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왜 늘 누군가를 도와야 했을까 (백기사 신드롬을 읽고) 1. 백기사를 마주하다 2. 착한 사람이 되는 연습 3. 무거운 책임의 시작 4. 나는 왜 늘 피곤했을까 5. 말하지 못한 서운함들 6. 경계라는 용기 7. 돕지 않는 것도 사랑일 수 있다 8. 도우면서도 자유로운 사람 9. 관계를 되돌아보다 1장. 백기사를 마주하다 나는 오래도록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마음부터 아팠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따뜻하다', '이해심이 깊다'고 했다. 그 말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에 내가 너무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 더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백기사 신드롬』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저 심리학 책 하나를 읽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자가 설명하는 '백기사'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익숙했다. 타인을 돕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도와주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 나였다. 책은 말한다. 백기사는 겉보기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정욕구와 불안이 숨어 있다고.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 앞에서 괜히 불편해지고, 내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에게는 묘한 소외감을 느끼는 감정. 그 모든 것이 내 이야기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도와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구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나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자주 지치고 외로운가'를 혼자 곱씹으며, 다시 또 누군가를 돕는 반복 속에 살고 있었다. 백기사를 마주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괜찮니? 너는 언제쯤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내 안의 감정과 마주하기로 했다. 나를 아프게 했던 관계들,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부담 속에 눌려 살았던 나 자신과. 이 여정의 시작은 불편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유로웠다. 처음으로,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2장. 착한 사람이 되는 연습 나는 참는 데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부터 분위기를 먼저 살폈고, 누가 기분이 나쁜 것 같으면 내가 뭔가 실수했나 싶어 마음을 졸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채야 하는 눈치, 나보다 다른 사람의 기분이 더 중요하다는 믿음은 오래도록 내 안에 자리를 잡았다. '착하다'는 말은 그래서 내게 칭찬이자 무거운 역할이었다. 그 말이 좋으면서도, 동시에 그 말에 갇혀 있는 것 같았다. 늘 괜찮은 척해야 했고, 감정이 요동쳐도 표정은 잔잔해야 했다. 속으로는 분명히 서운하고 힘든 순간이 있어도, '괜찮아, 이해해줘야지' 하며 넘겨버리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나는 착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나를 지우는 연습을 해왔는지도 모른다. 상대가 불편해할까 봐, 거절하면 상처받을까 봐, 내 진심보다는 상대의 반응을 먼저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는 늘 외로움이 남아 있었다. 내가 괜찮다고 말한 적은 많지만, 진짜 괜찮았던 적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문득, 나는 이 질문을 마주하게 되었다.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고 했던 건, 결국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어서 아니었을까?" 착함이라는 건 그저 성격이 아니라, 살아남기 위해 익힌 생존 전략일지도 모른다고. 내가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야만 사랑받을 수 있다고 믿었던 시간들. 그 믿음이 오늘의 나를 만들었을지도 모른다고. 이제는 생각해본다. 착한 사람이 아니라, 진짜 나다운 사람이 될 수는 없을까? 나도 기분이 나쁠 수 있고, 나도 거절할 수 있고, 나도 도와달라고 말할 수 있는 그런 사람으로. 착함이 아니라 솔직함으로 관계를 맺는 연습을 시작하고 싶다. 그리고 그 시작은, 나 스스로에게 솔직해지는 것부터일 것이다. 3장. 무거운 책임의 시작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많은 것을 책임지려고 했을까. 돌아보면, 그 시작은 아주 어릴 적이었다. 가족 중 누군가가 힘들어하면 나는 먼저 눈치를 보았고, 부모님의 기분이 좋지 않으면 그 이유가 혹시 나 때문은 아닐까 자책하곤 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나는 늘 주변의 감정 온도를 먼저 살피며 자랐다. 그 시절 나는 '착한 아이'였다. 울고 싶어도 울지 않았고, 속상해도 참았다. 그런 내가 자랑스럽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속으로는 자꾸만 울고 싶어졌다. 그건 칭찬이 아니었다. 그건 ‘너는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게 좋다’는 무언의 메시지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나는 타인의 감정을 내가 책임지는 사람이 되었다. 누군가 힘들어하면 나라도 괜찮아야 했고, 누군가 슬퍼하면 나는 더 밝아져야 했다. 그런 식으로, 내 감정은 점점 작아지고, 타인의 감정은 점점 커졌다. 나는 점점 ‘누군가를 위한 사람’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이제는 안다. 그 책임이 꼭 내가 져야 할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하지만 그 시절엔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었다. 어린 나에게는 사랑받기 위한 유일한 방법이었고, 존재의 의미를 찾기 위한 방식이었다. 그래서 너무 오래된 책임감은, 어른이 된 나에게도 여전히 내려놓기 어려운 무게로 남아 있다. 지금의 나는, 그 무게를 조금씩 덜어내고 있는 중이다.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되, 그 고통을 내 것으로 삼지 않기. 도울 수 있지만, 반드시 도와야 한다는 의무감은 내려놓기. 그리고 무엇보다, 나도 아플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기. 그렇게, 나는 내 삶의 주인이 되어가는 중이다. 4장. 나는 왜 늘 피곤했을까 언젠가부터 나는 늘 피곤했다. 잠을 자도 개운하지 않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았는데도 몸이 무거웠다.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특별히 바쁜 것도 아닌데 왜 이토록 지치고 허한 걸까. 그 피로는 단순한 육체의 고단함이 아니라, 마음에서부터 올라오는 깊은 무력감처럼 느껴졌다. 『백기사 신드롬』을 읽으며 나는 이 피곤함의 정체를 조금은 알 수 있었다. 나의 피로는, ‘도와야만 하는 사람’으로 살아온 시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누군가의 부탁을 거절하지 못하고, 내가 힘들어도 먼저 웃으며 안부를 묻고, 혼자 울면서도 누군가의 짐을 함께 짊어졌던 시간들. 그 모든 감정노동이 내 안에 쌓이고 쌓여, 피로라는 이름으로 터져 나오고 있었던 것이다. 도움은 기꺼이 주는 것이어야 한다. 하지만 나는 그걸 ‘해야만 하는 일’로 여겼다. 그러다 보니 마음의 여유가 없을 때조차, “그래, 괜찮아. 내가 할게.”라는 말이 입에서 먼저 나왔다. 상대는 고마워했지만, 정작 나는 점점 말라갔다. 감정의 수분이 빠져나가듯, 내 마음은 건조해져 있었다. 피로를 마주한 지금, 나는 나에게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지금 지친 건 당연해. 너는 너무 오랫동안, 네 몫이 아닌 짐까지도 짊어졌잖아.” 그렇게 나를 이해하고 나서야, 비로소 조금 숨을 돌릴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도와야만 괜찮은 사람’이 아니어도 된다고, 내 존재만으로도 충분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었다. 이제 나는, 내 마음이 피로하다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기로 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날에도 스스로를 용서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법을 연습하며, 관계 속에서 ‘나’를 지키는 법을 배워가는 중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를 돌보는 일이야말로, 가장 근본적인 회복이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5장. 말하지 못한 서운함들 “그땐 정말 괜찮았던 걸까?” 시간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질문을 자주 떠올리게 되었다. 누군가의 말에 조용히 웃어 넘겼던 순간들, 마음이 다치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던 일들. 그 모든 기억 속에 공통적으로 남아 있던 감정은 바로 서운함이었다. 서운하다는 감정은 때때로 애매하다. 겉으로 표현하기 애매하고, 말로 꺼내기에는 지나치게 작아 보인다. ‘그 정도로 예민하게 구는 건가?’ 싶은 생각이 들면, 차라리 아무 말도 하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감정은 마음 안에서 조용히 곪아간다. 『백기사 신드롬』 속에서도 이 감정은 반복해서 등장한다. 백기사는 자신의 감정을 억누른 채 타인을 우선시하고, 결국에는 “왜 아무도 나를 이해하지 않지?”라는 외로운 질문 속에 빠져든다. 나 역시 그랬다. 도와주고, 이해하고, 받아주던 내가 돌아올 때는 고요한 침묵뿐이라는 사실이 나를 더 외롭게 만들었다. 나는 지금도 그 서운함들이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 말하기 어렵다. 단지, 내 마음도 누군가에게 인정받고 싶었고, 한 번쯤은 “괜찮아?”라는 질문을 먼저 받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늘 먼저 묻는 쪽은 나였고, 먼저 표현하는 쪽도 나였다. 그 서운함을 말로 꺼내는 일은 용기가 필요했다. 관계를 깨지 않으면서도 내 감정을 솔직히 드러내야 했으니까. 하지만 이제는 안다. 침묵이 쌓이면 결국 마음의 거리도 함께 멀어진다는 것을. 때로는 “그 말에 조금 서운했어.”라는 한마디가, 관계를 지키는 가장 다정한 방식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연습하고 있다. 마음이 상했을 때 그것을 조용히 안에만 품지 않고, 천천히 말로 꺼내는 것. 비난이 아니라 나의 감정으로 이야기하는 법을. 그 작은 연습이, 나와 누군가를 조금 더 단단하게 이어주는 다리가 되어준다는 걸 믿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