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님 시간은 세설처럼 흔적을 남기곤 했다. 언제나 그랬다. 돌아본 자리는 언제고 폐허일 때가 잦았지만, 그 폐허조차 제 손안의 것이라 울음을 뭉개고 앞으로 걸었던 기억이 무수했다. 세월은 그에게 나이테를 안기고 그는 세상에게, 혹은 사람에게 어떤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그가 원하는가 원하지 않는가와는 아주 별개로. 그러나 이 세상에는 기어코 끌어안아 남긴 흔적마저도 훌훌 벗어놓고 떠날 것 같은 사람도 몇쯤은 존재하는 법이다. 고백하겠다. 세리자와 카츠야는 그것이 두려웠다. 어떤 이름이 있다. 눈을 감아도 떠올릴 수 있는 이름이다. 어떤, 희고 창백한 인영은 바람이 불면 연기가 되고 세설이 되고 꽃잎이 되어서 저 멀리로 사라졌다. 세상이 제 옷자락을 붙들고 이곳에 남으라고 애원하는 일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처럼. 저 멀리에 시선을 둔 채로 머리카락 끝부터 사그라드는 것이다. 어느 전래동화 속 나무꾼은 떠나갈 존재를 붙잡으려 날개옷을 훔쳤다가 결국에는 벌을 받아 하늘만을 그리워하는 수탉이 되었다고 했지. 선녀가 있는 곳은 하늘이라, 죄를 지은 나무꾼은 옷자락 한 겹 손에 쥐지 못하고 하늘만을 그리워하게 되었다고 하는데, 당신이 떠나면 저는 어느 곳을 향해 그리워하면 좋을까. 세리자와 카츠야는 손을 뻗어 선녀의 날개옷을 붙드는 상상을 했다. 아, 차라리 벼락이 떨어지거나 지엄한 신의 손가락질 아래 머리라도 숙일 수 있으면 좋으련만. 당신은 어디서 왔는지 모를 채 왔으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고 사라질 것이다. 그는 눈을 떴다. 눈 밑이 축축했다. 차마 구겨버리지도 못하고 쌓인 편지들이 보였다. 꼭 어딘가 한 구절씩 말을 절던 편지 몇 장 위로 눈물 자국이 남은 것이 보였다. 부러져버린 펜 몇 자루가 함께. 그러고도 당신 이름을 구길 수 없어 두 음절짜리 이름만은 어느 편지고 단정했다. 세리자와가 뺨에 묻은 물기를 거칠게 닦아내고는 정자로 책상 앞에 앉았다. 완성해야 할 미련이 있었다. / 이렇게나 가까이 있는 당신을 저는 아직도 자주 떠올립니다. 제 눈꺼풀 뒤의 당신은 언제고 두 발을 허공에 둔 채 눈을 감고 있습니다. 사실은 정말로 두 다리로 생애를 지탱하지 못한 채 허우적거리는 사람은 저일지도 모르겠습니다마는. 무구하지 못한 삶을 살았습니다. 저는 눈앞의 구원만 있다면 이 세계 따위는 다 타들어 가도 좋으리라고 생각했던 시절이 있고, 당신에게는 사람의 몸으로 신으로 추앙받았던 시절이 있습니다. 그래서일까요, 가끔은 까닭 모를 동질감을 느끼다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생각이 웃어버리고야 맙니다. 당신은 저와 같지 않으리라는 걸 아주 오래 전의 제가 깨우쳐 주는 것처럼요. 저는 지나치게 강한 이능력 때문에, 당신은 당신을 신령으로 추앙하던 무수한 이들 탓에 오롯 인간이었던 세월보다는 도구나 어떤 존재에 가까웠을 것을 압니다. …어쩌면 그런 삶이 우리에게는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는 것을요. 최근 다니고 있는 학교에서는 제가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칩니다. 배워보지 못했던 것들.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던 것들. 인생에서 일고의 고민도 필요 없었던 것들을 생각하게 하고 삶 속에서 유수처럼 흘려보냈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합니다. 이런 삶이 마냥 즐겁기만 하다고 물으면 아니라고 대답하겠습니다. 이전 흘러가던 삶과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안에 꽈리를 틀고 앉은 어떤, 생각지 못했던 것들이 저를 찌를 때가 많습니다. 건물을 부수고 인간임을 잊었던 날들. 수치를 모르는 날들이었습니다. 누군가 배움은 삶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라고 했던 말이 기억납니다. 제 배움은 제 과거의 해상도를 높이는데, 그 과거가 아름답기만 하지는 않은 탓에 고개를 돌려 도망가고 싶을 때가 여럿입니다. 그래도요, 고백 하나만 해도 되겠습니까. 이런 생애를 허우적거리며 휘청거리다가 기어코 넘어져 꼴사납게 구를 때에도, 이전보다는 낫더군요. 사람이 사람으로 살아가는 삯에 대해 이제 와 고민하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마는, 비틀거리면서도 지금까지는 바닥 한 번 제 다리로 지탱해 보지 않았음을 깨닫는 것만 같은 기분입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이 땅에 발을 붙이고 사는 일이 가끔은 버겁지는 않습니까. 비틀거리고, 꺼꾸러지는 것 같고. 이따금은 지구가 공전하는 궤도에 맞춰 빙글빙글 돌다가 멀미가 날 것도 같지 는 않습니까. 제 이야기입니다. 당신도 이따금은 그렇게 살지 않을까 해서.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은, 저는 언제고 이 자리에 있으리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점심때는 빵을 뜯어 비둘기들의 모이로 던져줬습니다. 내일은 꽃 한 다발을 사들고 영등등 사무소로 가볼까 합니다. 햇살이 좋은 날에는 땅을 디디고 걸어가 호수 구경을 하고, 쓸모없는 잡담을 나누고, 이유 없는 태만을 조금씩 깨물어 먹으며 나무 그늘 아래에 멎어있고. 그렇게 당신이 신이 아니고, 제가 어떤 재앙이 아니었던 것처럼. 그렇게 할까요, 우리. 당신이 이 세상에서 아무것도 남기지 않겠다기에 저는 당신에게 이 세상을 남겨볼까 합니다. 내일의 햇살은 따스할 모양입니다. 당분간은 비 소식이 없다고 뉴스에서 떠드는 것을 들었습니다. 내일은 학교가 쉬는 날이군요. 꽃을 들고 가면 시간을 내주실까요. 당신에게 안기거든 그게 이 세상에 박편 정도는 될까요. 소리 내 묻지는 않겠습니다. 그저 눌러 담은 바람입니다. 오늘은 달빛이 분분합니다. 하니 오늘 밤 머리맡에는 좋은 기억만 앉았다 가길 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