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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연차의 히로뽕과 채동욱검사 2

알쓸꼬꼬무 0301
박연차, 김택, 이정식 등 재벌2세들과 같이 채동욱 검사에 의해 히로뽕 투약혐의로 구속된 여성연예인은 전세영, 김영임, 김경옥, 이순규 등이었다.
전세영은 주간경향 등 잡지모델, 해태제과 모델 등으로 활동하다, 임권택 감독 눈에 띄어 다방 매춘여성들의 삶을 그린 영화 <티켓>으로 데뷔했다.
김지미, 이혜영 등이 주연한 <티켓>에서 막내 티켓다방녀 역으로 출연해 대종상 신인여우상을 거머쥐고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뛰어난 미모와 연기력으로 영화 <지옥의링>을 비롯 CF모델로도 큰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1989년 강남구 도곡동에서 (음주로 의심되는) 뺑소니 사고를 내며 불길한 징조를 보였다.
이랬던 국민요정 그녀가
"히로뽕 + 매춘 + 집단난교" 라는 3단콤보를 동시 시전하며,
이런 모습으로 나타났으니 국민들은 그야말로 '충공깽'에 빠진다.
충공깽="충격과 공포다 그지 깽깽이들아" 줄임말
나중에 알고보니 뺑소니 사고 당시에 '술'이 아니라 '뽕' 때문에 사고를 내고 도망쳤던 것.
출소 후에도 영화 출연을 완전히 접은 것은 아니지만 온전한 배역이 들어올리도 없거니와 추락한 이미지로 나락으로 떨어졌는데,
6년 뒤인 갑자기 1996년 작곡가 김형석과 결혼소식이 전해진다.
작곡가 김형석은 1966년 전남 해남에서 태어나 광주 인성고-한양대 음대 작곡가를 나왔다.
클래식 작곡가였지만, 대학 4년 선배인 유재하의 1집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아 대중음악의 길로 들어섰다고 한다.
'히트곡 제조기'로 저작료가 많이 나올때는 한달에 1억원을 넘게 받기도 했다는 김형석은
영화 엽기적인 그녀 OST로 히트친 신승훈의 "I Believe"를 비롯해,
나윤권의 '나였으면'
김건모 "아름다운 이별", 인순이 "이별연습, 샹들리제",
변진섭 "그대 내게 다시",
솔리드 "이 밤의 끝을 잡고",
박진영 "너의 뒤에서",
임창정 "Love Affair, 슬픈 혼잣말, 늑대와함께춤을", 박정현 "편지할게요",
베이비복스 "야야야, Get Up, Killer"
성시경 - 내게 오는 길, 처음처럼

보보 - "늦은 후회"
박용하 "처음 그날처럼"(드라마 올인OST)
유승준 "나나나"
손성훈 "내가 선택한 길" 폴리스 OST
드라마 <폴리스>로 떡밥에 낚인 고등학생들이 경찰대에 불나방 같이 모여든다.
엄정화 "하늘만 허락한 사랑", 조성모 "내 것이라면" 등등등 정말 이루 헤아릴 수 없는 히트들을 작곡했다.
김형석의 뚜렷한 정치색은 온 국민이 다 알 정도다. 그래서
민주통합당 로고송 "사람이 웃는다"을 비롯 더불어민주당 당가 "더더더 송" 등을 작곡했다.
아이러니 한 것은
이마트 30주년 송 을 비롯해 SSG 랜더스 응원가 " We are the Landers!" 등도 작곡했다는 것.
정확히는 편곡이다. 이마트송은 1949년 초연된 뮤지컬 & 1958년 개봉 영화 남태평양(South Pacific)의 "Happy Talk"가 원곡이다. 이 곡은 뮤지컬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을 만든 리처드 로저스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 콤비가 만든 곡이다.
정용진은 앞에서는 "멸콩" 하더니 뒤에서는 "콩"에게 밥을 주고 있었던 것.
아무튼
김형석-전세영 커플은 결혼 7년만인 2003년 이혼한다.
김형석은 이후 배우 서진호와 재혼했다.
여자 연예인들을 재력가들과 연결해준 이는 이순희라는 (의상실을 하지만 돈은 매춘알선으로 훨씬 많이 번) 마담뚜 였다. 검찰에 압수된 장부에서 관련자 이름이 300명 넘게 나왔다고 한다.
아부지가 열심히 (일자표) 연탄 팔아서 재벌까지 된 장자그룹 2세 이정식은 휠체어를 타고 다니는 장애인이었다.
연극배우였던 나혜령이 청혼을 거절하자 휠체어를 탄채 옥상에서 뛰어내리겠다며 자살소동까지 벌인 끝에 사랑의 결실을 맺었는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영화쪽으로 취향을 바꾸고 영화배우들과 사랑을 나누었다. 그것도 단체로 뽕맞고
이정식은 불굴의 의지로 장애를 딛고 일어서 동경 신주쿠 호텔, 해운대 조선비치 호텔과 글로리 콘도 등을 종횡무진했다.
장애를 극복하고 전국민들에게 회사이름을 널리 떨치고 다니느라 바쁜 남편을 대신해 연극배우 출신이었던 부인(故나혜령)까지 대신 나서 경영을 맡았지만, 파국을 막지 못했다. 한국 여성경영자총연합회 회장도 지냈다. (고건 총리와 함께 찍은 사진)
11년전인 1979년에는 형 이인재 일자표연탄 대표가 거액의 도박을 한 혐의로 구속됐었다.
연탄재벌 형제는 '막장'에서 탄을 캔게 아니라 대국민 '막장극'을 찍었다.
막장 Blind end/Dead end 은 탄광의 맨 끝부분이나 그곳에서 일하는 인부를 칭하는 말이다.
일반적 갱도와 달리 버팀목이 세워지지 않은 좁은 곳으로 붕괴위험이 높은 곳인데다가 산소가 부족하여, 광부가 사망할 위험이 매우 높다. 그래서, 극한의 경제적 어려움에 몰려 여기서 일하지 않고서는 생계를 꾸릴 수 없는 상황을 '막장인생'이라 부르게 되었다가, 완전히 말아먹은 일이나 인생을 뜻하는 단어로 변질되었다.
막장 광부는 높은 노동강도와 사망사고 위험 때문에 상당한 고임금을 받았다. 과거 조선호황기 거제도 처럼 탄광촌 주변 상권은 서울 유흥가보다 호황이었다. 7-80년대 신입 광부들 임금이 대기업 과장 수준이었으니, 막장 광부들은 거의 임원급 월급을 받았다고 보면된다.
2009년에는 대한석탄공사 사장이 '막장'이라는 말을 비하의 의미로 쓰지 않으면 좋겠다는 항의글을 언론사에 돌린 적이 있다.
한편 당시 큰 인기를 끌었던 시트콤 <TV 손자병법>의 자재과 여직원 '도회지'가 갑자기 외국에 전출을 간다.
도회지 역을 맡았던 탤런트 임옥경이 갑자기 구속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다음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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