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마침내 끝난 365일의 기다림

Playlistㅣ달빛에 검정이 내리면, 습관처럼 차가운 물에 얼굴을 묻었다

 “일어났는가?” 

 언제 들어도 기꺼운 목소리가 잠에서 막 깨어난 K를 반겼다. 어라, N 벌써 일어난 거야? 내가 늦잠을 잤나 봐. 잠이 묻어나는 목소리로 대꾸하는 모습에 N이 웃으며 다가와 다정히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는 대답 대신 곧 커튼을 열어 창문 밖을 보여주었다. 

 “와…! 잔뜩 쌓였네.”

 한가득 쌓인 눈이 밤을 밝히고 있는 광경을 보고, K는 감탄과 함께 담요를 두르며 창문 앞에 N과 나란히 섰다. 자연스럽게 마주 기댄 어깨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전해졌다. 

 몇 년 전. 오랜 친구들과 만나기로 약속을 잡자마자 N과 K는 이르게 길을 나섰다. 두 사람은 한 곳에 오래 머무르는 법이 없었으므로 떠나는 것에도 망설임이 없었다. 사계절이 만연한 나라에서 모든 계절을 만끽하고, 여름만 존재하는 나라에서 세 달 정도 머문 후. 지금 이곳에 도착했다. 아주 약간 포근해지는(이조차도 아주 짧은 찰나의 기간이지만) 시기를 제외하면 항상 춥기만 한 겨울의 나라에. 

 “새벽 내내 눈이 쌓이는 소리가 들리더니, 드디어 그쳤군.” 

 “새하얗네. 예쁘다. 아무도 밟지 않은 눈을 보고 있으면 꼭 흔적을 남기고 싶어진다니까.”

N은 시선을 창밖에서 K에게로 돌렸다. 어느새 잠이 달아나 반짝거리는 그의 눈을 보고 있자니 첫눈을 보고 신이 난 강아지 생각이 났다. 그럼 남기면 되지 않는가? 언제나 그렇듯 평온한 투로 말한 N이 손을 잡아끌면, 어어. 지금 바로 하자는 건 아니었는데. K는 대답과 다르게 가벼운 발걸음으로 N의 뒤를 따랐다. 

 “세상에…! 높이 좀 봐. 무릎도 넘겠는데?”

밖으로 나온 K는 눈이 동그랗게 커질 수 밖에 없었다. 어찌나 많은 양이 내렸는지, 허벅지까지 오는 높이의 눈 위에 발자국을 제대로 남기기 위해서는 지붕에서 뛰어내려야 할 정도였다. 그런 광경을 보고 있자니 그리운 친구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비타나 네요 군이 좋아할 것 같군.” 

 “그러게. 두 사람이라면 눈 속에 파묻혀서 천사 모양을 만들거나, 눈싸움을 하지 않을까?”

 “하하. 유키카 군은 그런 두 사람에게 휘말려 같이 눈싸움을 시작하겠지.”

  눈에 훤히 그려지는 친구들의 모습을 상상하며 키득대는 K에게 N이 제안했다. 우리도 해보는 건 어떤가. 뭘? 음, 장갑이 없으니… 눈싸움 대신 천사 모양이라도 남겨보지 않겠나?. 갑작스럽지만 그 다운 제안이었다. N은 언제나 점잖아 보이는 얼굴로 엉뚱한 제안을 하곤 했으니까. 이만한 눈이 내리는 것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고 N과 함께하는 추억엔 유치함조차 기꺼웠기에 K는 흔쾌히 수락했다. 거대한 눈의 벽 앞에서 하나, 둘, 셋! 숫자를 외친 두 사람은 곧 눈 위로 드러누워 팔다리를 움직였다. 네요나 비타였다면 우스울 정도로 빠르게 허우적거렸겠지만 두 사람은 비교적 낭만적인 모습이었다. 커다란 천사 하나와 보통의 천사 하나가 만들어지고 나면,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푸핫, 제대로 했는지 모르겠네… 아무튼 기분은 좋다.” 

 “그러게 말일세. 이렇게 위를 보니 하늘에 모양이 난 것 같군.”

  N의 말에 천사 모양의 하늘을 바라보다가 문득 옆을 돌아보았다. 필히 그가 있어야할 곳에 새하얀 눈이 시야를 가로막고 있었다. 

 “N, 거기 있지?” 

 “그럼. 난 언제나 자네 옆에 있네.”

 “방금, 조금 바보 같은 짓을 했어. 별을 보며 걷다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 했지 뭐야.”

 “답지 않은 실수를 했군. 다치진 않았는가?”

 “다행히 중심을 잘 잡았어.”

 “무슨 별을 보았길래?”

 “「그」별을 보고 있었어. 아마… 내일이 가장 밝은 날일 거야.”

  K는 N의 눈에 닿을 수 없었고, N 역시 K에게 닿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단 하루. 365.2564일마다 돌아오는, 적당한 온도의 보이지 않는 계절이 한바퀴 돌아 타우르스 중 가장 밝게 빛나는 알데바란이 같은 자리에 위치하는 날. 유일하게 서로를 바라보고 만질 수 있는 그 날만을 두 사람은 손꼽아 기다려왔다. 부유하는 노란 빛을 향해 손을 뻗던 N은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마침 나도 그 별을 보고 있었다네.”

 같은 장소에서 같은 것을 바라보며, 오직 서로만을 놓치고 있던 두 사람은 어느 순간부터 약속한 것처럼 같은 동선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N이 카르코사에서 가장 높은 곳에 오르면 K도 따라 올랐고, K가 바닷물에 발을 담그면 N도 맨발로 그 옆을 따라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서로가 보이지 않는 만큼 대화로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그려냈다. 발등을 덮는 바닷물이나 발가락 사이로 느껴지는 고운 모래의 질감, 무성한 잔디밭을 거닐 때 풍기는 풀내음,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부드러운 바람 같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 나누면서. 

 그렇게 같은 하늘을 바라보며 별의 일주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처음 보는 별에 이름을 붙여주는 일들을 하다가도 문득 K는 묻곤 했다. N, 거기 있지? 그럼. 난 언제나 자네 옆에 있네. 

 그렇게 오랜 날들을 밤을 새며 시간을 보내다가 기다림에 지쳤을 쯤부터, 자지 않고 먹지 않아도 어떤 영향도 받지 않고 살아가는 우리가 인간들처럼 ‘잠’을 자는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물론 신으로 태어난 N에겐 낯선 일이었다. 수면을 취한다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므로, 처음에는 그냥 눈을 감고 흉내를 내는 것에 그쳤다. 그 다음 며칠은 눈을 감고 명상을 하기 시작했고, 그 다음 몇달은 고요함 속에서 심장의 박동을 세고 있기도 했다. 그렇게 몇 년이 지났을 때. N은 겨우 잠과 비슷한 형태의 행위에 도달할 수 있었는데, 여전히 꿈을 꾸지는 못했다. 그저 몸을 가장 고요한 상태로 만들어 시간의 흐름을 빠르게 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에 비해 K는 인간이었던 적(비록 인위적으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이 있기에 반신의 몸으로 잠에 드는 것이 그리 어렵지는 않았다. 낡은 고서실에서 밤낮없이 책을 읽다가 현실을 잊기 위해 잠을 청했던 억척스럽고 괴로웠던 날의 기억은 쉽게 잊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자신의 실수로 분신이 되어 함께 벌을 받아야만 하는 네게 가진 죄악감과는 별개로, 비로소 삶의 순간을 혼자가 아닌 너와 나눌 수 있어 얼마나 충족되고 행복한지. 악몽만 꾸던 시절과는 달리, 지금은 행복한 우리의 꿈을 꿀 수 있었다.

 나의 분신이자, 친구이자, 가족이자  그리고… 

 째깍.

 들리지 않을 세계의 초침 소리가 귓가를 울리고 나면 이윽고 같은 자리에 올려두었던 손이 겹쳤다.

“안녕, N. 오랜만이야…!”

“오랜만이군. 보고싶었다네.”

* 

뽀드득.

눈이 눌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 모양이 난 하늘 위로 노란색 동공이 튀어나왔다. 

“역시 얼굴이 보이는 쪽이 더 좋군.”

내밀어진 손을 잡고 일어난 K는 그러게 말이야. 하고 대답했다. 저보다 조금 높은 곳에 자리한 얼굴로 시선을 옮기고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제 옆에 있는 이가 허상이 아님을 만끽했다. 이제는 365.2564일을 기다리지 않아도 K의 곁엔 언제나 N이 있다. 

“N. 새삼스럽지만… 나와 함께 해줘서 고마워.”

 너의 죄는 나의 죄이기도 해. 자네가 혼자 괴로워하길 바라지 않네. 혼자 살기엔 이 세상은 너무 외로우니, 함께 있는 것이 좋지 않겠는가? N이 계속해서 들려준 말을 되새기며, 사과 대신 고마움을 또 한 번 전했다.

“나야말로.”

그러면 N은 세상에서 가장 다정한 얼굴로 답해주었다. 하얀 눈에 반사되어 더욱 빛나는 서로의 눈동자를 마주보길 몇 초. 두 사람의 거리가 천천히 가까워지더니, 곧 그림자가 하나 될 정도로 가까이 맞붙었다. 쪽소리도 나지 않을 만큼 담백한 입맞춤을 마치고 나면, 맑아진 하늘 위로 두 사람을 닮은 색상의 오로라가 화려하게 일렁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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