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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사이의 숨결

읽고, 느끼고, 잠시 멈추다.
할매를 읽고
600년을 지켜본 나무의 자리 이 소설에서 가장 오래 살아남은 존재는 사람이 아니다. 600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던 팽나무, 사람들은 그 나무를 ‘할매나무’라 부른다. 『할매』를 읽고 나서 가장 오래 마음에 남은 것도 결국 그 나무였다. 할매나무는 말하지 않는다. 그러나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사람들의 시간을 모두 통과해온 존재다. 전쟁도, 가난도, 떠남도, 죽음도 그 나무 앞에서는 하나의 풍경처럼 지나간다. 사람들은 태어나고 늙고 사라지지만 나무는 그 자리에 남아 모든 것을 보았다는 사실만을 품고 있다. 이 소설에서 ‘할매’ 역시 그런 존재다. 말수가 적고, 자신의 삶을 설명하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해받지 못한 채 가족의 시간 속에 묻혀 살아온 인물이다. 그러나 할매의 삶은 할매나무가 그 자리에 서 있었던 시간처럼 사라지지 않는다. 설명되지 않아도, 평가받지 않아도 이미 충분히 오래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읽으며 인간의 삶을 자꾸 재단하려 했던 내 태도를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는 늘 묻는다. 어떻게 살았는지, 무엇을 이루었는지,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어떤 인생이었는지. 그러나 할매나무 앞에서는 그 모든 질문이 조금 무력해진다. 그 나무는 묻지 않고, 답하지 않고, 그저 그 자리에 있었을 뿐이니까. 『할매』는 사람의 삶을 자연의 시간 속에 다시 놓아본다. 인간의 역사는 너무 짧고, 판단은 너무 성급하다는 사실을 팽나무의 침묵을 통해 보여준다. 그래서 이 소설은 연민을 요구하지 않는다. 불쌍하다고 말하지 말라고도 하지 않는다. 다만, 함부로 말하지 않기를 조용히 요청할 뿐이다. 할매나무는 끝까지 남는다. 사람들이 떠난 자리에서도, 기억이 흐릿해진 뒤에도. 그 존재는 말하지 않지만 지워지지 않는다. 나는 그 나무를 보며 ‘살아남는다는 것’이 무엇인지 조금은 다르게 생각하게 되었다. 『할매』는 빠르게 읽히는 소설이 아니다. 그러나 읽고 난 뒤, 마치 오래된 나무 한 그루를 본 것처럼 마음 어딘가에 자리를 차지한다. 그 자리는 설명으로 채워지지 않고, 판단으로 정리되지도 않는다. 그저 오래 남아 다음 말을 늦추게 만든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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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일리지 아워를 읽고
시간을 밀어붙이지 않고 쌓는다는 것 — 마일리지 아워를 읽고 예전의 나는 시간을 ‘써야 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루를 잘 쓰지 못하면 괜히 마음이 무거워졌고, 바쁘게 보냈는데도 남은 게 없다고 느껴지는 날에는 나 자신을 조금씩 책망했다. 그런데 이 책은 시간을 다른 방식으로 부른다.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쌓이는 것이라고. 그 말이 이상하게도 마음을 느슨하게 했다. 오늘을 얼마나 잘 보냈는지가 아니라, 오늘이 나에게 무엇을 남겼는지를 묻는 방식이어서였다. 기록 하나, 배움 하나, 혹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쉬었던 그 시간까지도 ‘남은 것’으로 불러도 괜찮아지는 순간이 왔다. 시간을 마일리지처럼 설계할 수 있다는 비유도 좋았다. 거창한 계획이 아니라 매일 반복 가능한 10분 하나면 충분하다는 말. 지금의 이 작은 시간이 3개월 뒤의 나를 조금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줄 수 있다는 믿음. 그건 다짐이라기보다 조용한 신뢰에 가까웠다. 이 책에서 특히 마음에 남았던 문장은 루틴에 대한 이야기였다. 꾸준하지 못한 이유가 의지가 약해서가 아니라 구조가 없어서라는 말. 그래서 좋은 루틴은 나를 밀어붙이지 않는다는 문장. 나는 그동안 빠지지 않는 사람이 되려고 애썼지, 다시 돌아올 수 있는 구조를 만들지는 않았던 것 같다. 이제는 하루를 빠져도 괜찮고, 그다음 날 다시 시작할 수 있으면 된다는 ‘복귀 지점’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안심인지 알게 되었다. 시간을 새게 만드는 것들에 대한 장에서는 일보다 감정이 시간을 빼앗는다는 문장이 오래 남았다. 비교, 조급함, 괜히 열어보는 화면들. 줄일 수 없는 일이 아니라 줄일 수 있는 반응들이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짚어준다. 그리고 이 책이 나에게 가장 다정했던 부분은 회복의 시간을 다루는 방식이었다. 아프면서 쉬는 동안 나는 늘 어딘가 미안한 마음을 품고 있었는데, 이 책은 그 시간을 멈춤이 아니라 적립으로 바라보게 해주었다. 쉼에도 죄책감이 따라붙던 마음이 조금 가벼워졌다. 회복 없는 성취는 오래가지 않는다는 문장을 읽으며 지금의 이 시간도 다음 계절을 준비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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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리와 함께한 마지막 수업》 — 약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마지막 가르침
《모리와 함께한 마지막 수업》 — 약해져도 괜찮다고 말해주는 마지막 가르침 《모리와 함께한 마지막 수업》은 죽음을 앞둔 한 교수가 약해지는 시간을 통과하며 삶을 대하는 태도를 기록한 책이다. 이 책은 삶을 더 잘 살아야 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약해지는 순간에도 인간으로 남을 수 있다고, 무너지지 않으려 애쓰지 않아도 존엄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조용히 말해준다. 모리 슈워츠 교수의 말들이 오래 남는 이유는 그가 특별히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에게 정직했고 삶 앞에서 솔직했기 때문이다. 루게릭병으로 점점 몸이 마비되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모리는 자신의 상태를 부정하거나 미화하지 않는다. 몸은 무너질 수 있지만, 삶의 태도까지 무너질 필요는 없다고 말한다. 질병은 ‘나’ 그 자체가 아니라, 내가 잠시 경험하고 있는 하나의 상태일 뿐이라는 그의 시선은 고통을 대하는 방식 자체를 근본적으로 바꿔놓는다. 그는 도움을 받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슬퍼하고, 불평하고, 울 수 있는 권리를 스스로에게 허락한다. 이 책이 주는 가장 큰 위로는 “괜찮아져야 한다”는 압박에서 벗어나도 된다는 점이다. 특히 인상적인 부분은 감정을 다루는 태도다. 모리는 절망과 분노, 슬픔을 억누르라고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충분히 느끼고, 충분히 슬퍼하라고 권한다. 상실을 애도하지 않으면 그 감정은 마음속에 남아 삶을 조금씩 잠식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감정을 관리해야 할 대상으로 여기는 오늘의 우리에게 이 태도는 오래 남는 울림이 된다. 책 곳곳에 수록된 모네의 그림 또한 이 메시지를 말보다 먼저 전한다. 경계가 흐릿한 풍경, 빛과 색이 겹겹이 스며든 장면들은 또렷하지 않아도 괜찮은 삶의 상태를 닮아 있다. 분명하지 않아도, 완성되지 않아도 그대로 머물 수 있다는 허락처럼 느껴진다. 글을 읽다 잠시 시선을 옮겨 그림을 바라보는 순간, 독자는 ‘이해해야 할 삶’이 아니라 ‘잠시 쉬어도 되는 삶’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또 하나 이 책이 전하는 중요한 가르침은 ‘쓸모 있음’에 대한 재정의다. 모리는 쓸모를 생산성이나 성취에서 찾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따뜻한 존재로 남는 것, 관계 안에서 진심을 나누는 것, 그 자체가 삶의 가치라고 말한다.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그는 여전히 목표를 세우고, 사람들과 연결되며, 사랑을 표현한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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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베라는 남자』 — 살아지고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오베라는 남자』 — 살아지고 있었던 한 사람의 이야기 이 책을 펼쳤을 때, 나는 한 남자의 삶보다 먼저 그의 고집을 마주하게 되었습니다. 까칠하고, 고집 세고, 늘 불평이 많고, 사람들과 잘 어울릴 생각도 없어 보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몇 장을 넘기다 보면 그의 불친절이 미워지기보다는 이상할 만큼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까칠함이라는 이름의 애도 오베는 아내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그 상실 이후, 삶을 이어갈 이유도 함께 잃어버린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의 분노와 규칙 집착, 타인을 향한 날 선 말들은 사실 삶을 붙잡기 위한 그만의 방식의 애도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 소설은 “왜 이렇게 사는가”를 다그치지 않습니다. 대신 “그렇게라도 살아내고 있었구나” 하고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봅니다. 연결은 감정이 아니라, 사건으로 온다 오베가 다시 삶과 연결되는 방식은 아주 드라마틱하지 않습니다. 고장 난 것을 고쳐달라는 부탁 말 많고 경계 없는 이웃 혼자서는 버거운 누군가의 일상 그는 원하지 않았지만, 자꾸만 필요한 사람이 됩니다. 중요한 건, 그가 마음을 열기로 결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그저 몸이 먼저 움직였고, 그 행동들이 관계가 되었고, 관계가 그를 다시 삶 쪽으로 데려옵니다. 이 소설이 인상적인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연결은 “외롭다”는 고백에서 시작되지 않고 “이거 좀 도와줄 수 있어요?” 라는 말에서 시작되기도 한다는 것. 도움을 주는 사람, 도움을 받는 사람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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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담담함으로 도달하는 사랑의 온도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담담함으로 도달하는 사랑의 온도 비가 오고, 스산한 바람이 부는 늦가을이면 문득 떠오르는 책들이 있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는 나에게 그런 책이다. 화려한 문장도, 격정적인 사랑도 아니지만 어쩐지 이 계절의 공기와 아주 잘 어울린다. 이 책에서의 사랑은 뜨겁지도, 격렬하지도 않다. 대신 한 사람의 마음이 어떻게 흔들리고, 어떻게 불안해지고, 어떻게 상대에게 도달하는지를 차분하고 냉정한 시선으로 서술한다. 그 담담함이 오히려 사랑의 본질을 더 선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나는 그 점이 가장 인상 깊었다. 사랑은 이유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사랑이란 결국 “왜인지 모를 어떤 이유”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에 이상하리만큼 위로받게 된다. 누군가의 말투 하나, 눈웃음의 방향, 사소한 습관 같은 것들이 어느 순간 마음에 스며들고, 그 이유를 설명하려 하면 오히려 더 설명이 어려워진다. 알랭 드 보통은 이 정돈되지 않은 감정의 시작을 지나치게 정직할 만큼 솔직하게 보여준다. 그 담백함 속에서 “아, 사랑은 원래 이런 것이었지” 하고 되뇌게 된다. 사랑은 환상이 깨진 자리에서 다시 시작된다. 책 속의 연인은 서로에게 환상을 투사하며 사랑을 시작하지만, 그 환상은 서서히 균열을 맞는다. 상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될 때 느끼는 실망, 그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마음, 상처받고 상처 주는 순간들. 그러나 작가는 말한다. 그 순간이 바로 사랑이 다시 태어나는 지점이라고. 상대를 다시 바라보는 법, 다른 존재를 이해하는 법,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부분까지 존중하는 법. 이 책은 그 모든 과정을 잔잔하게 따라가며 보여준다. 그래서 읽는 내내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은 특별함이 아니라 서로의 불완전함을 견디는 연습이라는 사실을 책이 아주 조용하게 알려주기 때문이다. 사랑의 불안조차 사랑의 일부 비가 내리는 저녁처럼, 사랑에도 정체 모를 서늘한 바람이 분다. 기대와 불안이 함께 밀려오고, 상대의 말 한마디, 눈빛 하나로 하루의 온도가 크게 달라진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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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의 피아노 - 다시 아침을 여는 책
다시 아침을 건네는 책 『아침의 피아노』는 내 마음의 상태가 바뀔 때마다 다른 면을 보여주는 책이다. 작가의 시선은 언제나 너무 따스하다. 생을 바라볼 때도, 자신을 바라볼 때도, 누군가의 삶을 스쳐 지나갈 때도 급하지 않고 조급하지 않다. 마치 “삶은 원래 이런 속도로 흘러가도 괜찮다”라고 작은 숨결처럼 말해주는 듯하다. 책을 읽고 있으면 살아간다는 일이 그리 멀리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든다. 커다란 목표나 영웅적인 의지가 아니라, 창문을 열어 한 번 숨을 들이마시는 일, 잔잔한 피아노 소리처럼 지나가는 하루의 온도, 그런 사소한 것들 속에서 나도 모르는 사이 삶이 조금씩 회복되고 있었다. 책에는 특별한 사건이 많지 않다. 대신 마음을 오래 붙잡는 문장들이 있다. 사람을 위로하려는 억지의 온도 대신, 그저 곁에 앉아주는 체온 같은 문장들. 읽는 동안, 나는 누군가의 조용한 음악을 곁에서 함께 듣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책을 덮고 난 뒤에도 『아침의 피아노』가 오래 남는 건 이 책이 삶을 설명하려 하지 않고, 그저 비춰주기 때문이다. 삶이 왜 이렇게 흘러가는지 정답을 알려주려 들지 않는다. 대신, 우리가 무심히 지나쳤던 순간들을 햇빛이 유리잔에 머무는 속도로 조용히 들어 올린다. 그 작은 순간들을 바라보는 동안 나는 나의 하루를 다시 보게 된다. 아무것도 변하지 않았음에도 마음의 결이 아주 조금 달라진다. 그 변화는 설명할 수 없지만 분명하게 느껴지는 변화이다. 그래서 이 책은 한 번 읽고 끝나지 않는다. 내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을 때, 다른 계절을 지나고 있을 때, 다른 마음으로 하루를 맞이할 때 다시 펼치고 싶어진다. 그때마다 같은 문장도 다른 온도로 다가온다. 마치 오래된 음악을 다시 들었을 때 멜로디는 그대로인데 내가 느끼는 감정만 달라져 있는 것처럼. 『아침의 피아노』는 그런 책이다. 읽는 사람이 바뀌는 만큼 책의 울림도 달라지는 책. 그래서 다시 읽고 싶어진다. 책이 말해주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라, 책을 통해 지금의 나를 다시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어떤 사람으로 이 아침을 맞이하고 있는지, 그 질문에 조용히 발을 들여놓게 해주는 책. 나는 이 책이 건네는 그 잔잔한 아침을 언제든 다시 만나고 싶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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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상처는 흔적을 남긴다.
『모든 상처는 흔적을 남는다』 상처는 사라지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면 형태를 바꾸고, 언어를 바꾸고, 얼굴을 바꿀 뿐이다. 상처를 치유해야 할 대상으로만 생각했던 나에게, 이 책은 상처는 극복의 대상이 아니라 존재의 일부라는 전혀 다른 관점을 제시해 주었다. 저자는 인간의 내면에 남은 다섯 가지 상처 — 거부, 버림, 수치, 배신, 부당함 — 을 이야기한다. 그 상처들은 단순한 경험이 아니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을 결정짓는 ‘틀’이 된다. 나는 그중에서도 ‘거부’의 상처에 오래 머물렀다. 타인의 인정이 나의 존재를 보증한다고 믿었던 시간들, 누군가의 시선이 나를 규정한다고 느꼈던 순간들. 그때마다 나는 나 자신을 증명하느라 애썼다. 그러나 돌아보면, 그 애씀 속에는 늘 두려움이 있었다. 거부당할까 봐, 잊힐까 봐, 인정받지 못할까 봐. 그 두려움이 바로 내가 키운 상처의 다른 얼굴이었다. 상처는 타인의 행동에서 시작되지만, 그 의미는 언제나 내 안에서 완성된다. 같은 말을 들어도, 같은 일을 겪어도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무너진다. 상처는 사건이 아니라, 관계의 온도에서 태어난다. 타인의 말보다, 내가 그 말을 받아들이는 방식이 상처의 크기를 결정한다는 것을 이제 조금은 이해한다. 부르보는 말한다. “상처는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그 흔적은 치유의 지도다.” 그 문장을 읽으며 나는 생각했다. 흔적은 결코 부끄러운 자국이 아니다. 그건 내가 누군가와 관계 맺고, 사랑하고, 실망하고, 다시 일어섰던 시간의 증거다. 흉터가 남는다는 건, 몸이 그만큼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마음의 상처도 그렇다. 그 흔적은 내가 살아 있었다는 기록이자, 다시 살아가겠다는 조용한 의지의 표식이다. 예전에는 상처 없는 나를 꿈꿨다. 아무 일에도 흔들리지 않는 단단한 사람, 감정의 파도에도 요동치지 않는 평온한 마음. 하지만 그런 완전함은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가 완전해지는 건 상처가 사라져서가 아니라, 그 상처를 포함한 채로도 자신을 받아들일 때 가능하다. 나는 더 이상 상처를 지우려 하지 않는다. 대신 그 흔적이 어떤 형태로 남았는지를 바라본다. 그 속에는 오래된 나의 선택, 그리고 지금의 내가 있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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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기술을 읽고 2
6. 의존과 집착, 사랑과 혼동하지 않기 건강하지 않은 사랑과 헷갈릴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한 고찰 우리는 종종 의존과 집착을 사랑으로 오해한다. 특히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너 없으면 못 살아" 같은 대사는 오히려 낭만적으로 묘사되곤 한다. 하지만 『사랑의 기술』은 그런 감정들이 진정한 사랑과 얼마나 거리가 먼지를 명확하게 지적한다. 사랑은 상대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감정이자 태도다. 반면, 의존은 상대 없이는 나 자신이 온전할 수 없다는 믿음에서 비롯된다. 집착은 사랑이라기보다 불안의 또 다른 얼굴이다. 프롬은 사랑은 자유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집착과 의존은 자유를 없애고, 결국에는 두 사람을 모두 질식시키는 감정이다. 실제로 많은 관계에서 이 감정들은 끊임없는 확인, 통제, 불안으로 이어지고, 결국 파괴적인 결과를 낳는다. 나를 사랑해달라는 욕구가 지나쳐 상대의 감정이나 경계를 침범하게 되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랑이 아니라 지배다. 사랑은 단순한 감정 그 이상이다. 그것은 연습과 자기 성찰을 통해 길러지는 능력이며, 성숙한 자아에서 비롯된 안정된 관계를 추구한다. 반면, 의존과 집착은 자아의 불완전함을 감추기 위한 감정적 도피처에 가깝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에게 자주 물어야 한다. "나는 사랑하고 있는가, 아니면 의지하고 있는가?" 이 구분은 삶의 방향을 바꿀 만큼 중요하다. 내 안에 있는 불안이나 결핍을 상대에게 전가하지 않고, 먼저 나를 돌보는 것. 그것이 건강한 사랑의 시작이다. 사랑은 상대를 통해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온전한 두 사람이 만나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것이다. 7장. 자기애에서 출발하는 사랑 남을 사랑하기 전에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 『사랑의 기술』에서 에리히 프롬은 사랑을 단순한 감정이나 충동으로 보지 않는다. 그는 사랑을 하나의 기술로 보고, 그 기술을 익히기 위해 필요한 전제 조건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능력'을 강조한다. 사랑을 시작하기 위해, 먼저 우리는 자기 자신을 돌보고 존중할 수 있어야 한다. 자기애 없는 사랑은 상대에게 기대고 의존하며 결국 파괴적인 방향으로 흘러가기 쉽다. 어릴 적 이 구절을 읽었을 땐,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이 뻔하고 도덕적인 문장처럼 들렸다.
  • Lila
사랑의 기술을 읽고 1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사랑의 기술』을 읽고 다시 생각한 사랑의 연습 1. 다시 꺼내든 오래된 책 어릴 적 읽었던 『사랑의 기술』, 그리고 다시 펼친 지금의 감정 2. 사랑은 감정일까, 기술일까? 사랑을 감정이 아닌 ‘기술’로 바라보는 발상의 전환 3. 사랑은 성숙의 과정이다 진정한 사랑은 자아의 독립성과 책임감에서 비롯된다 4. 사랑은 연습된다, 관계도 마찬가지로 사랑을 ‘하는’ 것이 아니라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하기 5. 사랑을 방해하는 사회 구조들 현대 사회가 만들어낸 사랑의 왜곡과 결핍 6. 의존과 집착, 사랑과 혼동하지 않기 건강하지 않은 사랑과 헷갈릴 수 있는 감정들에 대한 고찰 7. 자기애에서 출발하는 사랑 남을 사랑하기 전에 스스로를 존중하는 법 8. 사랑은 의지이자 결단이다 조건 없이 주는 사랑의 용기와 실천에 대하여 9. 어른의 사랑을 위하여 낭만을 넘어 책임과 존중을 기반으로 한 관계의 힘 10. 사랑에도 기술이 필요하다 배워가는 사랑, 그리고 나의 사랑법 돌아보기 1장. 다시 꺼내든 오래된 책 이 책을 처음 읽은 건 고등학생 때였다. 사랑이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사랑은 기술이다’라는 말이 뭔가 똑똑하고 철학적인 이야기처럼 들려 흥미로웠다. 하지만 그때의 나는 "사랑은 받는 것이 아니라, 주는 것이다"라는 문장을 그저 멋진 명언쯤으로 받아들였을 뿐이었다. 당연히 문장 하나하나에 담긴 무게나 의미를 다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책장을 넘기며 "그래, 나도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고 싶다"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 후로 꽤 오랜 시간이 흘렀다. 많은 관계를 맺었고, 어떤 인연은 소중했고 또 어떤 인연은 아프게 지나갔다. 나도 모르게 집착하게 되거나, 나를 온전히 잃은 채 누군가에게 매달렸던 기억들도 있다. 그러다 우연히, 오래된 책장에서 이 책을 다시 꺼냈다. 색이 바랜 책등을 보며 '지금 읽으면 좀 다르게 읽히지 않을까?' 싶었던 그 호기심이 나를 다시 프롬으로 이끌었다. 그리고 정말 그랬다. 예전엔 그냥 흘려보냈던 문장들이, 이제는 마음 깊이 박혔다. 예를 들면 "사랑은 수동적인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활동이다"라는 말이 그렇다. 사랑은 저절로 생기는 감정이 아니라, 자발적으로 연습하고 실천하는 기술이라는 그의 주장은 이제야 가슴 깊이 와닿는다. 사랑은 자연스럽게 되는 게 아니라, 끊임없이 ‘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나도 몇 번의 실패를 통해 깨달았기 때문이다.
  • Lila
월요일수요일토요일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 – “나는 누구에게, 어떤 존재일까” 책을 읽는 내내, 자꾸 그 문장이 떠올랐다. “나는 누구에게, 어떤 존재일까.” 『월요일 수요일 토요일』은 그런 질문을 조용히 꺼내게 만드는 책이다. 자극적인 사건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그저 기억이 사라져가는 노인 후베르트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15살 소녀 린다가 한 주에 세 번 같은 공간을 공유할 뿐이다. 그런데도 이야기는 깊다. 단순한 줄거리지만 이 책이 다루는 감정은 결코 단순하지 않다. 관계는 돌봄이 아니라, ‘곁’의 감각 린다는 처음엔 후베르트를 '관리'하려 한다. 정해진 시간에 들르고, 약을 챙기고, 방을 정돈하고, 기억을 보조한다.
  • Lil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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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사 신드롬
나는 왜 늘 누군가를 도와야 했을까 (백기사 신드롬을 읽고) 1. 백기사를 마주하다 2. 착한 사람이 되는 연습 3. 무거운 책임의 시작 4. 나는 왜 늘 피곤했을까 5. 말하지 못한 서운함들 6. 경계라는 용기 7. 돕지 않는 것도 사랑일 수 있다 8. 도우면서도 자유로운 사람 9. 관계를 되돌아보다 1장. 백기사를 마주하다 나는 오래도록 착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누군가 아프다고 하면 마음부터 아팠고, 도움이 필요하다는 말에는 주저 없이 손을 내밀었다. 그런 나를 사람들은 '따뜻하다', '이해심이 깊다'고 했다. 그 말들이 고마웠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말에 내가 너무 익숙해지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 자신을 돌보는 일보다, 누군가를 도와주는 일에 더 익숙해져 버린 건 아닐까. 『백기사 신드롬』이라는 책을 처음 접했을 때, 나는 그저 심리학 책 하나를 읽는 마음이었다. 하지만 책장을 넘길수록 이상하게 마음이 불편해졌다. 저자가 설명하는 '백기사'의 모습은 낯설지 않았다. 오히려 너무도 익숙했다. 타인을 돕는 데서 존재의 의미를 찾고, 도와주지 않으면 불안해지는 사람. 나였다. 책은 말한다. 백기사는 겉보기엔 이타적으로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인정욕구와 불안이 숨어 있다고. 도움이 필요 없는 사람 앞에서 괜히 불편해지고, 내가 없어도 잘 사는 사람에게는 묘한 소외감을 느끼는 감정. 그 모든 것이 내 이야기 같았다. 그제야 나는 깨달았다. 나는 '도와야만 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구나. 누군가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나 자신을 증명하는 방식이 되어 있었다. 그러면서도 '왜 나는 이렇게 자주 지치고 외로운가'를 혼자 곱씹으며, 다시 또 누군가를 돕는 반복 속에 살고 있었다. 백기사를 마주한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정말 괜찮니? 너는 언제쯤 돌봄을 받을 수 있을까?" 이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는 내 안의 감정과 마주하기로 했다. 나를 아프게 했던 관계들, 지우고 싶었던 기억들, 그리고 무엇보다 착한 사람이어야 한다는 부담 속에 눌려 살았던 나 자신과. 이 여정의 시작은 불편하고 조심스러웠지만, 동시에 자유로웠다. 처음으로, 나를 위한 글을 쓰기 시작했다
  • Lila
한강작가의 빛과 실
『빛과 실』 한강 — 고요한 문장 속을 걷다 어떤 책은 독서를 넘어, 묵상처럼 다가온다. 한강 작가의 『빛과 실』이 그러했다. 이 책은 소설이 아니다. 말하자면, 한강이라는 사람의 내면 풍경을 천천히 거닐 수 있도록 허락한 산책로 같은 산문집이다. 이 책은 그녀의 소설이 어떻게 태어났는지, 고요한 시선으로 어떤 풍경을 바라보는지, 그녀가 느끼는 언어의 무게와 빛의 흔적, 삶과 죽음에 대한 감각이 어떻게 엮여 있는지를 보여준다. 책장을 넘길수록, 마치 작가의 정원에 초대받은 손님처럼 느껴진다. 햇빛을 반사시키기 위해 북향 창에 거울을 설치했다는 이야기, 흙을 뒤집고 풀을 뽑으며 계절을 견디는 손끝의 기록, 그 모든 것이 하나의 세계처럼 다가온다. 책의 제목처럼, '빛'은 이 책 전체를 관통하는 주제다. 동시에 '실'이라는 단어도 중요하다. 한강은 언어를 실처럼 여긴다. 우리가 서로를 이해하고 위로하는 그 모든 과정은, 언어라는 실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모든 글쓰기는 눈에 보이지 않는 실을 통해 서로의 마음에 빛을 건네는 일이 아닐까. 그 생각이 무척 오래 남는다. 이 책에서 가장 인상 깊은 부분 중 하나는, 작가가 『소년이 온다』를 쓰던 당시의 고백이다. “과거가 현재를 도울 수 있는가?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할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소설의 방향을 바꾸었다는 대목은 단순한 문학적 전환이 아니라, 인간 존재에 대한 근원적인 사유로 읽혔다. 문장을 따라가다가 전율이 일었고, 묵직한 질문이 오래도록 마음에 남았다. 그녀의 산문은 거창한 해답 대신, 소박한 문장으로 고요하게 다가온다. “사랑이란 어디 있을까? 팔딱팔딱 뛰는 나의 가슴속에 있지. 사랑이란 무얼까? 우리의 가슴과 가슴 사이를 연결해주는 금실이지.” — 이 짧은 문장에서조차 삶과 존재, 그리고 연대에 대한 작가의 감각이 빛난다. 한강이 촬영한 흑백 사진들도 함께 실려 있어, 산문과 이미지가 함께 호흡하는 시집 같기도 하다. 말하지 않아도 전해지는 감정, 그 고요한 언어가 책 전반에 흐른다. 『빛과 실』을 읽는다는 건, 거창한 의미를 쫓기보다 오늘이라는 하루를 조금 더 조용히 살아보는 일이다. 거대한 목소리로 나를 설득하려 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도 삶을 바라볼 수 있다”고 말해준다. 그 말 한마디가, 때로는 시끄러운 세상에서 나를 다시 일으키는 작은 빛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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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의 멸종 — 스크린 너머로 사라지는 것들
『경험의 멸종』 — 스크린 너머로 사라지는 것들 얼마 전, 오래 기다려왔던 소식이 들려왔다. 내가 너무나 사랑하는 영화, 『대부』의 극장 재개봉. 비디오 테이프 시절부터, TV에서 재방송할 때마다 몇 번이고 반복해 봤지만 늘 마음속에 하나의 갈망이 있었다. “이 영화는, 반드시 극장에서 보고 싶다.” 작은 화면이 담아내지 못한 그 장면들, 음향과 조명이 만들어내는 감정의 밀도. 스크린 앞에서, 그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었다. 그런데 한 친구와 대부 이야기를 나누던 중, 우리는 열띤 장면 분석과 주제 토론까지 하고 나서야 그 친구가 사실은 『대부』를 본 적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단지 인터넷으로 요약을 읽었고, 명장면 편집 영상을 몇 번 본 것뿐이었다. 그때 문득 깨달았다. 요즘, 그런 일이 너무 많다는 걸. 우리는 무언가를 ‘경험했다’고 쉽게 말하지만 그건 ‘전해 들은 것’일 때가 많다. 영상 클립 몇 개, 요약본 하나, 누군가의 리뷰. 그 안에서 직접적인 체험은 점점 사라지고 있다. 마치 그 감각을 대체할 수 있다는 듯 기술은 더 편리해지고, 우리는 더 빠르게 스쳐 지나간다. 하지만 정말 그게 ‘경험’일까? 그 질문의 여운이 이 책으로 나를 이끌었다. 『경험의 멸종』은 지금 우리가 처한 문화적 풍경을 조금은 냉정하게 짚어낸다. 경험하지 않고도 말할 수 있고, 겪지 않았지만 아는 척할 수 있는 시대. 그 안에서 감각은 무뎌지고, 공감은 얄팍해진다. 물론 책에 대한 아쉬움도 있었다. 더 깊게 파고들 수 있었던 지점들이 조금은 겉돌듯 스쳐 지나가는 느낌. 그러나 동시에, “맞아, 나도 이런 감정 느꼈어.” 하는 순간들이 여럿 있었다. 특히 AI나 SNS, 메타버스 같은 기술이 우리를 어떻게 ‘경험 없는 존재’로 만들어가는지에 대한 통찰은 요즘의 일상과 정확히 맞물려 있었다. 책을 덮고 나서, 다시 한번 ‘직접 본다’는 것, ‘실제로 듣는다’는 것의 무게를 생각하게 되었다. 나는 여전히, 화면이 아닌 극장에서 『대부』를 보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누군가와 그 이야기를 나눌 때, 그 장면 하나하나를 내 눈으로 본 기억으로 말하고 싶다.
  • Lila
모순을 다시 읽고
삶의 결을 따라 다시 읽은 『모순』 “어떤 책은, 지금의 내가 아니었다면 닿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이 문장을 조용히 떠올리며, 『모순』을 다시 펼쳤다. 읽을 때마다 다르게 느껴지는 책이 있다. 처음엔 그저 그런가 싶다가도 어느 날 문득 다시 마주하면 그때는 왜 몰랐을까 싶은 문장이 있다. 양귀자 작가님의 『모순』은 내게 그런 책이다. 한때는 무심히 넘겼던 이야기였지만, 시간이 흐른 지금, 다시 읽어보니 그 안의 인물들이 너무나 사람 같고 그 말들이 내 삶의 조각처럼 들려온다. 『모순』은 큰 사건 없이 흘러가는 이야기지만, 그 안에는 삶의 굴곡과 감정의 파동이 조용히 자리하고 있다. 이성과 감정 사이에서, 사랑과 현실 사이에서, 우리는 늘 크고 작은 모순을 끌어안고 살아간다. 처음 읽었을 땐 미처 보이지 않던 것들이 지금은 너무나 또렷하게 느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 말 대신 침묵으로 전해지는 감정, 그리고 다정함 속에 스며든 외로움까지. 주인공의 말투, 시선, 선택들이 이젠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나도 그런 선택을 했을지도 모르겠다고, 그 마음이 조금은 이해된다고 느꼈다. 양귀자 작가님의 문장은 여전히 단정하고 맑다. 과하지도 않고, 덜하지도 않게 정확히 그 감정의 깊이만큼만 말해준다. 그래서 더 오래 남는다. 마치 내가 들은 이야기처럼. 이 책은 첫눈에 반한 책은 아니었다. 하지만 서서히, 그리고 확실하게 좋아지게 된 이야기다. 그리고 그런 책이, 결국 더 오래 곁에 남는다. 『모순』을 다시 읽고 나니 한동안 멀어졌던 활자들이 조금 더 가까이 다가온다. 또 하나의 나를, 또 하나의 시절을 들여다본 기분이다. 그리고 또 언젠가, 삶의 또 다른 결 위에서 나는 이 책을 다시 펼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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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좋은 감상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 요즘, 그림 앞에 오래 머무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자주 한다. 비평보다는 감응에 가까운 감상, 설명보다는 느낌으로 닿는 시선. 미술관에 가고 싶어졌습니다.는 그런 내 안의 바람에 조용히 말을 건넨 책이었다. 작가님을 직접 뵌 적이 몇 번 있다. 미술관에서, 혹은 강연장에서. 그는 언제나 뚜렷한 시선으로 이야기를 전했다. 정확하고, 단단하며, 논리적인 설명이지만 그 안에는 사람과 예술을 향한 따뜻한 존중이 담겨 있었다. 책 속에서도 그 느낌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정보를 나열하기보다, 작품 하나를 둘러싼 시대와 작가의 결을 하나의 이야기처럼 풀어내는 방식. 한 장 한 장이 짧은 해설이면서도 마음에 오래 남는 감상이 되었다. 특히 인상 깊었던 건, ‘감상’이라는 행위를 다루는 저자의 태도였다. 그림을 잘 보려면 꼭 무엇을 알아야 할까? 많은 정보를 알고, 예술사를 꿰고 있어야만 가능한 일일까? 저자는 그렇게 묻지 않는다. 대신, "그림을 ‘자기 자리’에서 바라보는 법"을 알려준다. 기억 속의 장면과, 지금의 마음과, 아주 사적인 감정들까지도 미술 앞에선 모두 유효한 감상이라는 사실을 다정하게 되짚어준다. 책을 덮고 나서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좋은 감상자가 되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더 많이 느끼고, 더 조용히 들여다보는 사람. 예술 앞에서 조급하지 않고, 작은 떨림을 오래 간직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리고 또 하나, 좋은 전시를 더 많이 보고 싶어졌다. 미술관이라는 성소 안에서 빛의 방향, 붓의 결, 시선의 정지, 그 모든 미묘한 말들을 천천히 듣고 싶다. 좋은 책은 읽고 나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마음이 아니라, “그렇게 살아보고 싶다”는 감정을 남긴다. 이 책이 내게 남긴 감정이 그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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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타 화이트 북
책 한 권을 받았다. 종이 위의 정성스레 쓰여진 글씨, 그 안엔 마음이 함께 담겨 있었다. 『람타 화이트 북』. 처음 손에 쥐었을 때, 그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어딘가 익숙한 낯설음, 마치 오래전 잊고 있던 무언가가 돌아온 듯한 기분이었다. 첫 페이지를 펼쳤을 때 마음이 조용히 멈추었다. 문장은 단순했지만, 그 울림은 깊었다. “당신은 신이다.”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되뇌었다. 부정도 긍정도 아닌, 그저 오래도록 침묵 속에서 그 말을 가슴에 담아보았다. 책은 설명하지 않았다. 그저 기억나게 했다. 내 안에 존재하는 힘, 내가 나를 창조하고 있다는 단순한 진실. 나는 읽지 않았다. 가만히 들었다. 마치 책이 나를 읽는 듯, 활자가 내 안의 무언가를 건드렸다. 책을 읽는 동안 나는 자주 멈췄다. 숨을 쉬고, 눈을 감고, 가만히 앉았다. 그 고요 속에서 문장 하나가 내면 깊숙이 들어와 파문처럼 퍼져나갔다. 시간도 없고, 방향도 없고, 단지 ‘지금 이 순간’만이 진짜라는 메시지는 언제나 명상이 말하던 바였다. 그러나 이 책에서 들은 그것은 이성보다도 더 본질적인 어떤 울림이었다. 나의 생각이 나의 세계를 만든다. 말은 쉬웠지만, 그 의미는 깊었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의도되지 않은 현실’을 살았던가. 그 깨달음은 부드럽고도 강하게 나를 깨웠다. 책장을 덮을 때쯤, 나는 한 사람이 아닌 빛으로 돌아온 느낌이었다. 이제는 누가 되려 하지 않아도 된다. 내가 누구인지 기억해냈으므로. 『람타 화이트 북』은 철학서가 아니었다. 그건 하나의 길이었고, 거울이었으며, 지금 여기로 나를 데려오는 초대장이었다. 이 책을 선물해준 손길에 다시 한 번 감사한다. 그것은 단지 종이의 묶음이 아니라, 삶을 다시 들여다보게 하는 창이 되어주었기에. 나는 오늘도 가만히 묻는다. “지금, 어떤 생각을 선택하겠는가?” 그리고 그 생각 안에서, 나는 나의 세계를 조용히 빚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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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를 지키다
사랑을 말하는 일이 한때는 낯설고 멀게 느껴졌습니다. 누구나 사랑을 한다고 말하지만, 정작 그 의미를 진심으로 헤아리는 일은 드물죠. ‘사랑해’라는 말은 참 쉽게 흘러나오지만, 그 말이 가진 무게를 끝까지 견뎌본 사람은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기까지 시간이 걸렸습니다. 『그녀를 지키다』를 처음 읽었을 때, 저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습니다. 등장인물의 감정보다, 그의 태도와 선택이 저를 붙잡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그 사람을 떠나보내야 했던, 곁에 남지 않기로 결심하면서도 끝까지 ‘지켜낸’ 그 사람의 서사. 그건, 감정이 아닌 책임의 형태로 남은 사랑이었습니다. 저는 이 글에서 내 감정을 앞세우지 않기로 했습니다. 오히려 주인공의 서사를 따라가며, ‘지킨다’는 말이 어떤 삶의 방식인지 바라보려 했습니다. 함께 있지 않아도, 손을 잡지 않아도, 그 사람을 향한 마음이 여전히 같은 자리에 머물 수 있다는 걸요. 사랑은 감정의 크기로 증명되지 않고, 떠난 뒤에도 남아 있는 태도로 가늠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이 글은 그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를 지켜보던 나의 이야기입니다. 함께하지 않아도 사랑일 수 있다 사랑은 언제부터 함께 있는 걸 의미하게 되었을까. 같은 자리에 머물고, 같은 것을 보고, 같은 미래를 말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믿게 된 건 언제였을까. 하지만 『그녀를 지키다』의 그를 보며, 나는 처음으로 그 믿음이 틀릴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함께하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더 깊이 사랑했던 사람. 그는 곁에 머무르기보다, 그녀의 뒷모습을 지켜주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떠나려 했다. 지친 얼굴로, 무거운 눈으로, 말없이 짐을 꾸렸다. 그리고 그는 묻지 않았다. “왜 떠나?” “어디 가?” 그런 흔한 질문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조용히 그녀의 옷자락이 문을 통과하는 순간까지 바라보았다. 사랑한다면 붙잡아야 한다는 말이 틀릴 수도 있다면, 그건 아마 이런 순간 때문일 것이다. 그가 그녀를 바라보는 장면은 대사도 없고, 눈물도 없다. 하지만 나는 그 장면에서 가장 많은 것을 느꼈다. 붙잡지 않음으로써, 그녀를 온전히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 그건 감정보다 더 강한 것이었고, 그가 지닌 사랑의 형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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