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사이의 숨결

읽고, 느끼고, 잠시 멈추다.
모든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모든 상처는 흔적을 남는다』를 읽고..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형태를 바꾸고, 언어를 바꾸고, 얼굴을 바꿀 뿐이다. 상처를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이 책은 상처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저자는 인간의 내면에 남은 다섯 가지 상처 — 거부, 버림, 수치, 배신, 부당함 — 을 이야기한다. 그 상처들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짓는 ‘틀’이 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거부’의 상처에 오래 머물렀다. 타인의 인정이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규정한다고 느꼈던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썼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애씀 속에는 늘 두려움이 있었다. 거부당할까 봐, 잊힐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그 두려움이 바로 내가 키운 상처의 다른 얼굴이었다. 상처는 타인의 행동에서 시작되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내 안에서 완성된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무너진다. 상처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에서 태어난다. 타인의 말보다, 내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상처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이해한다. 부르보는 말한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흔적은 치유의 지도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흔적은 결코 부끄러운 자국이 아니다. 그건 내가 누군가와 관계 맺고, 사랑하고, 실망하고, 다시 일어섰던 시간의 증거다. 흉터가 남는다는 건, 몸이 그만큼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음의 상처도 그렇다. 그 흔적은 내가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자, 다시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의지의 표식이다. 예전에는 상처 없는 나를 꿈꿨다. 아무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 감정의 파도에도 요동치지 않는 평온한 마음. 하지만 그런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완전해지는 건 상처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 상처를 포함한 채로도 자신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나는 더 이상 상처를 지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흔적이 어떤 형태로 남았는지를 바라본다. 그 속에는 오래된 나의 선택,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다. 상처는 나를 불완전하게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나를 더 인간답게 만든다. 그 흔적들 속에서 나는 내가 되어간다. 책을 읽으며 가장 깊게 남은 구절은 이것이었다. “상처는 우리가 사랑했다는 증거이며, 여전히 사랑할 수 있다는 희망이다.” 그 문장을 곱씹으며 생각했다. 상처를 남긴 건 타인이지만, 그 상처를 의미 있게 만드는 건 나의 시선이다. 그 시선이 미움이 될 수도, 용서가 될 수도 있다. 결국 치유란 시선의 이동이다. 상처를 바라보는 각도를 조금 바꾸는 일, 그 작은 움직임이 내 삶의 결을 완전히 달라지게 한다. 나는 아직도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때로는 오래된 감정이 불쑥 올라오고, 어떤 말 한마디에 예전의 상처가 다시 아프기도 한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조차 내 일부라는 것을 안다. 그 감정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건 고통이 아니라, 조용한 이해다. 내가 살아 있다는 감각, 여전히 느끼고 있다는 증거다. 모든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그리고 그 흔적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동안 계속 새겨진다. 그건 고통의 반복이 아니라, 삶의 결을 따라 새겨지는 나의 문신이다. 이제 나는 그 흔적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그 안에는 내가 살아낸 시간과, 다시 사랑할 용기가 함께 있기 때문이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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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을 읽고 2
6. 의존과 집착, 사랑과 혼동하지 않기 건강하지 않은 사랑과 헷갈릴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한 고찰 우리는 종종 의존과 집착을 사랑으로 오해한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너 없으면 못 살아" 같은 대사는 오히려 낭만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사랑의 기술』은 그런 감정들이 진정한 사랑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명확하게 지적한다.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감정이자 태도다. 반면, 의존은 상대 없이는 나 자신이 온전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집착은 사랑이라기보다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다. 프롬은 사랑은 자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집착과 의존은 자유를 없애고, 결국에는 두 사람을 모두 질식시키는 감정이다. 실제로 많은 관계에서 이 감정들은 끊임없는 확인, 통제, 불안으로 이어지고, 결국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를 사랑해달라는 욕구가 지나쳐 상대의 감정이나 경계를 침범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지배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이다. 그것은 연습과 자기 성찰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이며, 성숙한 자아에서 비롯된 안정된 관계를 추구한다. 반면, 의존과 집착은 자아의 불완전함을 감추기 위한 감정적 도피처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의지하고 있는가?" 이 구분은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하다. 내 안에 있는 불안이나 결핍을 상대에게 전가하지 않고, 먼저 나를 돌보는 것. 그것이 건강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상대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것이다. 7장. 자기애에서 출발하는 사랑 남을 사랑하기 전에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하나의 기술로 보고,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보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애 없는 사랑은 상대에게 기대고 의존하며 결국 파괴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어릴 적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뻔하고 도덕적인 문장처럼 들렸다. 하지만 지금은 이 문장이 가진 깊은 진심과 어려움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자기애는 곧 자기중심성과 혼동되기 쉽고, 때로는 타인을 배려하지 않는 이기심으로 오해되기도 한다. 하지만 프롬이 말하는 자기애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것은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자신의 감정과 욕구, 한계와 가능성을 균형 있게 인식하며, 나 자신을 지지하는 태도이다. 사랑의 관계에서 자기애는 중요한 균형추 역할을 한다. 나를 사랑할 줄 알아야 타인을 진심으로 사랑할 수 있다. 나 자신에게조차 정직하지 못하고, 내 감정에 귀 기울이지 않으면서, 어떻게 타인의 마음을 섬세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까? 또, 나 자신을 미워하고 깎아내리는 사람이 누군가의 따뜻한 사랑을 오롯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랑은 두 사람이 함께하는 길이지만, 그 길을 걷기 위해서는 각자의 내면이 먼저 건강해야 한다. 자기애는 그 길의 출발점이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하는 법을 배운 사람만이, 상대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지지할 수 있다. 진정한 사랑은 서로를 채우는 것이 아니라, 각자가 충분히 채워진 상태에서 서로를 나누는 것이다. 자기애는 결국, 내가 나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근원적인 신뢰의 표현이다. 사랑은 그 신뢰에서 시작된다. 8. 사랑은 의지이자 결단이다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의 용기와 실천에 대하여 사랑은 단지 운명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하는’ 감정이자 태도다. 프롬은 『사랑의 기술』에서 사랑을 일종의 의지적 행위로 강조한다. 이는 단순히 마음이 끌리는 감정 상태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이야기다. 우리는 흔히 “사랑에 빠졌다”는 수동적인 언어를 쓰지만, 프롬은 그렇게 ‘빠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은 우리가 꾸준히 결정하고 실천하는 능동적 행위라고 말한다. 특히 그는 ‘성숙한 사랑’은 조건 없이 베푸는 데서 시작된다고 주장한다. 사랑은 교환이나 거래가 아니며, 기대하거나 평가하기보다, 먼저 주고 책임질 수 있는 마음에서 비롯된다는 것이다. 이 말이 처음엔 다소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곱씹을수록, 이 말은 사랑의 본질을 꿰뚫고 있다. “내가 원하는 만큼 주면 그만”이 아니라, “그 사람이 존재하는 그대로, 내 의지로 사랑한다”는 선언. 그것이 바로 프롬이 말한 사랑의 가장 고귀한 형태다. 물론 말처럼 쉽지는 않다. 조건 없이 준다는 것, 그리고 그 선택을 매일 반복한다는 것은 그만큼 성숙하고 훈련된 마음을 요구한다. 그러나 중요한 건, 사랑이 감정의 파동에만 맡겨둘 수 없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감정이 식으면 사랑도 끝났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사랑이 의지라면, 감정이 잦아든 후에도 관계는 계속될 수 있다. 서로를 존중하고, 지지하고, 함께하기로 ‘결단’한 두 사람이라면 말이다. 그래서 프롬의 말대로 사랑은 낭만이 아니라 수행에 가깝다. 누구나 시작할 수 있지만, 끝까지 이어가는 사람은 드물다. 우리는 언젠가부터 사랑을 너무 쉽게 기대하고, 너무 빠르게 포기한다. 그러나 진정한 사랑은 감정이 전부가 아니다. 조건 없이 주겠다는 용기, 지켜보겠다는 인내, 나아가겠다는 결단, 그 모든 것이 사랑의 기술에 포함된다. 내가 할 수 있는 사랑은 무엇인가. 오늘도 선택하는 마음으로, 사랑을 실천할 수 있을까. 그런 질문을 안고 하루를 살아가는 것, 어쩌면 그게 바로 사랑이라는 기술이 우리에게 요구하는 첫걸음일지도 모른다. 9장. 어른의 사랑을 위하여
  • Lila
사랑의 기술을 읽고 1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사랑의 기술』을 읽고 다시 생각한 사랑의 연습 1. 다시 꺼내든 오래된 책 어릴 적 읽었던 『사랑의 기술』, 그리고 다시 펼친 지금의 감정 2. 사랑은 감정일까, 기술일까? 사랑을 감정이 아닌 ‘기술’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 3. 사랑은 성숙의 과정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독립성과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4. 사랑은 연습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하기 5. 사랑을 방해하는 사회 구조들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사랑의 왜곡과 결핍 6. 의존과 집착, 사랑과 혼동하지 않기 건강하지 않은 사랑과 헷갈릴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한 고찰 7. 자기애에서 출발하는 사랑 남을 사랑하기 전에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 8. 사랑은 의지이자 결단이다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의 용기와 실천에 대하여 9. 어른의 사랑을 위하여 낭만을 넘어 책임과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힘 10.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배워가는 사랑, 그리고 나의 사랑법 돌아보기 1장. 다시 꺼내든 오래된 책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사랑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말이 뭔가 똑똑하고 철학적인 이야기처럼 들려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그저 멋진 명언쯤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당연히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무게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책장을 넘기며 "그래,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많은 관계를 맺었고, 어떤 인연은 소중했고 또 어떤 인연은 아프게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집착하게 되거나, 나를 온전히 잃은 채 누군가에게 매달렸던 기억들도 있다. 그러다 우연히, 오래된 책장에서 이 책을 다시 꺼냈다. 색이 바랜 책등을 보며 '지금 읽으면 좀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싶었던 그 호기심이 나를 다시 프롬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예전엔 그냥 흘려보냈던 문장들이, 이제는 마음 깊이 박혔다. 예를 들면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라는 말이 그렇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연습하고 실천하는 기술이라는 그의 주장은 이제야 가슴 깊이 와닿는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나도 몇 번의 실패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책을 다시 읽으며, 사랑에 대해 내가 가진 생각들도 함께 돌아보게 되었다. 예전엔 사랑이 ‘마법’ 같고 ‘운명’ 같아야만 한다고 생각했다면, 지금은 조금 다르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거기에 맞춰 성장해가는 일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안다. '사랑의 감정'보다 '사랑하려는 태도'가 진짜 사랑을 만든다는 것. 그 차이를 이제는 조금 알 것 같다. 책장을 덮고 나서 문득 생각했다. 사랑이란 정말 배워야 하는 기술일지도 모른다고. 그리고 나는 지금 그 기술을 조금씩 익히는 중이라고. 2장. 사랑은 감정일까, 기술일까? 우리는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감정을 먼저 떠올린다.
  • Lila
월요일수요일토요일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 “나는 누구에게, 어떤 존재일까” 책을 읽는 내내, 자꾸 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존재일까.”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그런 질문을 조용히 꺼내게 만드는 책이다. 자극적인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그저 기억이 사라져가는 노인 후베르트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15살 소녀 린다가 한 주에 세 번 같은 공간을 공유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깊다. 단순한 줄거리지만 이 책이 다루는 감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관계는 돌봄이 아니라, ‘곁’의 감각 린다는 처음엔 후베르트를 '관리'하려 한다. 정해진 시간에 들르고, 약을 챙기고, 방을 정돈하고, 기억을 보조한다.
  • Lila
백기사 신드롬을 읽고
나는 왜 늘 누군가를 도와야 했을까 (백기사 신드롬을 읽고) 1. 백기사를 마주하다 2. 착한 사람이 되는 연습 3. 무거운 책임의 시작 4. 나는 왜 늘 피곤했을까 5. 말하지 못한 서운함들 6. 경계라는 용기 7. 돕지 않는 것도 사랑일 수 있다 8. 도우면서도 자유로운 사람 9. 관계를 되돌아보다 1장. 백기사를 마주하다 나는 오래도록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마음부터 아팠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따뜻하다', '이해심이 깊다'고 했다. 그 말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에 내가 너무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 더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백기사 신드롬』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저 심리학 책 하나를 읽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자가 설명하는 '백기사'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익숙했다. 타인을 돕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도와주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 나였다. 책은 말한다. 백기사는 겉보기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정욕구와 불안이 숨어 있다고.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 앞에서 괜히 불편해지고, 내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에게는 묘한 소외감을 느끼는 감정. 그 모든 것이 내 이야기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도와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구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나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자주 지치고 외로운가'를 혼자 곱씹으며, 다시 또 누군가를 돕는 반복 속에 살고 있었다. 백기사를 마주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괜찮니? 너는 언제쯤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내 안의 감정과 마주하기로 했다. 나를 아프게 했던 관계들,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부담 속에 눌려 살았던 나 자신과. 이 여정의 시작은 불편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유로웠다. 처음으로,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장. 착한 사람이 되는 연습 나는 참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분위기를 먼저 살폈고, 누가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 내가 뭔가 실수했나 싶어 마음을 졸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야 하는 눈치, 나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은 오래도록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착하다'는 말은 그래서 내게 칭찬이자 무거운 역할이었다. 그 말이 좋으면서도, 동시에 그 말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늘 괜찮은 척해야 했고, 감정이 요동쳐도 표정은 잔잔해야 했다. 속으로는 분명히 서운하고 힘든 순간이 있어도, '괜찮아, 이해해줘야지' 하며 넘겨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지우는 연습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불편해할까 봐, 거절하면 상처받을까 봐, 내 진심보다는 상대의 반응을 먼저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외로움이 남아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한 적은 많지만, 진짜 괜찮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문득, 나는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했던 건, 결국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착함이라는 건 그저 성격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익힌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 그 믿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생각해본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진짜 나다운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나도 기분이 나쁠 수 있고, 나도 거절할 수 있고, 나도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착함이 아니라 솔직함으로 관계를 맺는 연습을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부터일 것이다. 3장. 무거운 책임의 시작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것을 책임지려고 했을까. 돌아보면, 그 시작은 아주 어릴 적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나는 먼저 눈치를 보았고, 부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자책하곤 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나는 늘 주변의 감정 온도를 먼저 살피며 자랐다. 그 시절 나는 '착한 아이'였다. 울고 싶어도 울지 않았고, 속상해도 참았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그건 ‘너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좋다’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감정을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힘들어하면 나라도 괜찮아야 했고, 누군가 슬퍼하면 나는 더 밝아져야 했다. 그런 식으로, 내 감정은 점점 작아지고, 타인의 감정은 점점 커졌다. 나는 점점 ‘누군가를 위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그 책임이 꼭 내가 져야 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 시절엔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어린 나에게는 사랑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고,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너무 오래된 책임감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내려놓기 어려운 무게로 남아 있다. 지금의 나는, 그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중이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되, 그 고통을 내 것으로 삼지 않기. 도울 수 있지만,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은 내려놓기.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아플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4장. 나는 왜 늘 피곤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늘 피곤했다.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바쁜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지치고 허한 걸까. 그 피로는 단순한 육체의 고단함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무력감처럼 느껴졌다. 『백기사 신드롬』을 읽으며 나는 이 피곤함의 정체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나의 피로는, ‘도와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가 힘들어도 먼저 웃으며 안부를 묻고, 혼자 울면서도 누군가의 짐을 함께 짊어졌던 시간들. 그 모든 감정노동이 내 안에 쌓이고 쌓여, 피로라는 이름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움은 기꺼이 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해야만 하는 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조차, “그래, 괜찮아. 내가 할게.”라는 말이 입에서 먼저 나왔다. 상대는 고마워했지만, 정작 나는 점점 말라갔다. 감정의 수분이 빠져나가듯, 내 마음은 건조해져 있었다. 피로를 마주한 지금,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지친 건 당연해. 너는 너무 오랫동안, 네 몫이 아닌 짐까지도 짊어졌잖아.”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도와야만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고, 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내 마음이 피로하다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도 스스로를 용서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연습하며,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돌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회복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5장. 말하지 못한 서운함들 “그땐 정말 괜찮았던 걸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질문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에 조용히 웃어 넘겼던 순간들, 마음이 다치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던 일들. 그 모든 기억 속에 공통적으로 남아 있던 감정은 바로 서운함이었다. 서운하다는 감정은 때때로 애매하다. 겉으로 표현하기 애매하고, 말로 꺼내기에는 지나치게 작아 보인다. ‘그 정도로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마음 안에서 조용히 곪아간다. 『백기사 신드롬』 속에서도 이 감정은 반복해서 등장한다. 백기사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타인을 우선시하고, 결국에는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않지?”라는 외로운 질문 속에 빠져든다. 나 역시 그랬다. 도와주고, 이해하고, 받아주던 내가 돌아올 때는 고요한 침묵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 서운함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단지, 내 마음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한 번쯤은 “괜찮아?”라는 질문을 먼저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먼저 묻는 쪽은 나였고, 먼저 표현하는 쪽도 나였다. 그 서운함을 말로 꺼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관계를 깨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침묵이 쌓이면 결국 마음의 거리도 함께 멀어진다는 것을. 때로는 “그 말에 조금 서운했어.”라는 한마디가, 관계를 지키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연습하고 있다. 마음이 상했을 때 그것을 조용히 안에만 품지 않고, 천천히 말로 꺼내는 것. 비난이 아니라 나의 감정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그 작은 연습이, 나와 누군가를 조금 더 단단하게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준다는 걸 믿으며.
  • Lila
한강작가의 빛과 실을 읽고
『빛과 실』 한강 — 고요한 문장 속을 걷다 어떤 책은 독서를 넘어, 묵상처럼 다가온다.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이 그러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강이라는 사람의 내면 풍경을 천천히 거닐 수 있도록 허락한 산책로 같은 산문집이다. 이 책은 그녀의 소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고요한 시선으로 어떤 풍경을 바라보는지, 그녀가 느끼는 언어의 무게와 빛의 흔적,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치 작가의 정원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느껴진다. 햇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북향 창에 거울을 설치했다는 이야기, 흙을 뒤집고 풀을 뽑으며 계절을 견디는 손끝의 기록,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세계처럼 다가온다. 책의 제목처럼, '빛'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동시에 '실'이라는 단어도 중요하다. 한강은 언어를 실처럼 여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그 모든 과정은, 언어라는 실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을 통해 서로의 마음에 빛을 건네는 일이 아닐까. 그 생각이 무척 오래 남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는,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쓰던 당시의 고백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소설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대목은 단순한 문학적 전환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로 읽혔다. 문장을 따라가다가 전율이 일었고, 묵직한 질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녀의 산문은 거창한 해답 대신, 소박한 문장으로 고요하게 다가온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 이 짧은 문장에서조차 삶과 존재, 그리고 연대에 대한 작가의 감각이 빛난다. 한강이 촬영한 흑백 사진들도 함께 실려 있어, 산문과 이미지가 함께 호흡하는 시집 같기도 하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 그 고요한 언어가 책 전반에 흐른다. 『빛과 실』을 읽는다는 건, 거창한 의미를 쫓기보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조금 더 조용히 살아보는 일이다. 거대한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도 삶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 말 한마디가, 때로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나를 다시 일으키는 작은 빛이 된다. 책을 덮은 후, 나는 한참 동안 어떤 말도 떠올릴 수 없었다. 그저 창밖의 햇살을 오래 바라보았다. 그것으로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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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을 읽고
『경험의 멸종』을 읽고 — 스크린 너머로 사라지는 것들 얼마 전, 오래 기다려왔던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 『대부』의 극장 재개봉. 비디오 테이프 시절부터, TV에서 재방송할 때마다 몇 번이고 반복해 봤지만 늘 마음속에 하나의 갈망이 있었다.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보고 싶다.” 작은 화면이 담아내지 못한 그 장면들, 음향과 조명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밀도. 스크린 앞에서, 그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 친구와 대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열띤 장면 분석과 주제 토론까지 하고 나서야 그 친구가 사실은 『대부』를 본 적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인터넷으로 요약을 읽었고, 명장면 편집 영상을 몇 번 본 것뿐이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요즘, 그런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우리는 무언가를 ‘경험했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건 ‘전해 들은 것’일 때가 많다. 영상 클립 몇 개, 요약본 하나, 누군가의 리뷰. 그 안에서 직접적인 체험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마치 그 감각을 대체할 수 있다는 듯 기술은 더 편리해지고, 우리는 더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정말 그게 ‘경험’일까? 그 질문의 여운이 이 책으로 나를 이끌었다. 『경험의 멸종』은 지금 우리가 처한 문화적 풍경을 조금은 냉정하게 짚어낸다. 경험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고, 겪지 않았지만 아는 척할 수 있는 시대. 그 안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공감은 얄팍해진다. 물론 책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었던 지점들이 조금은 겉돌듯 스쳐 지나가는 느낌. 그러나 동시에, “맞아, 나도 이런 감정 느꼈어.” 하는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AI나 SNS, 메타버스 같은 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경험 없는 존재’로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통찰은 요즘의 일상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번 ‘직접 본다’는 것, ‘실제로 듣는다’는 것의 무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화면이 아닌 극장에서 『대부』를 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와 그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장면 하나하나를 내 눈으로 본 기억으로 말하고 싶다. 경험이 멸종되고 있는 이 시대에 그 감각을 지키는 작은 시도라도 해보고 싶다. 그건 어쩌면, 더 인간적으로 살아가기 위한 아주 소박한 저항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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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순을 다시 읽고
삶의 결을 따라 다시 읽은 『모순』 “어떤 책은,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면 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조용히 떠올리며, 『모순』을 다시 펼쳤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처음엔 그저 그런가 싶다가도 어느 날 문득 다시 마주하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싶은 문장이 있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은 내게 그런 책이다. 한때는 무심히 넘겼던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안의 인물들이 너무나 사람 같고 그 말들이 내 삶의 조각처럼 들려온다. 『모순』은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삶의 굴곡과 감정의 파동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늘 크고 작은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처음 읽었을 땐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말 대신 침묵으로 전해지는 감정, 그리고 다정함 속에 스며든 외로움까지. 주인공의 말투, 시선, 선택들이 이젠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고 느꼈다. 양귀자 작가님의 문장은 여전히 단정하고 맑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정확히 그 감정의 깊이만큼만 말해준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마치 내가 들은 이야기처럼. 이 책은 첫눈에 반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좋아지게 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책이, 결국 더 오래 곁에 남는다. 『모순』을 다시 읽고 나니 한동안 멀어졌던 활자들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또 하나의 나를, 또 하나의 시절을 들여다본 기분이다. 그리고 또 언젠가, 삶의 또 다른 결 위에서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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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를 읽고
좋은 감상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요즘, 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비평보다는 감응에 가까운 감상, 설명보다는 느낌으로 닿는 시선.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는 그런 내 안의 바람에 조용히 말을 건넨 책이었다. 작가님을 직접 뵌 적이 몇 번 있다. 미술관에서, 혹은 강연장에서. 그는 언제나 뚜렷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정확하고, 단단하며, 논리적인 설명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과 예술을 향한 따뜻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책 속에서도 그 느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보를 나열하기보다, 작품 하나를 둘러싼 시대와 작가의 결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방식. 한 장 한 장이 짧은 해설이면서도 마음에 오래 남는 감상이 되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감상’이라는 행위를 다루는 저자의 태도였다. 그림을 잘 보려면 꼭 무엇을 알아야 할까? 많은 정보를 알고, 예술사를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까? 저자는 그렇게 묻지 않는다. 대신, "그림을 ‘자기 자리’에서 바라보는 법"을 알려준다. 기억 속의 장면과, 지금의 마음과, 아주 사적인 감정들까지도 미술 앞에선 모두 유효한 감상이라는 사실을 다정하게 되짚어준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좋은 감상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더 많이 느끼고, 더 조용히 들여다보는 사람. 예술 앞에서 조급하지 않고, 작은 떨림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전시를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미술관이라는 성소 안에서 빛의 방향, 붓의 결, 시선의 정지, 그 모든 미묘한 말들을 천천히 듣고 싶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감정을 남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감정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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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타 화이트 북을 읽고
책 한 권을 받았다. 종이 위의 정성스레 쓰여진 글씨, 그 안엔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람타 화이트 북』.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낯설음, 마치 오래전 잊고 있던 무언가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마음이 조용히 멈추었다. 문장은 단순했지만, 그 울림은 깊었다. “당신은 신이다.”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저 오래도록 침묵 속에서 그 말을 가슴에 담아보았다. 책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기억나게 했다. 내 안에 존재하는 힘, 내가 나를 창조하고 있다는 단순한 진실. 나는 읽지 않았다. 가만히 들었다. 마치 책이 나를 읽는 듯, 활자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주 멈췄다. 숨을 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문장 하나가 내면 깊숙이 들어와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시간도 없고, 방향도 없고,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이 진짜라는 메시지는 언제나 명상이 말하던 바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들은 그것은 이성보다도 더 본질적인 어떤 울림이었다. 나의 생각이 나의 세계를 만든다. 말은 쉬웠지만, 그 의미는 깊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의도되지 않은 현실’을 살았던가. 그 깨달음은 부드럽고도 강하게 나를 깨웠다. 책장을 덮을 때쯤, 나는 한 사람이 아닌 빛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제는 누가 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해냈으므로. 『람타 화이트 북』은 철학서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길이었고, 거울이었으며, 지금 여기로 나를 데려오는 초대장이었다. 이 책을 선물해준 손길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 그것은 단지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창이 되어주었기에. 나는 오늘도 가만히 묻는다. “지금, 어떤 생각을 선택하겠는가?” 그리고 그 생각 안에서, 나는 나의 세계를 조용히 빚는다.
  • Lila
그녀를 지키다를 읽고
사랑을 말하는 일이 한때는 낯설고 멀게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진심으로 헤아리는 일은 드물죠. ‘사랑해’라는 말은 참 쉽게 흘러나오지만, 그 말이 가진 무게를 끝까지 견뎌본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녀를 지키다』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등장인물의 감정보다, 그의 태도와 선택이 저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곁에 남지 않기로 결심하면서도 끝까지 ‘지켜낸’ 그 사람의 서사. 그건, 감정이 아닌 책임의 형태로 남은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며, ‘지킨다’는 말이 어떤 삶의 방식인지 바라보려 했습니다. 함께 있지 않아도, 손을 잡지 않아도,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걸요. 사랑은 감정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고,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태도로 가늠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나의 이야기입니다. 함께하지 않아도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언제부터 함께 있는 걸 의미하게 되었을까. 같은 자리에 머물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 건 언제였을까. 하지만 『그녀를 지키다』의 그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 믿음이 틀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이 사랑했던 사람. 그는 곁에 머무르기보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떠나려 했다. 지친 얼굴로, 무거운 눈으로, 말없이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는 묻지 않았다. “왜 떠나?” “어디 가?” 그런 흔한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옷자락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까지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면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 틀릴 수도 있다면, 그건 아마 이런 순간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은 대사도 없고, 눈물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가장 많은 것을 느꼈다. 붙잡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건 감정보다 더 강한 것이었고, 그가 지닌 사랑의 형태였다. 우리는 종종 사랑을 결과로 이해한다. 함께 사는 것, 결혼하는 것, 무언가를 이루는 것으로 사랑을 증명하려 든다. 하지만 그는 그런 증명을 하지 않았다. 그저 지켜주는 것을 선택했다. 그녀의 의지를 존중하고, 그녀의 걸음을 막지 않고, 그녀가 가야 할 길을 내어주는 것. 그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전부이자, 그가 사랑으로 택한 방식이었다. 그를 보며 나는 사랑이 무엇인지 다시 묻게 되었다. 마음을 준다는 건, 결국 그 사람이 원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도록 조용히 곁을 비워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간절히 원하면서도 내놓는 일. 붙잡고 싶으면서도 떠나보내는 일. 그는 그 선택을 감정이 아닌 태도로 증명했다. 함께하지 않아서 더 슬프지만, 함께하지 않아서 더 분명한 사랑이 있다. 『그녀를 지키다』는 그런 사랑을 보여준다. 지키는 건 곁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때로는 곁을 비워주는 침묵일 수 있다는 걸. 사랑은 늘 곁에 있어야 한다는 공식이 무너지는 순간, 그는 가장 단단한 사랑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가 떠나보내는 장면에서 오히려 가장 강하게, 그녀를 지키려는 마음을 느꼈다. 지킨다’는 말의 무게 “지켜줄게”라는 말은 얼마나 많은 드라마와 소설 속에서 들었는지 모른다. 그리고 그 말이 얼마나 쉽게 입 밖으로 나오는지도 안다. 하지만 막상 누군가를 정말 지켜야 할 순간이 오면, 그 말은 가장 말하기 어려운 문장이 된다. 『그녀를 지키다』 속 주인공은 단 한 번도 “지켜줄게”라는 말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말 없이 지켜냈다. 그녀가 원하지 않는 방식으로 억지로 곁에 남지 않았고, 그녀가 선택한 외면을 묵묵히 받아들였으며, 필요할 때는 뒤로 물러섰다. 그건 어쩌면 너무 고요해서, 사랑이 아닌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 침묵이야말로 그 어떤 다정한 말보다 무거운 지킴이었음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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