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의 품, 겨울에 머물다 1

고요의 품, 겨울에 머물다

​가을의 끝자락에서 바람의 인사를 전했던 것이 엊그제 같은데, 어느새 공기는 투명하게 얼어붙어 세상의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있습니다. 잎을 다 떨구고 빈 가지로 선 나무들을 보며, 이제는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거두어 내 안의 가장 깊은 방에 불을 밝혀야 할 시간임을 깨닫습니다.

​저에게 겨울은 단순히 춥고 긴 계절이 아닙니다. 그것은 치열했던 한 해의 성취와 상처를 눈 아래 묻어두고, 오직 ‘나’라는 본질과 마주하는 정직한 멈춤의 시간입니다.

​이 시들은 차가운 유리창에 입김을 불어 만든 작은 구멍으로 세상을 내다보듯 쓴, 저의 내밀한 고백들입니다.
홀로 눈길을 걸으며 내 안의 아이와 나누었던 대화들, 그리고 얼어붙은 대지 아래서 조용히 숨 쉬는 생명의 약속들을 문장으로 옮겼습니다.

​삶의 겨울을 통과하고 있는 당신에게 이 글들을 건넵니다.
이 하얀 정적 속에서 당신과 연결되어 있음을 느낍니다.
추운 계절, 제 마음 한 자락에 기꺼이 머물러 주셔서 감사합니다.

​2026년 겨울,
하얀 정적이 내려앉은 창가에서
Līlā (लीला) 드림

첫눈의 은유
​

가을이 두고 간 빈 가지 위로
소리 없이 내려앉는 하얀 침묵
세상의 모든 채색을 지우며
겨울은 그렇게 낮은 목소리로 옵니다

​어제까지의 발자국을 덮고
울퉁불퉁했던 마음의 모서리를
부드러운 곡선으로 다듬어주는 손길
​아무도 걷지 않은 눈길 위에
가만히 나의 이름을 써 봅니다

지워질 것을 알면서도 쓰는 마음은
상처보다 깊은 곳에 숨겨두었던
나의 가장 깨끗한 고백입니다

​차갑게 내려와 온기로 녹아드는 눈처럼
나의 시린 기억들도 누군가의 가슴속에서
투명한 물방울로 피어나기를

​
얼음 아래 흐르는 노래

​강물은 멈춰 선 듯 보였습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 몸을 가두고
단단한 유리 갑옷을 입은 채
숨을 죽이고 있는 줄만 알았습니다

​하지만 가만히 귀를 기울이면
두꺼운 얼음장 그 밑바닥에서
끊임없이 자갈을 굴리며 가는
낮고 묵직한 물소리가 들립니다

​멈춘 것이 아니라 견디는 것이라고
얼어붙은 것이 아니라 깊어지는 중이라고
강물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자신만의 속도로 겨울을 건너고 있었습니다
​

나의 삶에도 혹독한 정적이 찾아올 때
내 안의 가장 깊은 중심만은
봄을 향해 멈추지 않고 흐르고 있음을
이제는 믿기로 했습니다

성에가 그린 지도
​

밤새 창문에 서린 성에를 봅니다
어둠이 가장 짙은 틈을 타
나도 모르는 사이 창문에 피어난
차갑고도 눈부신 유리 꽃들
​

날카로운 바람이 할퀴고 간 자리에
이토록 섬세한 무늬가 남을 줄은 몰랐습니다
나의 아픔도 멀리서 보면
저토록 아름다운 결정체였을까요
​

손가락 끝으로 성에를 녹여
작은 구멍 하나를 만듭니다
그 틈으로 보이는 차가운 세상이
어쩐지 어제보다 선명해 보입니다
​

얼어붙어야만 비로소 보이는 것들
내 안의 슬픔이 딱딱하게 굳어 결정을 이룰 때
나는 비로소 내가 가야 할
투명한 길 하나를 발견합니다
​

외투 깃을 올리며
​

겨울은 질문을 던지는 계절입니다
가진 것이 무엇인지 묻지 않고
무엇을 남겨두었는지 묻습니다

​몰아치는 칼바람 앞에서
나는 서둘러 외투 깃을 올리고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찌릅니다
남에게 보여주기 위해 넓혔던 어깨를 접고
오로지 나를 지키기 위해 작아지는 시간
​

작아질수록 체온은 선명해집니다
타인의 시선이 닿지 않는 외투 안쪽
심장과 가장 가까운 그곳에서
나만의 온기가 소중하게 고여 있습니다
​

세상이 차가워질수록
내가 나를 안아주어야 한다는 것을
깃을 세운 어깨의 무게로 깨닫습니다
나는 오늘, 가장 낮은 자세로
나를 가장 뜨겁게 사랑하고 있습니다

겨울밤의 도서관

​세상의 소음이 눈 아래 묻히고
밤은 가장 두꺼운 책장을 넘기듯
조용히 다가와 곁에 앉습니다
​

불 꺼진 거실, 창밖의 가로등 빛이
읽다 만 삶의 여백 위에 내려앉을 때
나는 비로소 문장과 문장 사이
숨겨진 나의 진심을 읽어 내려갑니다
​

화려한 수식어는 낙엽처럼 져버렸고
날카로운 형용사들은 성에가 되어 굳었지만
오직 '나'라는 주어 하나만이
시린 어둠 속에서 뚜렷하게 빛납니다
​

아무도 빌려가지 않은 이 고요를
오롯이 나만의 것으로 소유하는 밤
겨울은 나에게 가장 긴 문장을 선물하며
스스로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을 용기를 줍니다
​

​포근한 섬
​

겨울밤, 두툼한 이불 속으로
차가운 몸을 가만히 밀어 넣습니다.
바깥세상의 바람은 창문을 두드리지만
이불 속은 나만을 위해 준비된
작고 포근한 섬이 됩니다.

​내 몸의 온기가 이불결에 스며들어
차가웠던 공간을 조금씩 데워가는 시간.
행복은 멀리 있는 거창한 빛이 아니라
내가 나를 안아줄 때 생겨나는
이 소박한 온기임을 깨닫습니다

​서두르지 않아도 밤은 깊어가고
이불 속의 온도는 내 마음만큼 깊어집니다.
낮 동안 팽팽하게 당겨졌던 마음의 줄을
비로소 느슨하게 놓아주는 정적의 시간.
​
세상이 아무리 차갑게 식어 있어도
나를 지켜주는 이 든든한 품 하나로
나는 오늘 밤, 가장 평온한 꿈을 꿉니다.

나무가 들려주는 비밀
​

잎사귀들이 소풍을 떠난 뒤에야
나무는 비로소 제 몸속에 숨겨둔
하늘로 가는 길을 보여줍니다
​
어느 가지가 햇살을 더 좋아했는지,
어느 줄기가 모진 바람을 묵묵히 견뎌냈는지
숨김없이 드러난 그 가녀린 선들이
겨울 하늘 위에 수묵화처럼 번집니다
​
비어 있어서 쓸쓸해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나무는 가장 가벼운 몸으로
가장 깊은 꿈을 꾸고 있는 중입니다
화려한 옷을 벗어던지고서야 비로소
자신의 진짜 모습을 사랑하게 된 것이지요
​
우리도 가끔은 이토록 홀가분해져서
남들에게 보여주려 애썼던 모습 대신
투명하게 비치는 나의 진심을
가만히 마주 보았으면 좋겠습니다
​
가장 앙상해진 순간에야 비로소
우리는 서로의 가장 깊은 품을
가감 없이 확인할 수 있으니까요

​겨울 바다의 정적

 
​여름내 소란하던 파도 소리는
차가운 수평선 아래로 가라앉았습니다
모래사장 위를 걷는 나의 발자국만이
유일한 대화가 되는 쓸쓸한 해변
​
바다는 얼어붙지 않으면서도
얼음보다 차가운 침묵으로 나를 맞이합니다
밀려왔다 밀려가는 파도의 끝자락은
붙잡으려 애쓰던 모든 욕망들이
사실은 거품이었음을 무심히 보여줍니다
​
수평선 끝을 바라보며
내 안의 묵은 감정들을 파도에 흘려보냅니다
돌아올 때는 더 맑은 소금기로 돌아오기를,
얼어붙은 마음의 앙금들을
저 깊은 수심 속에서 녹여내기를
​
차가운 바닷바람이 뺨을 스치지만
이상하게도 마음속에는
비어있음이 주는 평온한 온기가 차오릅니다
​

겨울 새의 날갯짓
​

모두가 따뜻한 곳을 찾아 떠날 때
홀로 시린 공기를 가르며
작은 날개를 파닥이는 새 한 마리

​먹이 없는 들판과 얼어붙은 나뭇가지 사이
그 작은 몸짓이 애처로워 보이지만
새는 한 번도 자신의 길을
의심해 본 적 없는 듯 당당합니다
​

찬 바람을 피하기보다
그 바람의 결을 타고 더 높이 오르는 법을
겨울 새는 비행의 몸짓으로 가르쳐줍니다
시련은 부러뜨리기 위해 오는 것이 아니라
나의 날개가 얼마나 단단한지
시험하기 위해 오는 것임을

​나의 삶도 가끔은 이토록 시리지만
겨울 새처럼 쉼 없이 날갯짓하다 보면
어느덧 차가운 공기마저
나를 떠받쳐주는 부드러운 힘이 되겠지요

​
별빛의 위로

​공기가 차가워질수록
밤하늘의 별들은 더욱 선명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냅니다
여름날 습기에 가려졌던 희미한 빛들이
겨울의 정적 속에서 비로소 고개를 듭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깊은 밤
나 홀로 깨어 누군가를 그리워할 때
별들은 수천 년 전부터 간직해온
오래된 위로를 빛의 속도로 건넵니다
 
​시린 밤은 슬픔을 키우는 시간이 아니라
내 안에 숨겨져 있던 작은 빛들을
하나둘 발견해가는 시간입니다

오늘 밤, 내 마음의 가장 어두운 방에도
별빛 한 조각 스며들어
고요한 꿈 하나 피워내기를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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