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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계 대부' 전유성, 폐기흉 악화로 별세

'개그계 대부' 전유성, 폐기흉 악화로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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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그계 대부」 전유성,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살다: 그의 삶과 예술, 그리고 유산에 대한 심층 보고서
서론: 한국 코미디계의 큰 별이 지다
2025년 9월 25일, 한국 코미디의 한 시대를 풍미하고 그 근간을 다졌던 원로 코미디언 전유성 씨가 향년 7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대한민국방송코미디언협회에 따르면, 고인은 폐기흉 증세가 악화되어 입원 중이던 전북대학교 병원에서 영면에 들었다.1 그의 부고는 단순한 한 개인의 사망 소식을 넘어, 한국 대중문화에 독보적인 발자취를 남긴 한 거장이 우리 곁을 떠났음을 의미했다. 평생을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살며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창조했던 그의 삶은 한국 코미디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이 보고서는 그가 남긴 웃음과 예술, 그리고 후배들에게 심어준 가르침의 발자취를 추적하며, 그가 한국 코미디계에 남긴 영원한 유산을 깊이 있게 조명하고자 한다.
이 보고서가 제기하는 핵심 질문은 다음과 같다. 전유성은 왜 다른 코미디언들과 달리 '기인(奇人)'이자 '멘토'로 기억되는가? 그가 남긴 웃음의 본질은 무엇이며, 그가 한국 코미디의 '초석'이 될 수 있었던 근본적인 힘은 어디에서 비롯되는가? 이 질문에 대한 답을 통해, 우리는 한 개인의 삶을 넘어 한 예술 장르가 어떻게 진화하고 발전해왔는지에 대한 통찰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제1장: 마지막을 장식한 삶의 무대
갑작스러운 비보: 향년 76세, 폐기흉으로 별세
전유성 씨는 2025년 9월 25일 오후 9시 5분경, 전북대학교 병원에서 폐기흉 증세 악화로 별세했다.1 이 비보가 전해지자 많은 이들이 안타까움을 금치 못했다.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작년부터 꾸준히 전해졌다. 그는 2024년 11월 후배 김대희의 유튜브 채널에 출연해 그해에만 급성 폐렴, 부정맥, 코로나19를 겪으며 몸무게가 16kg이나 줄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5 이후 그는 지난 6월 기흉 시술을 받았으나, 증세가 악화되어 다시 입원 치료를 받던 중이었다.5 고인은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유일한 혈육인 딸 전제비 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조용히 눈을 감았다.
빈소와 장례: 동료와 후배들의 애도 물결
전유성 씨의 장례는 희극인장(코미디언협회장)으로 엄수될 예정이다. 부고가 처음 전해졌을 당시에는 빈소와 장지가 미정이었다는 보도도 있었으나, 이후 빈소는 서울아산병원에 마련된 것으로 확정되었다. 이처럼 부고 소식이 전해진 직후의 정보 혼란은 고인의 갑작스러운 사망 소식에 대한 업계와 유족들의 당혹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미세한 단서였다.
그의 장례가 개인장이 아닌 '희극인장'으로 치러진다는 사실은 단순히 그의 직업적 정체성을 넘어, 그가 한국 코미디계에서 차지했던 위상과 후배들에게 미쳤던 지대한 영향력을 상징한다. 이는 그의 생전 활동이 개인적인 성공에 그치지 않고, 한국 코미디계 전체의 '정신적 지주' 역할을 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증거이다. 그가 남긴 웃음과 업적을 기리고자 하는 업계의 의지가 반영된 결정이며, 그의 죽음을 단순히 한 개인의 사망이 아닌, 공동체의 큰 손실로 인식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제2장: 코미디의 틀을 짠 설계자
배우를 꿈꾸던 작가: 데뷔의 시작
전유성 씨의 연예계 경력은 정극 배우를 지망하면서 시작되었다. 서라벌예술대학 연극영화과 또는 연극연출과를 졸업한 그는 여러 차례 배우 시험에서 낙방의 고배를 마셨다. 하지만 연기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는 1969년 TBC 동양방송의 방송작가 특채로 연예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당시 최고의 인기를 누리던 코미디언 '후라이보이' 곽규석의 방송 및 공연용 원고를 써주는 일을 맡으며, 그는 일종의 코미디 작가로 경력을 쌓아갔다. 무대 위에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대신 무대 뒤에서 웃음을 설계하는 역할을 맡았던 이 시기는, 그가 평생 '아이디어 뱅크'로 불리게 된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세상에 내놓다
전유성 씨가 한국 코미디 역사에 남긴 가장 혁명적인 업적 중 하나는 바로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방송에서 처음 사용한 인물로 기록된다는 점이다.2 '코미디언'이라는 기존의 외래어 대신 그가 만든 이 신조어는 단순한 호칭의 변화를 넘어선다. 과거 '광대'나 '딴따라'와 같은 비하적인 용어로 불리기도 했던 희극인들에게 '개그(Gag)'를 만드는 사람, 즉 '개그맨'이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했다. 이는 코미디를 '웃기는 기술'을 넘어 '예술적 행위'로 격상시키고, 희극인들이 창의적인 '웃음의 설계자'라는 전문성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했다. 용어는 인식을 만들고, 새로운 인식은 장르의 위상을 바꾼다. 그의 단어 창조는 한국 코미디의 패러다임을 연기력 중심에서 '아이디어'와 '창의성' 중심으로 전환하는 초석을 놓았다.
대표 프로그램과 아이디어 뱅크의 활약
1970년대 말부터 코미디언으로 전향한 그는 1980년대 KBS의 전성기를 이끌었던 '유머 1번지', '쇼 비디오 자키' 등을 통해 대중적인 인기를 얻었다.13 특히 '좋은 친구들'의 '전유성을 웃겨라' 코너는 그의 독특한 캐릭터를 잘 보여주며 큰 인기를 끌었다. 이와 함께 그는 KBS의 대표 공개 코미디 프로그램 '개그콘서트'의 개국 공신 중 한 명으로 꼽힌다. 직접 코너를 진행하지는 않았지만, 후배들에게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코너의 큰 틀을 잡아주는 '아이디어 뱅크' 역할을 묵묵히 수행했다.
코미디언으로서의 활동 외에도 그의 영역은 매우 넓고 다양했다. 그는 '1주일만 하면 전유성만큼 한다', '조금만 비겁하면 인생이 즐겁다' 등 유머와 통찰이 담긴 여러 저서를 남겼으며, 1991년 영화감독으로 데뷔하기도 했다. 또한 다양한 영화와 광고에 출연하며 다면적인 예술가로서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그의 파란만장한 삶의 궤적은 다음의 연대기 표를 통해 한눈에 확인할 수 있다.
제3장: 개그계의 영원한 멘토
후배들을 키워낸 인재 발굴의 대가
전유성 씨는 무대 위의 스타보다 무대 뒤에서 조용히 빛을 내는 조력자이자 멘토로 더 유명했다. 그는 아이디어가 막히면 찾아가야 하는 존재로 통했으며, 코너의 큰 틀을 잡아주는 것은 물론, 후배 개그맨들의 개그에 대한 따끔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그의 후배인 엄영수는 그의 교육을 통해 개그맨이 된 후배가 40명이 넘는다고 언급했다. 이처럼 그의 역할은 단순히 개인적인 능력에 그치지 않고, 한국 코미디계가 재능 있는 신인을 발굴하고 육성하는 '비공식적 시스템'의 중추였다는 점이다. 그는 예원예술대학교의 코미디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조세호, 김신영 등을 제자로 키워내기도 했으며, 이는 그의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멘토링이 업계의 인프라를 구축하는 데 기여했음을 증명한다.
이문세, 주병진부터 한채영까지: 분야를 넘나든 혜안
전유성 씨의 인재를 알아보는 혜안은 개그계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는 1970년대에 이미 이문세와 주병진의 가능성을 알아보고 연예계로 이끌었으며, 가수 김현식에게 가수의 길을 권유한 것도 그였다. 특히 배우 한채영을 시카고에서 놀러 와 인사동 자신의 가게에 손님으로 왔을 때 알아보고 데뷔시킨 일화는 그의 예리한 안목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이처럼 그의 인재 발굴 능력이 다양한 분야를 아울렀다는 것은 단순히 개그 재능을 넘어 대중문화의 큰 흐름을 읽는 깊은 통찰력을 가졌음을 의미한다. 그가 발견한 인물들의 공통점은 당시 주류와는 다른 독특한 개성과 끼를 가졌다는 점이다. 이는 전유성 자신이 사회의 관습과 틀에 박히지 않은 비주류적이고 기인적인 삶을 살았기 때문에, 기존의 관점으로는 보이지 않는 새로운 재능을 더 잘 알아볼 수 있었다고 해석된다. 그의 삶의 방식 자체가 새로운 가치를 발견하는 능력이었던 셈이다.
제4장: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살다
진미령과의 사실혼, 독신 생활
전유성 씨의 개인사는 그의 독특한 삶의 철학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는 가수 진미령과 15년 넘게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으나, 혼인신고는 하지 않았다. 이들은 함께 성남시 복정동에 '아하! 전유성'이라는 퓨전 레스토랑을 운영하며 두 사람의 창의성을 발휘하기도 했다. 이후 두 사람은 헤어져 그는 독신 생활을 했다. 그의 비전통적인 가족 형태는 공인으로서도 파격적인 행보였다. 하지만 이는 그의 삶의 철학인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이라는 표현과 완벽하게 연결된다. 그는 사회가 요구하는 관습적인 삶의 방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관계를 맺고 삶을 설계했다.
아이디어가 샘솟던 기인
그의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일상에서도 끊임없이 샘솟았다. 그는 방송가 최고의 다독가로 유명했으며, '기인' 소리를 듣는 소설가 이외수와도 깊은 친분을 유지했다.10 이처럼 남다른 시각을 가진 이들과의 교류와 방대한 독서량은 그의 창의성 원천이었다. 그의 독특한 성격은 사업 아이템에서도 드러난다. 경상북도 청도에서 운영했던 카페 '니가 쏘다쩨'는 특이하게도 메뉴가 피자와 짬뽕, 단 두 가지뿐이었다. 이는 기존의 상식을 파괴하는 그의 유머 감각과 실험 정신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다.
그의 개인사와 공적인 자아가 서로 분리되지 않고 깊게 연결되어 있다는 점 또한 흥미롭다. 전북 남원에서 운영했던 '카페 제비'는 그의 유일한 혈육인 딸 전제비 씨의 이름을 딴 것이었다. 이는 그의 기인적이고 독특한 면모가 단순히 대외적인 캐릭터가 아니라, 가족에 대한 따뜻한 애정과 깊은 내면에서 비롯된 것임을 보여주는 따뜻한 증거다. 그는 스스로의 삶을 통해 독창성이란 정해진 답을 따르지 않고 끊임없이 질문하고 시도하는 태도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몸소 증명해 보였다.
결론 및 유산
웃음 너머에 남긴 전유성의 정신
전유성 씨는 단순히 대중을 웃기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웃음의 본질을 탐구하고, 그 웃음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을 발굴하며, 코미디라는 예술 장르의 위상을 한 단계 끌어올린 선구자였다. 그의 삶의 방식은 '정답'이 정해진 세상 속에서 '지구에 처음 온 사람처럼' 끊임없이 질문하고 시도하며 창의성을 발휘하는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보여주었다. 그의 독특한 사업 아이템, 비전통적인 관계, 그리고 다방면에 걸친 활동은 그가 삶 자체를 하나의 거대한 창작 행위로 여겼음을 시사한다.
한국 코미디의 초석이 되다
'개그맨'이라는 단어를 창시하고, 후배들의 든든한 멘토가 되었으며, '개그콘서트'와 같은 공개 코미디의 기틀을 다진 그의 업적은 한국 코미디의 역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초석이다. 그는 코미디를 단순한 오락에서 문화예술로 격상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비록 그의 육신은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남긴 웃음과 실험 정신, 그리고 후배들에게 심어준 가르침은 앞으로도 한국 코미디계에 오랫동안 살아 숨 쉴 것이다. 그의 삶은 모든 창작자에게 큰 울림을 주며, 진정한 독창성은 세상의 관습을 따르기보다는 자기 자신의 길을 개척하는 용기에서 비롯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