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굳어 있던 어깨를 펴고 두 손으로 가만히 그 소리를 잡았다 귓속으로 들어온 바람은 오래전 잊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던 것들을 괜스레 모른 척하며 등을 돌렸던 시간들
바람은 나를 돌아보게 했다
다시, 처음으로
어느 날의 푸른 하늘
어제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어둡고 축축한 생각들 파란색 필터로 세상이 덧입혀진 오후 창문을 열자 와르르 쏟아져 들어온 눈부신 빛 한 줌 끝없이 넓은 저 하늘을 올려다보니 더 이상 마음을 덮었던 먼지투성이 걱정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저 바람에 흩날리는 새하얀 뭉게구름만이 나를 닮아 느릿하게 흘러갈 뿐
구름에게 길을 묻다
높아진 하늘 위로 조각난 구름들이 길 없는 길을 간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함께 흘러가는 무리도 있고 홀로 다른 길로 멀어지는 구름도 있다 나는 멈춰 서서 그들의 여정을 지켜본다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은 멈추는 법이 없다 이정표 하나 없이 그저 바람이 부는 대로 흘러가는 구름을 보며 묻는다 나의 길은 어디에 있나요, 가야 할 방향은 정해져 있나요, 나아가야 할 곳이 정해지지 않았을 때, 그래도 계속 걸어가도 괜찮은가요.
첫 단풍의 고백
가을의 길목에서 너는 홀로 붉게 빛났다 아직 푸른 잎들 사이에서 그렇게 혼자서만 고백하고 있었다
떠나야 할 시간이 마음속에 물드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겠다고 그토록 빛나던 여름을 기꺼이 놓아줄 수 있는 진정한 용기에 대하여 네 작은 어깨 위로 쏟아지던 햇살처럼 가만히 너를 안아주었다 변화의 끝에는 언제나 새로운 아름다움이 기다리고 있다는 너의 다정한 속삭임을 들으며
밤이 들려주는 이야기
도시의 불빛이 모두 잠든 밤 창문을 두드리는 희미한 소리들 바람이 창틀에 앉아 먼 곳에서 가져온 이야기를 혼잣말처럼 들려준다 오늘 하루도 참 애썼구나 혼자 울지 않아도 괜찮다고 너의 어깨는 충분히 따뜻하다고 나는 이불을 끌어당겨 그 이야기를 듣는다 그 어떤 위로보다도 다정하고 깊은 소리를 고요한 밤의 품속에서 나는 가장 나약한 나를 만나 온전히 안아줄 수 있게 된다
새벽 공기의 무게
아직 세상이 어둠 속에 잠들어 있을 때 나는 홀로 창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가 이마를 쓸고 가던 순간 숨을 들이쉬니 아련한 가을의 냄새가 가슴 깊숙이 들어온다 아무도 없는 시간에 나만이 아는 고요함 속에 가만히 나의 무게를 느껴본다 밤의 피로를 씻어내고 새로운 하루를 품을 나의 단단한 어깨 위에 고요한 새벽의 무게가 사뿐히 내려앉는다
도시의 가을
회색빛 빌딩 숲 사이로 보이지 않는 바람이 걷는다 바쁜 발걸음들 위로 가을의 햇살이 쏟아져 내리고
우리는 그저 고개를 숙인 채 걷는다
하지만 때때로 고개를 들었을 때 저 멀리 보이는 투명한 하늘의 푸른빛은 차가운 공기 속에 감춰진 따뜻한 마음처럼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여기, 너의 가을이 온전히 존재하고 있다고
흩날리는 마음
나무는 알고 있었다 가지 끝에 매달려 아슬아슬 흔들리는 마음들을 바람의 손에 맡겨야 한다는 것을 한때는 푸르렀고 한때는 뜨거웠던 기억의 파편들이 차갑게 식어 바닥에 내려앉는 순간 나는 길가에 멈춰 서서 흩어지는 마음들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내 것이라 붙잡았던 모든 것을 이제는 기꺼이 놓아줄 시간 바람은 나에게 속삭인다 텅 빈 가지가 되어도 괜찮다고
혼자 걷는 길
길은 멀고 계절의 끝은 보이지 않는다 가끔은 나를 향한 나의 위로가 필요했다
괜찮아, 조금 느려도 좋아 길을 잃어도 괜찮아
발밑에 밟히는 낙엽 소리마저 나에게만 들려주는 다정한 발걸음처럼 느껴지던 그 외로운 길 위에서
나는 온전히 나를 만났다 어색하고 낯선 나의 모습을 사랑하는 법을 배웠다
가을의 끝에 닿았을 때 나는 더 이상 외롭지 않은 혼자가 되었다
하루를 밀어내는 그림자
해가 짧아질 때마다 내 안의 그림자도 길어집니다 어깨에 기대어 쉬지 않고 길바닥을 따라 끈질기게 붙어오는 어둡고 친숙한 존재 나는 서둘러 걸어 그림자를 벗어나려 했지만 가을의 낮은 햇살은 더욱 선명하게 나의 불안과 나의 슬픔을 세상 앞에 펼쳐 보였습니다 이제 깨닫습니다 그림자는 나를 쫓는 것이 아니라 나의 가장 정직한 모습임을 지는 해 앞에서 나는 고개를 숙여 내 안의 모든 어둠을 다정하게 끌어안았습니다
창문 안의 나, 창문 밖의 나
유리창에 기대어 서면 어둠처럼 희미하게 나의 얼굴이 비친다
고단함이 묻어나는 오늘 하루의 나
그 투명한 경계 너머로 더 높고 깨끗한 하늘이 흐른다
내가 되고 싶었던, 가닿고 싶었던 빛나는 꿈의 풍경들
창문 안의 나는 숨 쉬는 현실에 갇혀 작고 초라한데
창문 밖의 나는 멈추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고 당당하다
유리를 손으로 닦아낸다 경계를 지우고 안과 밖의 나를 하나로 포개어 본다
그 모든 것이 나였음을 따뜻하게 인정해본다
높이의 고독
하늘은 왜 저리도 높고 푸른가 바람 한 점 없는 듯 고요해 보이지만 그 높은 곳에도 말 못 할 깊은 고독이 있을 것 같다 나도 모르는 새 스스로 쌓아 올린 마음의 벽 안에 나를 가두어두고 혼자서만 모든 것을 감당하려 했다
고독을 외면하려 끊임없이 누군가를 찾았고 쉴 틈 없는 소란을 만들었다
하지만 저 하늘처럼 모든 것을 내려놓고 오롯이 혼자가 되었을 때 비로소 듣게 되는 소리가 있다
나의 가장 깊은 곳에서 나를 일으켜 세우는 가장 단단하고 조용한 목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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