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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짜총각과 최은희 납북사건2


240130 알쓸꼬꼬무1
오디오버전 (축약되어 있어 자세한 내용은 글 참조)
미장센의 대가, 한국 영화의 대부라 불리었던 신상옥은 1960년 전용 촬영소, 전속 배우와 감독을 거느린 한국 최초의 기업형 영화제작사 '신필름'을 설립했다.
최은희, 남궁원, 신영균, 태현실 등 당대의 최고 스타들을 전속으로 거느리고 6~70년대 웬만한 히트작은 거의 다 그의 손에서 태어났다고 보면 된다. 사랑방손님과어머니, 연산군, 벙어리 삼룡, 빨간마후라 등
별들의고향, 어우동, 외인구단, 명자아끼꼬쏘냐 등을 만든 이장호도 신필름 조감독 출신이다.
이장호 감독 여동생 남편, 즉 매제가 유인태 의원이다.
하지만 둘의 정치적 견해는 정반대인듯하다. 이장호는 최근 박근혜 탄핵의 부당함을 알리는 다큐멘터리를 준비중인데 최근에는 윤석열 정부까지 다루는 범위를 넓혔다고 한다.
당시 동양최대 규모 '안양 촬영소'를 인수하고, 영화예술학교도 설립했다. 지금의 안양 석수현대아파트 자리에 있었다.
조금 복잡한 사연이 있지만, 지금의 안양예고가 신상옥의 영화예술학교가 그 후신이라고 보면 된다.
김민종, 신은경, 룰라 김지현, 비(본명 정지훈), 남희석, 박나래, 오연수 등 수 많은 스타를 배출했다.
신상옥은 53년 최은희와 결혼했는데, 아이가 들어서지않아 친척조카 둘을 입양해 키웠다.
그런데, 여배우 오수미와 바람이 나서 아이 둘을 낳았다.
불임의 원죄를 안고 살던 최은희는 첫째까지는 어떻게 참아보려고 했는데, 둘째까지 낳자 이혼을 요구했다고 한다.
안양영화예술학교
그러나 둘의 작품 협업과 비즈니스 관계까지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이혼 후에도 최은희는 안양영화예술학교의 교장 등을 맡아 함께 영화제작 활동도 했다.
신상옥은 지나친 검열과 영화계 지원약속을 잘 지키지 않는 박정희 정권에 불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다가 '전태일 열사 이야기를 영화화 하겠다'고 하자 박정희는 자금줄을 아예 끊어버린다.
신상옥은 반항한다. 75년 '장미와들개'의 사전 검열에서 짤랐던 오수미의 상반신 노출, 키스장면을 예고편에 상영해 버린 것. '제작사 등록말소'란 치명적 육모방망이를 얻어 맞는다.
이런 배경으로 자금난에 봉착한 최은희에게 솔깃한 제안이 들어온다.
홍콩계 자본이 투자를 하겠다며 최은희를 홍콩으로 불렀던 것. 그러나 그것은 알고보니 북괴의 공작.
최은희는 마취약을 맞고 기절해 공작선에 태워졌고 깨어나서도 북괴를 사칭한 중앙정보부의 소행인줄 알았는데, '진짜 북괴'란걸 알고 다시 기절해버렸다고 한다.
갑자기 이혼한 최은희가 홍콩에서 실종되자 신상옥이 최은희를 살해 암매장 했다는 등의 온갖 소문이 다 돌았다.
신상옥은 지인이던 김형욱 전 중앙정보부장에게 SOS를 쳤는데, "북괴소행 같다"는 얘기를 듣고 기겁했다.
결국 최은희를 직접 찾겠다고 홍콩에 갔다가 본인도 납치를 당한다.
신상옥이 최은희를 바로 만날 수 있었던건 아니다. 탈출을 시도하다 몇 년을 수용소에 갖혀서 세뇌교육을 받았고,
'다시는 탈출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하자 5년만에 김정일과 함께 최은희를 조우할 수 있었다고 한다.
영화광 김정일의 엽기적 영화 사랑의 방식이었다.
둘은 그렇게, 북한에서 8년을 살며 불가사리, 소금 같은 북한산 영화를 만들었다.
1986년 오스트리아에서 극적으로 미국대사관으로 탈출하여, 납북 8년만에 다시 고국의 품으로 돌아왔다.
한편 오수미는 73년 신성일과 함께 찍은 '이별'로 스타가 됐지만, 그와 사랑에 빠져버린다.
신바람 두명 때문에, 최은희, 엄앵란 같은 당대 최고 여배우들도 가슴을 두드려야 했다. MBN 동치미가 큰 덕을 봤다.
신성일 본명은 강신영이었다. 법에따라 본명으로 총선에 출마했는데 유권자들이 저 사람이 그 사람인지 몰라, 물론 본인의 주장이다. 표를 안주자 아예 이름을 강신성일로 개명해 3수끝에 당선된다.
지금은 자유총연맹 총재가 된 강석호 의원이 신성일의 조카다. 최근 정부로부터 수십억의 지원금을 받는 관변단체 자유총연맹 정관에서 '정치적 중립'을 삭제하고, 유튜브에 나와 "내년엔 큰 뭐 그게 안 있겠나. 우파가 많은 지분을 확보해야만 전체가 바로 돌아간다"고 재출마를 암시해 구설에 올랐다.
신상옥이 한국에 돌아와서 다시 처음 만든 작품이 대한항공 858편 폭파사건을 다룬 '마유미'였다. 무명이었던 김서라가 마유미 역할로 유명해졌다.
조악한 특수효과와 어설픈 연출로 욕을 먹은 신상옥은 이후 미국으로 가서는 '닌자키드' 라는 어린이용 영화를 제작하기도 했지만 북한에 '감'을 놔두고 온듯 이후 작품들이 인기를 끌지 못했다.
남편이 납북된 사이 오수미는 아이둘을 홀로 키우다, 유명 사진작가 김중만과 재혼하지만, 또 이혼한다.
이 과정에서 오수미의 동생이자 인기모델이었던 윤영실이 실종된다. 감쪽같이 사라져, 아직도 그 소재를 모른다.
오수미 동생이 왜 윤영실이라는 질문이 있는데, 남궁원 아들은 홍정욱이고, 김용건 아들은 하정우, 김옥빈 동생은 채서진, 김태희 동생은 이완이다. 홍경일, 김성훈, 김형수. - 오수미의 본명은 윤영희다.
오수미는 이 과정에서 사회유력 인사 내지 그 자제들과 함께 히로뽕에 손을 댔다. 김부선과 함께.
결국 김정일이 최은희를 납치하는 바람에, 이 모든 일이 벌어지고, 김부선이 총각 변호사를 만나게 된 셈.
89년 여자연예인들과 히로뽕을 맞고 난교를 벌이다 구속된 박연차 역시 그때 그 일이 없었으면 '논두렁 시계' 니 '허드슨 강가 콘도' 따위는 없었을지 모른다. 박지만의 히로뽕 사건 수사 검사였던 조응천까지해서, 민주당의 희노애락의 출발점에는 '뽕'이 있었다.
김부선이 86년 히로뽕으로 구속됐을때 검찰에 같이 적발된 이가 있었으니 바로 가수 '채은옥'이다.
젊은 세대들은 그러나 "조용히 비가 내리네 추억을 말해주듯이" 로 시작하는 '빗물'은 안다.
영화 '수상한 그녀'에서 심은경이 부르며 다시금 히트를 쳤다.
채은옥은 최고의 가수로 칭송받았지만, 77년에도 대마초 흡연이 적발돼 활동정지를 먹었다가 해금 됐는데, 또 히로뽕에 손을 대는 바람에 이후 20년 가까이 방송에 나오지 못했다. 그래서 한동안은 줄창 온리 노래방에서만 히트곡 신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