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바람이 돌아오는 계절 02

봄날의 편지

잘 지내고 있나요
여전히 시린 방 안에서
외투 깃을 올리고 있지는 않은지
​
나의 계절에도
절대 끝날 것 같지 않던
긴 겨울이 있었습니다
​
차가운 유리창에 비친
작고 초라한 얼굴을 안아주며
가장 어두운 밤을
겨우 건너온 시간들
​
그 겨울을 통과해 준
나에게, 그리고 당신에게
이 봄날을 빌려
작은 편지를 띄웁니다
​
지나온 아픔들이
언 땅 아래 묻어둔
뿌리가 되어
우리를 받쳐주고 있다고
​
이제는
돌아온 따스함을
가만히 받아들여도 괜찮다고

벚꽃 아래서

그토록 치열하게
숨겨왔던 마음들이었나 봅니다
​
어느 날 아침
하얗게 터져 나와
온 하늘을 가득 채운
고백들
​
꽃잎이 바람을 타고
어깨 위로 내려앉을 때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서로의 어둠을 알아채던
그 눈빛 하나로
이미 충분했기 때문입니다
​
봄은 그렇게
우리라는 이름 위에
가장 화사하게 피어나고 있었습니다

봄은 쉽게 오지 않는다

눈이 녹았다고 해서
곧바로 꽃이 피는 것은
아니었다
​
얼어붙었던 대지가
숨을 고르는 시간
​
차가운 공기와 따스한 햇살 사이
수없이 밀고 당기는
기다림의 나날들
​
나의 봄 역시
쉽게 오지 않았다
​
수없이 흔들리고
넘어지며 걸어온 길
​
그 정적을 견뎌냈기에
오늘 내 앞에 펼쳐진 이 봄날이
더없이 눈부신 것이다

뿌리에 대하여

보여줄 것이 없어
초라하다 느꼈던 시절이 있었다
​
아무것도 되지 못한 채
어둠 속에서
두려움에 떨던 밤들
​
잎사귀 하나 없이
맨몸으로 서 있는 나무를 보며
이제야 깨닫는다
​
그 보이지 않던 시간들이
나를 지탱하는
뿌리였다는 것을
​
나무가 흔들려도 부러지지 않는 건
뿌리가 깊기 때문이었다

지난 계절에 쓰는 감사

돌아보니
그리 모질었던 가을바람도
나를 쫓던 겨울의 그림자도
모두 선물이었다
​
내 안의 낡은 것들을
쓸어내라던 바람의 속삭임
​
가장 정직한 내 모습을
마주하라던 그림자의 안부
​
그 차가운 통과가 없었다면
나는 외투를 벗는 용기를
배우지 못했을 것이다
​
바람이 머물다 간 자리마다
고맙다는 인사를
가만히 남겨둔다

다시 피어난다는 것

상처 입은 가지 끝에서
다시 잎이 돋아난다
​
부러지고 꺾인 자국이
흉터로 남아있는데
나무는 새잎을 내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
아픔이 사라진 것이 아니라
그 아픔을 품은 채로
새로운 아름다움을
밀어 올리는 것이다
​
다시 피어난다는 것은
과거를 지우는 일이 아니다
​
상처까지도
나의 일부로 끌어안고
한 걸음
나아가는 일이다

온전한 봄날

오늘은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날
​
그냥 여기 앉아서
바람이 지나가는 것을 보고
햇살이 움직이는 것을 느끼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새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것
​
그것으로 충분한 날
​
오늘 이 하늘 아래
나는 그냥
나이어도 된다
​
그냥 이 봄날 안에
온전히 녹아들어도 된다
​
햇살은 아무에게나
똑같이 내려온다
​
나는 오늘
그 햇살 아래
따뜻해지기로 했다

느린 봄

남들은 이미
활짝 꽃을 피웠다고
세상이 소란스러울 때
​
나는 나만의 그늘 아래 서서
가만히 숨을 고른다
​
조금 늦게 피는 꽃이라 해서
그 향기마저 옅은 것은
아니기에
​
느리게 온 봄이
더 오래 머물다 가듯
나도 나의 속도로
피어날 것이다

빈자리에 피는 꽃

비워진 자리가 없었다면
봄볕이 스며들 틈도
없었을지 모른다
​
낙엽이 진 자리에 새순이 돋고
눈이 녹은 자리에 흙이 드러나듯
​
비워냈기에
비로소 채워지는 것들
​
상처가 머물던 그 자리에
이제는 조그만
꽃 한 송이가 피어난다

다음 계절에게

봄아
​
네가 떠난 자리에
여름이 올 것이다
​
나는 안다
네가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이 따뜻함도
이 꽃들도
이 바람도
곧 지나갈 것이라는 것을
​
그러나 이제는
떠나가는 것이
두렵지 않다
​
가을이 오면 가을을 살고
겨울이 오면 겨울을 살면 된다는 것을
이 봄을 통과하며
배웠다
​
어떤 계절도
나를 끝내지 못한다
​
계절은 다만
흘러갈 뿐이고
나는 그 흐름 안에서
매번 새로워질 뿐이다
​
다음 계절아
어서 와도 좋다
​
나는 이제
두 팔 벌려
너를 맞이할 준비가
되어있다 

         —
​
그리고 당신에게도
이 봄날의 끝에서
작은 인사를 건넵니다
​
긴 겨울을 통과해 준
당신에게
​
흔들리면서도
멈추지 않은
당신에게
​
이 봄이
충분히 따뜻했기를
바랍니다
​
다음 계절도
당신의 것입니다

에필로그

긴 겨울을 보낸 당신에게
이 봄날이 작은 쉼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창가에 앉아 햇살을 받으며 읽는 시 한 편이,
걷다가 문득 멈춰 올려다본 봄 하늘이,
오늘 코끝에 스친 흙냄새 하나가
당신의 굳은 어딘가를
살며시 녹여주기를 소망합니다.

그리고 자신만의 봄을 마주할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입니다.

다음 계절도
당신의 것입니다.

2026년 봄,

바람이 돌아온 자리에서

Līlā (लीला) 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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