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고요의 품, 겨울에 머물다 2

하얀 여백의 시간

​눈이 내린 뒷마당은
아무도 쓰지 않은 거대한 편지지가 됩니다
어제까지의 어지러운 발자국도
지우고 싶었던 후회 어린 마음들도
하얀 침묵 아래 고요히 머뭅니다

​무언가를 채워야 한다는 강박을 내려놓고
그저 비어 있는 풍경 속에 나를 앉혀둡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 여백이 바로 당신의 쉼표라고
세상은 온통 하얗게 고개를 끄덕입니다

​서두르지 않는 눈송이처럼
나의 마음도 이 여백 위에 잠시 머물다 보면
비로소 보이기 시작합니다
채우는 것보다 아름다운 것은
있는 그대로를 가만히 두는 일임을

온기의 정주(定住)
​

겨울에 머문다는 것은
차가운 바람을 피해 달아나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가장 따뜻한 방 하나를
찾아내는 일인지도 모릅니다
​

외투 깃을 바짝 올리고
두 손을 주머니 깊숙이 찌른 채
걷는 속도를 늦추어 봅니다

빠르게 스쳐 지나갈 땐 보이지 않던
사람들의 하얀 입김이
서로의 어깨를 보듬는 다정한 구름처럼 보입니다
​시린 세상이 문틀을 흔들 때마다
나는 더욱 깊이 나에게 머뭅니다

밖으로 흩어지던 마음들을 불러 모아
작은 촛불 하나 켜두고 마주 앉으면
비로소 들리는 소리들이 있습니다
​
얼어붙은 창을 어루만지는 바람의 위로와
내 안에서 조용히 끓어오르는
낮고 단단한 생의 의지들

이 시린 계절의 한복판에서
내가 나를 온전히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겨울은 이미 따스한 안식처가 됩니다

겨울 햇살의 긴 꼬리

​낮달이 걸린 오후 두 시
창가 깊숙이 발을 들이미는
노란 고양이 같은 햇살 한 줄기
​
여름날엔 그리도 따갑더니
겨울의 햇살은 어찌 이리도 수줍은지
바닥에 납작하게 엎드려
내 발등 위에서 잠시 졸다 갑니다
​

해의 꼬리가 조금씩 짧아질수록
나는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그 온기를 한 방울이라도 더 붙잡으려
슬그머니 의자를 옮겨 앉습니다
​

찰나의 따스함이 소중한 건
그것이 곧 사라질 것을 알기 때문이 아니라
이 시린 계절 속에서도 잊지 않고
나를 찾아와준 다정한 안부이기 때문입니다

함박눈이 지우는 길

​밤새 눈이 내렸습니다
어제까지 내가 걸어왔던
삐딱하고 어지러운 길들이
하얀 이불 아래 감쪽같이 사라졌습니다
​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멍하니 창밖을 내다봅니다
길이 사라졌다는 것은
어쩌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겨울이 내어준 가장 자유로운 지도입니다

​서둘러 발자국을 내고 싶지 않습니다
누군가 먼저 지나가길 기다리는 대신
아무도 밟지 않은 저 정결한 고요 위에
나의 마음을 가만히 눕혀 봅니다
​

상처 난 기억도, 서둘러 냈던 욕심도
눈 아래 묻히면 그저 포근한 풍경일 뿐
세상이 이토록 깨끗해진 건
우리에게 다시 시작할 기회를
말없이 건네주는 것이겠지요

​길이 보이지 않을 때
비로소 나를 보게 됩니다
멈춰 선 자리에서 시작되는
나만의 고요한 행진

언 땅에 귀를 대면
​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
아무런 기척도 느껴지지 않는 날
나는 가만히 무릎을 굽히고
단단한 대지 위에 귀를 대어 봅니다
​

딱딱한 흙 속에 갇혀
숨을 거둔 줄로만 알았던 생명들이
낮고 웅장한 목소리로
봄의 안부를 묻고 있습니다
​

차디찬 지표면 아래에서
수천 마리의 씨앗들이
제 몸의 온기를 모아 껍질을 녹이고
어둠 속에서 뿌리를 내리는
치열하고도 고요한 전투
​
멈춘 것은 계절이 아니라
나의 성급한 시선이었음을 깨닫습니다
가장 조용할 때 가장 뜨겁게 일하고
가장 멈춰 있을 때 가장 멀리 나아가는
저 강인한 대지의 맥박을 듣습니다

단단한 계절의 고백

​차가운 공기가 가슴 깊이 들어올 때면
비로소 마음이 한곳으로 모입니다
어디로든 흘러가려 애쓰던 생각들이
어느새 단단한 평화가 되어
내 안에 조용히 머뭅니다
​

얼어붙는다는 것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흔들리던 마음들이 제 자리를 찾아
서로를 꼭 붙잡아주는 일입니다
​

세상이 꽁꽁 얼어붙을수록
나는 내 안의 온도를 더 가만히 살핍니다
밖은 서늘한 침묵뿐이지만
그 속에서 피어오르는 다정한 기운은
오직 나만이 아는 비밀스러운 불씨입니다

비록 거창한 꽃은 피우지 못해도
이 시린 계절을 묵묵히 견뎌내는 것만으로
우리는 이미 충분히 단단해졌습니다
​

어둠 속에서도 길을 잃지 않는 건
내 안에 켜둔 작은 등불 하나가
가장 차가운 밤에도
식지 않고 빛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방 안의 계절
​

창밖엔 찬 바람이 서성이고 있지만
내 방 안엔 작은 온기들이
조용히 자리를 잡고 앉아 있습니다

​코끝을 스치는 따뜻한 차의 향기,
무릎 위에 놓인 포근한 담요 한 장,
그리고 은은하게 퍼지는 스탠드의 주황빛
​

세상이라는 커다란 계절 속에서
나는 나만의 아주 작은 계절을 만듭니다
누구의 시선도 닿지 않는 이곳에서
나는 비로소 외투를 벗듯 긴장을 내려놓고
가장 편안한 자세로 나에게 머뭅니다
​

추위가 세상을 넓게 덮을수록
나의 방은 더욱 아늑하고 깊어집니다
멀리 가지 않아도 충분한 풍경
이 작은 공간이 오늘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넓은 안식처입니다

정적의 무늬
​

불을 끄자
방 안으로 겨울밤의 깊이가
밀물처럼 들어옵니다
​

가구들이 제 자리에 낮게 엎드리고
벽에 걸린 시계 소리만
정적의 살결을 툭, 툭 건드리는 시간
​

창가에 비친 그림자를 가만히 봅니다
낮 동안 나를 옥죄던 이름표들을 떼어내고
오직 실루엣으로만 남은
담백한 나를 대면합니다
​

말들은 눈송이처럼 흩어져 사라지고
비워진 가슴 속엔
차갑고도 투명한 평화가
나이테처럼 둥글게 고입니다

아무것도 더할 필요 없는
이 완벽한 멈춤

​나는 비로소
나라는 고요 속에
깊이, 정주합니다

불씨의 안부
​

겨울이 깊을수록
사람들은 저마다 가슴 속에
작은 화로 하나씩을 들여놓습니다
​

찬 바람에 거칠어진 손을 맞잡을 때
장갑 너머로 전해지는 눅진한 온기
그것은 서로의 내밀한 겨울을
말없이 쓰다듬는 다정한 안부입니다
​

세상이 꽁꽁 얼어붙어야
비로소 확인하게 되는 것들
우리가 서로에게 내어줄 수 있는 건
거창한 햇살이 아니라
작은 체온 하나라는 그 평범한 진리
​

식지 않는 마음들이 모여
이 시린 계절의 외벽을 데우고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불씨를 나누며
가장 추운 밤을 가장 따뜻하게
통과하고 있습니다

고요의 품

​이제 알겠습니다
겨울은 나를 가두러 온 것이 아니라
포근한 품으로 나를
쉬게 하려 온 것임을

​하얀 눈이 세상을 덮은 것은
모든 소란을 잠재우고
내 마음의 낮은 소리에
귀 기울이라는 다정한 권유였습니다

​외투를 벗고
겨울이 내어준 침묵의 의자에 앉아
나는 비로소 나 자신과
나란히 어깨를 맞대고 앉습니다
​
시린 계절을 지나오느라 고생 많았다고
이 정적 속에 머무는 것만으로도
너는 충분히 아름답다고
겨울은 나의 등을 가만히 쓸어내립니다
​
창밖의 어둠마저 푸근해지는 밤
나는 이 깊은 고요의 품 안에서
가장 평온한 꿈을 꾸기 시작합니다
​

​스무 편의 고요를 함께 건너와 주신 당신에게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 글이 당신의 시린 손을 녹여주는 작은 온기가 되었기를 소망합니다

​고요의 품에서, Līlā (लीला)드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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