말만 바뀐 게 아니라 실제 제품과 서비스 구조가 바뀌었다는 게 보였다.
물론 모든 게 완벽하진 않다. 여기서 언급한 ConnectX-6 버그 같은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고, 견적 유효 기간 단축 같은 불편함도 있다. 그걸 모른 척하고 칭찬만 하는 건 별 도움이 안 된다.
다만 2026년 기준으로, AI 인프라와 하이브리드 클라우드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기업이라면 HPE를 검토 목록에 넣지 않을 이유가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여러분 조직에서 가장 발등에 불이 떨어진 인프라 고민이 뭔지 궁금하다. DR인지, 예산 구조 전환인지, AI 인프라 설계인지 — 댓글로 남겨주면 같이 얘기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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