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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 그리고 빛

바람이 되고 싶은 나에게 1

Lila
Oct 16, 20258m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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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이 되고 싶은 나에게』

에리히 프롬을 읽고 다시 생각한 존재하는 삶

목차

1. 존재하는 삶
존재에 대한 첫 질문, “나는 어디쯤 살고 있을까”

2. 소유의 삶에 익숙한 나
갖고 있어야만 안심이 되는 삶의 패턴들

3. 에리히 프롬의 문장과의 첫 만남
낯선 질문에서 시작된 사유의 시간

4. 소유냐 존재냐 – 두 삶의 태도
프롬이 말하는 삶의 방식 비교

5. 존재의 기술 - 배워야 하는 삶의 방식
존재는 감각이자 연습이다

6.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 내 삶을 돌아보며
관계와 인정 욕구에 기대어온 나

7. 존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지금 여기를 사는 감각과 순간들

8. 소유의 언어 vs 존재의 언어
말의 방식이 바꾸는 삶의 무게

9. 존재하는 사랑
사랑마저 소유하려는 습관에서 벗어나기

10. ‘있음’의 힘 – 나를 지우지 않는 삶
존재는 사라짐이 아니라 선명함이다

11. 프롬이 읽은 불교와 존재
사성제와 명상적 삶, 동양과 서양의 접점

12. 소비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가지려는 나’에서 ‘살아내는 나’로

13. 존재의 일기 – 있는 그대로의 하루 쓰기
하루를 쓰는 연습, 존재를 기록하는 방법

14. 관계 속 존재 – 상대를 소유하지 않기
타인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태도

15. 소유 중심 사회를 살아가는 법
존재의 가치를 지키는 작지만 현실적인 선택들

16. 존재의 기술을 연습하는 방법들
반복 가능한 작은 실천들로 존재를 훈련하기

17. 침묵과 고요의 가치
멈춤 속에서 만나는 내면의 소리

18. 나에게 집중하는 법 – 자아의 중심 찾기
중심이 흔들리지 않는 삶의 힘

19. 삶의 방식은 선택이다
매 순간의 방향을 스스로 결정하는 용기

20. 나는 존재한다, 고로 충분하다
더 이상 증명하지 않아도 되는 상태

21. 가을이라는 계절, 존재라는 사유
계절이 건네는 존재의 감각

22. 삶을 바꾸는 질문
“나는 지금 존재하고 있는가”라는 물음의 힘

23. 함께 존재하는 공동체
경쟁보다 공감, 소유보다 연결을 택하는 공간

24. 존재로 살아내는 용기
흐름을 거슬러 나를 지키는 태도

25. 바람이 되고 싶은 나에게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보내는 편지

서문

“나는 어디쯤 살고 있을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은 잘 살아가고 있는 것 같다가도, 어떤 순간엔 나조차 나를 모르겠다는 느낌이 든다.
나는 지금 어디쯤 있는 걸까.
나는 진짜로 존재하고 있는 걸까.
아니면, 하루하루를 ‘살아낸다’는 말로 포장하며 버티고 있는 걸까.
그런 물음들이 조용히 마음속 어딘가에 자리를 잡던 어느 날,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와 『존재의 기술』을 다시 읽었다.
이전과 전혀 다른 깊이로 문장들이 가슴에 닿았다.
낯익은 말들 속에, 처음 듣는 울림이 숨어 있었다.
삶이 달라진 걸까,
아니면 이제야 그 문장들을 이해할 준비가 된 걸까.
이 책을 읽는 동안, 나는 많이 고요해졌고, 스스로에게 더 많은 질문을 던지게 되었다.
그 질문들 속에서 문장들이 피어났고,
그렇게 이 에세이는 시작되었다.

다만, 존재하고 싶다는 마음.
무언가를 가져야만 괜찮은 존재가 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있어도, 바라만 봐도, 숨 쉬는 것만으로도 괜찮다는 믿음을 향해 쓰는 글이다.
어쩌면 이 글은, 바람이 되고 싶은 나에게 띄우는 편지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당신도 지금, 존재하는 삶에 대해 조용히 생각하고 있다면,
이 편지가 당신에게도 닿기를 바란다.

Lila 드림

1. 존재하는 삶

존재하는 삶이란 어떤 것일까.
무언가를 가져야만 안심이 되는 마음,
무언가를 이뤄야만 살아 있는 것 같은 이 감각.
그 익숙한 삶의 방식들 속에서 문득 멈춰 서게 되는 순간이 있다.
지금 나는 정말 존재하고 있는 걸까, 라는 질문과 함께.
자유롭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그 자유는 어쩌면 시간이나 상황이 아니라
늘 나 자신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해야 할 일, 보여줘야 할 역할, 그래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라는 믿음.
그 모든 걸 내려두고서도
나는 여전히 나로서 괜찮은 걸까.
창밖의 나뭇잎이 바람을 따라 흔들리는 걸 보며
나는 바람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무엇이 되지 않아도 괜찮고,
어디에도 닿지 않아도 그저 머무는 존재.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건
어쩌면 그런 존재감이었는지도 모른다.
에리히 프롬은 존재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상태가 아니라 내면의 감각을 살아 있게 하는 기술이라고 말한다.
삶을 제대로 살아내려면
무언가를 소유하는 법이 아니라
그저 ‘존재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나는 아직 그 기술을 잘 모른다.
하지만 배우고 싶다.
그 시작은 어쩌면
이 질문을 다시 꺼내는 데서부터인 것 같다.

존재하는 삶이란
무엇을 하지 않아도,
무엇을 가지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조용하고 단단한 감각이라는 생각이 든다.

2. 소유의 삶에 익숙한 나

생각보다 더 오래, 나는 소유의 삶 속에서 살고 있었다.
무언가를 갖는 것이 곧 나라는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처럼 느꼈다.
좋은 학교, 괜찮은 일자리, 신뢰받는 사람이라는 이름.
사실은 그 모든 것이 ‘갖기 위한’ 삶의 일부였다는 걸
프롬의 문장을 통해 천천히 깨닫게 되었다.
누군가와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이 나에게 잘해주는 이유,
함께 시간을 보내는 의미,
모두 내 안의 ‘소유 욕망’으로 해석하곤 했다.
“내 사람”, “내 자리”, “내 몫”이라는 말들이
늘 당연하게 느껴졌던 것도 그래서였을까.
어쩌면 우리는 모두,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소유’를 배워온 것 같다.
어떤 성취는 박수받아야 하고,
어떤 기준은 따라야 하며,
무언가를 이루지 못하면
실패라는 낙인이 찍히는 사회 속에서.
존재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건
“무엇을 가졌느냐”였으니까.
그러니 존재의 삶이라는 개념은
처음엔 조금 당황스러웠다.
소유를 멈추라는 말처럼 들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롬은 그저 ‘갖지 말라’고 말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그렇게까지 애쓸 필요 없다’고 조용히 말해주는 것 같았다.

무언가를 갖기 위해 자신을 놓쳐버리는 삶은
결국 아무것도 가진 게 아닐 수도 있다고.
나는 참 많은 걸 원했었다.
사랑, 존중, 인정, 안정감…
그걸 갖는다면 편안해질 줄 알았고
내 삶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런데 하나하나 손에 넣을수록
왠지 더 불안하고 초조해졌다.
다음엔 뭘 가져야 이 공허함이 채워질까,
그 생각만 늘어갔다.
그 모든 욕망을 멈추고,
잠시라도 지금 여기에서
‘나는 충분히 괜찮다’고 말하는 일.
그게 바로 존재의 시작이 아닐까.
나는 아직 완전히 익숙하지 않다.
무언가를 갖지 않아도 괜찮다고,
사람들에게 보여줄 성과 없이도
존재로서 괜찮다고 말하는 일이.
하지만 그게 가능한 삶이 있다면
나는 기꺼이 그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보고 싶다.

소유의 삶에서
조금씩 존재의 삶으로.

3. 에리히 프롬의 문장과의 첫 만남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준비되지 않은 상태였다.
삶에 대한 갈증은 있었지만 사유할 여유는 없었고, 책은 그저 지루할 것 같았다.

다시 집어 든 책은 첫 문장에서 나를 멈춰 세웠다. “갖기 위해 사는 삶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해 살아야 한다.” 그 문장은 조용히, 그러나 정확하게 내 안을 울렸다.

프롬의 문장들은 강요하지 않는다.
설득하려 하지도 않는다.
그저 ‘이건 네 안에도 이미 알고 있는 감각이야’ 하고
다정하게 건네는 듯한 느낌이었다.
나는 그 다정함 앞에서 자꾸만 멈춰 섰다.
빠르게 넘길 수가 없었다.
그의 말들은 내가 지금까지 잘 살아온 줄 알았던 방식들을 조금씩 의심하게 만들었다.
성공이라는 이름의 껍질, 관계에서의 끊임없는 기대와 비교, 나조차 나를 평가하던 시선들.
그 모든 게 ‘소유의 삶’이었다는 걸
조금씩 인정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놀라웠던 건 그 깨달음이 결코 나를 부끄럽게 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프롬은 비난하지 않았다.
다만 “이 방향도 있어”라고 말해주었고,
그 방향에는 ‘존재하는 삶’이라는
익숙하지만 한 번도 진지하게 들여다보지 않았던 풍경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그의 문장들과 아주 천천히 마주하기 시작했다. 몇 문장을 읽고는 덮고, 다시 돌아가 읽고,
다시 또 멈춰서 마음을 들여다보는 과정.
그건 책을 읽는 시간이 아니라
내 삶을 다시 바라보는 시간이 되었다.
프롬의 말들은 책 너머에서 나를 오래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다.지금이야말로 그 문장들과 정면으로 마주할 준비가 된 것 같았다.

4. 소유냐 존재냐 – 두 삶의 태도

프롬은 아주 명확하게 구분한다.
소유하는 삶과 존재하는 삶.
그는 말한다.
우리는 대개 ‘나는 그것을 갖는다’는 방식으로 세상을 이해한다고.
그리고 그건 단순히 물건이나 재산에 국한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이 책을 갖고 있다.”
그건 아주 익숙한 말이다.
그런데 그 말이 “나는 이 책을 읽었다”나 “이 책이 내 안에 남아 있다”와는
전혀 다른 의미를 지닌다는 걸,
프롬은 아주 날카롭게 짚어낸다.
소유 중심의 태도는 모든 것을 ‘나의 것’으로 만들고 싶어 한다.

시간, 사람, 감정, 심지어 지식조차도.
그래서 우리는 누군가를 사랑할 때도
자주 이렇게 말하곤 한다.
“내 사람”, “내 연인”, “내 친구”…
그 말에는 알게 모르게
상대방을 소유하려는 마음이 스며 있다.

반면, 존재 중심의 삶은
소유하지 않더라도 깊이 연결되는 상태를 말한다.
그건 감정이 흐르는 그대로 머물게 두고,
사람이 떠난다고 해도 그를 ‘갖지 못한 실패’로 여기지 않는 태도다.
조금 더 열려 있고, 조금 더 자유롭다.
나는 이 두 개의 삶의 태도를 오랫동안 혼동하며 살아왔다.
갖는 것이 곧 살아 있는 증거라고 믿었다.
그래서 삶은 늘 어떤 결핍을 채우는 과정 같았고,
관계는 늘 불안했다.
조금만 멀어져도
내가 가진 걸 잃는 것 같은 공포가 생겼다.
하지만 존재 중심의 삶은 다르다.
거기엔 소유가 아니라 ‘경험’이 있다.
그 사람과 함께한 시간,
마주 앉아 나눈 말들,
함께 웃었던 순간들…
그 모든 것은 갖지 않아도 내 안에 남는다.

프롬은 존재 중심의 사람은 매 순간 살아 있고,
그 순간 자체가 충만하다고 말한다.
그건 어느 날 갑자기 생기는 감각이 아니라,
조용히 훈련되고 길들여지는 감각이다.
나는 이제 두 삶의 태도를 구분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여전히 소유의 습관이 강하게 남아 있지만
존재의 삶을 향해 나아가고 싶다.
좀 더 가볍게,
좀 더 자유롭게.
무언가를 쥐기보다는
그저 그 자리에 조용히 머무는 사람이고 싶다.

5. 존재의 기술 – 배워야 하는 삶의 방식

존재하는 삶은
마치 원래부터 나에게 익숙한 것 같지만
막상 시도해보면 너무도 낯설다.
‘존재’는 늘 나에게 있었던 상태 같지만
프롬은 그것을 ‘기술’이라고 말한다.

존재하기 위해서는
그에 맞는 태도와 연습이 필요하다고.
우리는 많은 기술을 배우며 자란다.
말하는 법, 걷는 법, 글 쓰는 법,
그리고 무엇보다 ‘사는 법’.
그런데 그 ‘사는 법’ 대부분은
경쟁과 소유에 적응하는 방식이었다.
존재의 기술은 그 반대다.
무언가를 더하는 것이 아니라
덜어내고, 멈추고, 바라보는 쪽에 가깝다.
말을 줄이고, 속도를 늦추고,
내 안에 어떤 감각이 깃드는지를 알아차리는 일.
어쩌면 가장 간단하지만
그래서 가장 어려운 기술일지도 모른다.
프롬은 존재하는 삶을 위해 필요한 네 가지 요소를 제시한다.

주의 깊은 집중, 규율, 인내, 그리고 헌신.
이 네 가지는 흔히 우리가 ‘사랑’에 대해 이야기할 때도 필요한 덕목이지만
존재의 기술을 익히는 데도 똑같이 중요하다.
특히 ‘주의 깊은 집중’이라는 말이 마음에 남았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고,
지금 이 순간, 나를 살아가는 것.

그 단순한 집중이
존재를 가능하게 만든다.
존재의 기술은 완성되는 것이 아니다.
그건 평생에 걸쳐 연습하는 삶의 태도다.
실수해도 괜찮고, 잊어버려도 다시 돌아오면 된다.
바람처럼 다시 불어오면 된다.
나도 조금씩 연습하고 있다.
하루 중 짧은 시간이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가만히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간을 만든다.
그 시간 속에서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증명하지 않아도 괜찮은 존재로
잠시 머물 수 있다.

존재는 기술이다.
그래서 존재는 연습할 수 있다.
나는 지금, 그 연습을 조금씩 해나가고 있다.

6.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 내 삶을 돌아보며

존재에 대해 생각하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내 삶을 돌아보게 되었다.
나는 어떻게 살아왔을까.
어떤 순간을 갈망했고,
어떤 장면을 견디며 지나왔을까.
그리고 그 모든 시간 속에서
나는 나 자신을 어떻게 대하고 있었을까.
나는 늘 누군가가 되고 싶었다.
조금 더 나은 사람,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
기대에 부응하는 사람.
그래야만 ‘괜찮은 인간’이라고
나를 인정해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는 내 안에는
소유 중심의 사고가 깊게 자리 잡고 있었다.

사랑도, 일도, 관계도
늘 ‘얻어야 할 것’처럼 느껴졌다.
좋은 관계, 따뜻한 말, 인정, 사랑…
이 모든 건 내가 뭔가를 해내야 받을 수 있는 보상 같았다.
그래서 언제나 열심히 애쓰며 살아왔고,
한편으로는 항상 긴장하고 있었다.
그런 삶은 나를 지치게 했다.
잠시 멈춰도 괜찮다고 스스로에게 말하지 못했고,
마음을 놓는 순간
무언가 잃을까 봐 불안했다.
그래서 종종 내가 살아 있는 이유가
‘사랑받기 위해서’ 혹은 ‘쓸모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인 것만 같았다.
프롬의 책을 읽으면서,
나는 처음으로 그 모든 질문들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살아가는 이유가
‘존재하기 위해서’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건 어떤 모습일까?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나는 이미 괜찮은 사람이라고 믿는 것.
어떤 성취나 타인의 인정 없이도
나 자신을 향해 “잘 살고 있어”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그게 존재 중심의 삶이 아닐까.
나는 아직 그 믿음이 서툴다.
오랜 시간 동안 익숙했던 방식이
여전히 내 안에서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는 알아차릴 수 있다.

그 믿음이 나를 얼마나 조급하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지금 나는
그 조급함에서 벗어나려는 중이라는 것을.
내 삶은 분명
‘소유하려는 사람’의 삶이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존재하고 싶은 사람’이 되고 싶다.
그 차이는 생각보다 크고,
그 다름이 조금씩 나를 바꾸고 있다.

7. 존재의 삶은 어떤 모습일까?

존재의 삶이라고 하면
어떤 거창한 장면을 떠올릴 수도 있다.
도심을 떠나 자연 속에서 사는 삶,
욕망을 초월한 듯 고요하고 평화로운 사람.
하지만 그런 이미지는
존재를 너무 멀리 있는 것처럼 만들기도 한다.
프롬이 말하는 존재의 삶은
그보다 훨씬 작고, 조용하고, 일상적인 것에 가깝다.
오히려 가장 평범한 순간에
존재는 선명하게 드러난다.
아침 햇살이 창으로 스며드는 순간,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앉아 있는 시간,
혼자 걸으며 바람 소리를 듣는 그 고요함.
존재는 그런 순간 안에서 깨어 있다.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괜찮은 시간,
지금 이대로 충분하다고 느끼는 마음,
그게 존재의 감각이다.

나는 그 감각을 종종 놓치고 산다.
무언가를 해야 할 것 같고,
계획과 일정 사이에서 허둥댈 때면
존재는 내게서 멀어진다.
하지만 아주 가끔,
멈춰서 숨을 고르고,
지금 여기 있는 나를 느끼는 순간이 있다.
그땐 진짜 내가 나에게 돌아오는 것 같다.
존재의 삶은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다.
겉으로 보기엔 조용하고 아무 일 없어 보이지만
그 속엔 감각과 의식이 가득 차 있다.
그건 지금 이 순간과 온전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다.
마치 바람이 나뭇잎을 스치듯
어떤 흔적을 남기지 않으면서도
명확하게 존재하는 것.
나는 요즘 그걸 연습 중이다.
작고 소소한 일상 속에서
존재의 감각을 더 자주 느끼려 한다.
걷기, 듣기, 느끼기.
그 모든 게 ‘존재하는 삶’의 연습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존재는 목적지가 아니라,
매 순간의 방식이다.
무언가 되지 않아도 괜찮고,
무엇을 가지지 않아도 충분한 삶.
그건 머나먼 이상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나의 숨결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
참 고맙게 느껴진다.

8. 소유의 언어 vs 존재의 언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
“내 일”,
“내 감정”.
우리는 말 속에서 끊임없이 ‘내 것’을 만든다.
그건 너무 자연스럽고 익숙해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프롬은 말한다.
언어는 우리의 사고를 반영할 뿐 아니라,
사고를 규정하기도 한다고.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 속에
삶의 태도와 세계관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는 것이다.
소유의 언어는 늘 쥐려 한다.

그 감정이든, 사람이든, 경험이든
모든 것을 ‘가지려는’ 방향으로 흐른다.
그래서 우리는 사랑도, 우정도, 기억조차도
‘소유 가능한 것’처럼 말한다.
반면 존재의 언어는
그저 함께하는 상태에 더 가깝다.
“나는 그 사람과 사랑을 느낀다”,
“이 순간이 따뜻하다”,
“내 마음이 움직이고 있다” 같은 표현은
어떤 것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살아 있는 감정을 담아낸다.
존재의 언어는 자세히 들여다보면
더 느리고, 더 섬세하고, 더 열린 말들이다.
그 말들 속에는 쥐고 흔드는 힘보다
머물고 바라보는 힘이 있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내가 어떤 말로 내 삶을 말하고 있는지
조금 더 유심히 듣게 되었다.
특히 ‘내 것’이라는 표현이 나올 때,
그게 정말 내가 지닌 것인지,
혹은 그저 지금 함께하고 있는 것인지
묻고 싶어졌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도 존재의 언어가 필요하다.
소유의 말은 관계를 좁히고,
존재의 말은 관계를 확장시킨다.
같은 말을 하더라도 그 뉘앙스가 바뀌면
마음의 결이 달라진다.

나는 이제 내가 쓰는 말이
존재를 담고 있는지를 살피고 싶다.
말이 생각을 만들고, 생각이 삶을 만든다는 걸
이제는 조금 알 것 같기 때문이다.
존재의 언어는 더 부드럽고, 더 따뜻하고,
더 자유로운 말이다.
그 말 속에서
나는 누구도 소유하지 않으면서도
깊이 연결될 수 있음을 느낀다.

9. 존재하는 사랑

사랑한다는 건 늘 아름답고도 어렵다.
그 감정이 진심일수록 우리는 자주 헷갈린다.
이 마음이 사랑인지, 기대인지, 의존인지.
프롬은 사랑을 ‘존재의 방식’으로 본다.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능동적인 행위이고,
타인을 향해 나 자신을 주는 능력이다.
그리고 그 사랑은
소유하려 하지 않을 때
비로소 깊어진다고 그는 말한다.

나는 예전엔
사랑이란 서로를 가지는 일이라 생각했다.
서로의 마음, 시간, 온기를
내 것처럼 느끼는 일.
하지만 그럴수록
사랑은 점점 불안해지고
조금만 어긋나도 상처로 번져버렸다.

존재하는 사랑은 다르다.
그건 ‘너는 내 사람’이 아니라
‘너는 너로서 있어줘서 고맙다’는 마음이다.
어떤 행동이나 조건 없이
그 사람이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따뜻해지는 마음.
그런 사랑을 주는 건 어렵다.
나도 여전히 누군가의 말 한 마디에
기분이 휘청이고,
확인을 받고 싶고,
애써 내 자리를 확인하고 싶어질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존재하는 사랑’이란 무엇이었는지
다시 떠올려 본다.

존재하는 사랑은 기다릴 줄 알고,
침묵할 줄 알고, 스스로를 잃지 않는 사랑이다.
그 사랑 속에서
나도 너도 있는 그대로 괜찮다고 말할 수 있다.
사랑도 결국 존재의 기술처럼
배워야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소유의 사랑에서
존재의 사랑으로
조금씩 나아가는 과정.
나는 지금 그 길 위에 있다.
그리고 그 길이
조금은 고요하고,
조금은 두렵지만
분명히 더 자유롭다는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다.

10. ‘있음’의 힘 – 나를 지우지 않는 삶

어떤 사람들은
조용하고 겸손하게 살아가는 법을 배우며
스스로를 ‘작게’ 만드는 것이 미덕이라고 생각한다.
나도 그런 사람이었다.
내가 너무 커 보이지 않도록,
다른 이들보다 튀지 않도록,
늘 눈치 보고 조심스럽게 존재했다.

하지만 프롬은
존재한다는 건  사라지거나 숨는 일이 아니라
나를 있는 그대로 드러내는 일이라고 말한다.
진짜 존재는 자기를 지우는 게 아니라
스스로의 중심을 지켜내는 일이라고.
존재의 힘은 소리를 크게 내는 데 있지 않다.
말을 많이 하거나
스스로를 내세우는 데에도 있지 않다.
존재의 힘은 나를 온전히 느끼는 데서 시작된다.
내가 나를 알고, 내가 나와 함께 있을 수 있는 것.
나는 때로 불편한 감정을 피하기 위해
나를 지운 적이 있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느라 내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내가 괜찮다고 스스로를 속이며
지나온 시간들이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삶은
결국 나를 점점 흐릿하게 만들었다.
타인을 위한 배려가
스스로를 소외시키는 일이 될 수도 있다는 걸
늦게야 깨달았다.
이제는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나를 드러내는 연습을 하고 있다.
화가 났을 땐 화가 났다고 말하고,
슬플 땐 그 감정을 부끄러워하지 않으려 한다.
그것이 나를 드러내는
가장 솔직한 존재 방식이기 때문이다.
‘있음’의 힘은 그 어떤 말보다 강하다.
내가 진짜로 거기에 있는 것,
그 자체가 때론 누군가에게
커다란 위로가 되기도 한다.
더 이상 나를 작게 만들지 않으려 한다.
남을 해치지 않는 방식으로
내 존재를 지켜내고,
내 감정을 존중하면서
이 삶을 살아가고 싶다.
나를 지우지 않고도
충분히 함께할 수 있는 삶.
그게 진짜 존재하는 삶이라는 걸 이제는 안다.

11. 에리히 프롬이 읽은 불교와 존재

에리히 프롬의 글은 종종 불교와 삶을 바라보는 깊이 있는 통찰이 닮아 있다. 『존재의 기술』 후반부에서 그는 본격적으로 불교 사상을 언급한다.
특히 사성제, 무상(無常), 무아(無我) 같은 개념은 그가 말하는 ‘존재 중심 삶’과 깊이 맞닿아 있다.
프롬은 고통의 원인을 ‘집착’이라고 본다. 우리는 사랑, 성공, 지위, 사람에게 끊임없이 집착한다.
그 집착은 결국 소유의 언어로 세상을 해석하게 만들고, 더 많이 가져야만 더 괜찮은 사람이라 여긴다.

하지만 불교는 말한다.
고통은 생로병사에서 오는 게 아니라, 그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붙잡고자 할 때 시작된다고. 프롬 역시 같은 통찰에 다다른다.
그는 존재의 삶을 ‘깨어 있는 삶’이라고 표현했다.
불교의 ‘정념(正念)’처럼, 지금 이 순간에 온전히 존재하며 살아 있는 감각을 느끼는 것. 거기엔 아무런 소유도 없다.
그저 감각하고, 느끼고, 있는 그대로 머무는 연습이 있을 뿐이다.
프롬이 강조한 ‘존재의 기술’은 단순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다.
그는 존재하는 삶은 훈련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 훈련은 마음챙김과도 닮아 있다.
매 순간 스스로를 살피고, 욕망과 불안을 내려놓고, 진짜 나의 감각과 연결되는 일. 그것이 프롬이 말한 존재이며, 불교가 지향하는 삶의 태도이기도 하다.
그의 글을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서양 심리학자이자 철학자였던 프롬이 동양 사상의 깊은 뿌리까지 닿았음을 알게 된다.
존재는 결국 문화와 종교를 넘어선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물음이며, 그 물음에 대한 답은 경계 너머 어딘가에서 조용히 만나고 있는 것이다.

12. 소비하는 삶에서 벗어나기

지금의 삶은 매 순간 선택의 연속이다.
무엇을 먹을지, 입을지, 살지, 볼지.
우리는 ‘선택하는 존재’로 살아가지만,
그 선택의 대부분은 ‘갖기 위한 선택’이라는 걸 종종 잊는다.
더 나은 제품, 더 높은 효율,
더 특별한 경험을 얻기 위한 선택.

에리히 프롬은 우리는 소비하는 인간이 되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지 물건에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사람도, 시간도, 감정도
우리는 점점 더 ‘소비’하는 방식으로 다룬다.
좋아하는 사람과의 대화조차
나에게 어떤 감정을 주는지를 계산하고,
여가시간도 ‘잘 써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린다.
심지어 독서나 산책 같은 고요한 행위마저
생산성과 연결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다고 여긴다.
프롬은 이것이 소유 중심 삶의 가장 위험한 지점이라고 지적했다.
‘더 많이’가 삶의 기본값이 되어버린 사회.
갖지 않으면 불안하고,
소비하지 않으면 존재감이 흐려지는 세계.
하지만 존재 중심의 삶은 다르다.
그건 무언가를 ‘갖는’ 데서 오는 안정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로도 충분하다는
내면의 감각에서 시작된다.
나는 요즘 이런 연습을 해본다.
뭔가를 당장 사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하기.
지루한 순간에도 핸드폰을 들지 않고
그저 멍하니 있어보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내가 무엇을 줄 수 있을까’를 먼저 떠올리기.
아주 작은 변화지만, 그 속에서 내가 조금 더‘존재하는 사람’에 가까워지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아무것도 갖지 않아도 풍요로운 순간이 분명 존재한다는 걸 조금씩 알아가는 중이다.

13. 존재의 일기 – 있는 그대로의 하루 쓰기

요즘 나는 하루를 마무리할 때 짧은 일기를 쓴다.
무언가 특별한 사건이 있어서가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나를 확인하고 싶어서이다.
“오늘 나는 어떤 느낌이었지?”
“내가 진짜 느낀 건 무엇이었을까?”
이런 질문들로 하루를 다시 살아본다.
그 순간, 조금 더 나에게 가까워진다.
존재 중심의 삶은
대단한 철학이나 어려운 수행이 아니다.
오히려 너무도 사소한 시간 속에 숨어 있다.
길을 걷다 멈춰서 본 하늘,
말없이 함께한 누군가의 옆모습,
불쑥 올라온 슬픔을 애써 밀어내지 않고
그냥 바라보는 것.

에리히 프롬은 존재의 감각은 바로 이런 순간 속에 숨어 있다 말한다.
그리고 그 감각을 붙잡는 연습이 바로 ‘기술’이라고.
나는 하루 중 그런 순간들을 붙잡아 글로 옮겨본다.
좋았던 것뿐 아니라
짜증 났던 일, 불편했던 말,
가끔은 별일 없이 스쳐간 무감각까지.
그 모든 걸 피하지 않고 적어보는 일.
그것이 바로 나를 바라보는 첫걸음이다.
존재의 일기는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 아니다.
평가도, 해석도 필요 없다.
다만, ‘내가 나로서 여기에 있었다’는 조용한 확인.
그렇게 하루를 마무리하면 조금 더 단단해진다.
내일의 나도, 오늘처럼
존재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생긴다.

14. 관계 속 존재 – 상대를 소유하지 않기

사람을 좋아한다는 건,
그 사람과 더 가까이 있고 싶다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의 생각을 알고 싶고, 하루를 함께 나누고 싶고,
때로는 내 감정을 그가 먼저 알아채주길 바란다.
그런 마음 자체는 참 자연스럽고 사랑스럽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마음은 소유의 언어를 입기 시작한다.
“왜 내 마음을 몰라줘?”
“나만큼 너도 나를 생각해?”
조금 더 나에게 집중해주길,
조금 더 나에게 머물러주길,
알게 모르게 바라는 순간들.

에리히 프롬은 진짜 사랑은 자유롭게 한다고 했다.
그 사람이 그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도록
공간을 주는 것이 사랑이라고.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존재의 방식이라고.
그 문장을 처음 읽었을 때,
나는 괜히 마음이 조용해졌다.
아마도 나도, 사랑을 주는 척 하면서
상대를 내 기대 안에 두고 싶어 했는지도 모른다.
내가 더 사랑받고 있다는 확신이 필요해서,
나만큼 상대도 애쓰고 있다는 증거가 필요해서.
그런데 이제 조금은 안다.
사랑은 계산이 아니고,
존재는 비교가 아니다.
있는 그대로의 나처럼,
그 사람도 그 사람의 속도와 결로
그 자리에 있어줄 뿐이라는 걸.
관계 속에서 존재하려면
먼저 내가 나로서 편안해야 한다.
내가 내 감정에 솔직하고,
상대의 마음을 억지로 해석하지 않으며,
함께 있어도 나 자신을 잃지 않는 상태.
가까워지기 위해
서로를 움켜쥐기보단,
가볍게 마주 잡은 손처럼
느슨하지만 단단한 신뢰로 연결되어 있는 관계.
나는 이제,
누군가를 온전히 ‘가지려’ 하지 않고
그 사람이 ‘존재하는 모습’을
조용히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15. 소유 중심 사회를 살아가는 법

존재 중심의 삶을 말하면서도,
우리는 소유 중심의 사회에서 살아간다.
결국 누가 더 많이 가졌는가,무엇을 성취했는가,
어떤 타이틀을 붙였는가가
사람의 가치를 가늠하는 기준이 되어버린 세상.
그런 환경 안에서
‘존재’라는 말은 때때로 무기력하게 들리기도 한다.
지금 이 순간을 느끼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는 것이
정말 가능한 일일까?
그렇게 살아도 괜찮은 걸까?
에리히 프롬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답한다.

비록 우리가 놓인 시스템이 소유를 중시하더라도,
그 안에서 존재하는 삶의 가치를 지켜갈 수 있다고.
그건 세상과 싸우는 방식이 아니라,
나의 선택을 조금씩 바꾸는 방식이다.
나는 아침 루틴부터 달리 해보기로 했다.
더 많은 것을 하려는 욕심보다는
하나를 천천히 해내는 시간.
내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사실을
작게나마 느끼는 일부터 시작했다.
세상은 계속 속도를 높이고 성과를 재촉하겠지만,
그 안에서 나는 내 호흡만큼은 지키기로 했다.
나의 걸음으로, 나의 리듬으로 살아보기.
가끔은 침묵하는 사람이 되기로 했다.

무언가를 말하지 않아도
존재가 사라지는 게 아니라는 걸
스스로에게 믿게 하기 위해서.
존재 중심의 삶은 결국 소유 중심 사회 안에서
나만의 균형을 찾아가는 일이다.
흐름에 휩쓸리지 않고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를 자주 확인하는 것.
그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실천이고, 다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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