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부: 마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다 3장. 인정받고 싶은 마음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 왜 몰라줄까?" 이 말은 나도 모르게 속으로 삼켰던 수많은 마음의 결론이었다. 직접 말한 적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늘 기대했다. 알아주길, 눈치채주길, 인정해주길. 어쩌면 우리가 느끼는 서운함의 가장 깊은 뿌리는 바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일지도 모른다. 내가 쏟은 시간, 노력, 애정이 상대의 반응 속에 반영되지 않을 때 서운함은 더 쉽게 자라난다. 나는 인정이라는 단어가 거창한 보상이나 칭찬만을 뜻하는 줄 알았다. 하지만 진짜 인정은 "네가 그런 마음이었구나" "그렇게 애썼던 거 나도 느껴졌어" 이런 작은 말들 속에 있었다. 그 작은 말이 없을 때 나는 내가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느껴졌다. 존재가 투명해지고, 마음이 허전해졌다. 결국 인정받지 못한 감정은 곧 사라져도 괜찮은 사람이라는 느낌으로 이어졌다. 이 마음은 어린 시절로부터 시작된 것 같다. 칭찬을 받을 때만 사랑받는다고 느꼈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때만 내가 필요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래서 점점 ‘나는 어떤 상태여야만 인정받는가’를 고민하게 되었고, 결국 ‘있는 그대로의 나’는 충분하지 않다고 믿게 되었다. 그 믿음은 지금도 내 감정의 중심에 고요히, 그러나 깊게 자리하고 있다. 인정욕구는 나쁜 게 아니다. 누구나 인정받고 싶어 하고,자신의 존재가 의미 있기를 바란다. 문제는, 그 욕구가 충족되지 않을 때 우리는 스스로를 부정하기 시작한다는 점이다. “나는 왜 이 정도도 못했지?” “다들 잘하는데 왜 나만 뒤처질까?” “저 사람은 아무 노력 없이 인정받는데…” 이런 마음들은 곧 자기비하로 바뀌고, 관계 속에서 불균형한 비교를 만들어낸다. 나는 가끔씩 내가 하고 있는 ‘배려’가 진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인지, 아니면 인정을 받기 위한 무의식적 전략은 아닌지 혼란스러웠다. 누군가 나의 수고에 무심하거나 반응이 없을 때, 나도 모르게 화가 나고 “나는 늘 이렇게만 살아야 하나”라는 피로감이 밀려왔다. 그건 상대의 문제가 아니라 내 안에 쌓인 인정 결핍의 무게였다. 어떤 날은 혼자서 묻고, 혼자서 대답했다. “왜 인정받고 싶은 거지?” “인정받지 못하면 내가 사라질 것 같아서.” “왜 그렇게 느끼는 걸까?” “내가 충분한 존재가 아니라고 믿고 있어서.” 이런 대화를 통해 나는 처음으로 나에게 솔직해질 수 있었다. 그동안 내가 구했던 건 누군가의 칭찬이 아니라 내가 나를 인정하는 경험이었다는 걸. 관계 속에서 인정욕구가 채워지지 않을 때 우리는 두 가지 방향으로 움직인다. 하나는 더 열심히, 더 잘하려 애쓰는 과잉반응. 또 하나는 기대를 끊고 무관심해지는 포기. 나는 둘 다 해봤다. 사람들에게 잘 보이려 애쓰다가 어느 날 모든 걸 내려놓고 “이젠 나도 그냥 나대로 살래”라고 선언했던 날도 있었다. 하지만 그 말조차 사실은 ‘나 좀 봐줘’라는 외침이었다. 인정욕구는 부끄러운 게 아니다. 중요한 건 그 욕구를 ‘어디에’ 두느냐는 것이다. 타인의 말에만 기대면 늘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하지만 내 안에서 “나는 이만큼 해낸 나를 안다”고 말할 수 있으면, 더 이상 외부의 반응에 휘둘리지 않는다. 그 한마디를 내 안에서 들을 수 있을 때, 비로소 나는 감정을 보호할 수 있는 사람으로 성장한다. 이제 나는 가끔 거울을 보며 말한다. “너 정말 애썼어.” “지금 모습도 괜찮아.” 그 말들이 처음엔 어색했지만 조금씩, 나를 단단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내 진심을 몰라줘도 내가 그 진심을 알아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는 걸 조금씩 배워가는 중이다. 이제는 타인의 인정보다 나 자신에게 고개를 끄덕이는 일이 더 중요하다. ‘왜 그 말이 아팠을까’를 따라가다 보면 늘 도착하는 질문이 있다. “나는 왜 그렇게 인정받고 싶었을까?” 그 질문을 마주한 지금, 나는 조금 덜 서운하고, 조금 더 내 편이 되어줄 수 있다. 사랑받고 싶었던 마음, 보이고 싶었던 마음, 그 모든 감정을 부정하지 않고 인정해주자. 그것이 내가 나에게 주는 가장 깊은 위로이자 회복이다. 4장. 기대와 실망 사이 우리는 모두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가족에게, 친구에게, 연인에게, 동료에게. 기대는 어떤 관계든 자연스럽게 생겨난다. 함께한 시간만큼, 나눈 말들만큼 “이 사람은 이 정도는 해줄 거야”라는 마음이 생긴다. 그러나 기대는 말해지지 않으면 쉽게 오해가 되고, 결국 실망으로 이어진다. 문제는 대부분의 기대가 말로 확인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말하지 않았기에, 상대는 알지 못하고 나는 몰라줬다며 상처받는다. “생일엔 먼저 연락해줄 줄 알았어.” “내가 힘든 거 알아채 줄 줄 알았어.” “이 정도면 이해해줄 줄 알았어.” 이런 기대는 표현되지 않은 채 마음속에 머문다. 그러다 무심한 한순간, 기대는 실망으로 바뀌고 실망은 곧 서운함으로 굳어진다. 그렇게 말하지 못한 기대는 조용히 관계의 온도를 식힌다. 기대는 ‘희망’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하지만 표현되지 않을 때 상대를 시험하는 도구가 되기도 한다. “말 안 해도 알겠지.”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이젠 알잖아.” 그런데 대부분의 사람은 말하지 않으면 모른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을 온전히 읽어낼 수 없듯이, 상대 역시 내 마음을 읽어낼 수 없다. 기대와 실망의 악순환은 특히 가까운 관계일수록 더 강해진다. 가족, 연인, 오래된 친구일수록 우리는 더 많이 기대하고, 그만큼 더 쉽게 실망한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들에게 “너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라는 전제를 두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전제는 종종 착각일 수 있다. 실망은 기대의 그림자다. 기대를 거둘 수 있다면 실망도 줄어든다. 그러나 기대하지 않고 관계를 맺는 건 또 다른 외로움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우리는 애매한 선을 오간다. 기대하고 싶지만 실망하고 싶지 않은, 가깝고 싶지만 상처받고 싶지 않은 마음. 이 양가감정은 인간관계를 복잡하게 만든다. 내가 했던 많은 서운함은 결국 “기대가 어긋났을 때” 일어났다. 상대가 무심했던 게 아니라 내가 말하지 않은 바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말하지 않고 바라는 건 서툰 사랑의 방식일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조금씩 기대를 다르게 표현해보기로 했다. “나는 이런 게 고마워.” “그럴 땐 함께 있어줬으면 좋겠어.” 그 말 한마디가 기대를 소통으로 바꿔준다. 기대를 표현한다는 건 용기가 필요하다. 거절당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표현하지 않으면 실망만 깊어질 뿐이다. 차라리, 거절을 통해 서로의 감정 선을 확인할 수 있다면 그게 더 건강한 관계 아닐까. 기대는 감정의 책임을 상대에게 전가하기 쉽다. 표현은 그 책임을 서로 나누는 일이다. 기대하지 말자는 결심도 해본 적 있다. 하지만 그건 관계를 포기하겠다는 말과 같았다. 사람은 누구나 작은 기대를 품고 살아간다. 기대는 소통의 출발선이다. 문제는 숨겨진 기대다. 말하지 않아도 알아주길 바라는 기대. 그건 상대에게 보이지 않는 의무를 지우는 일이다. 나는 이제 기대 대신 제안을 해보려 한다. “이번엔 네가 먼저 연락 줄래?” “그럴 땐 그냥 내 편 들어줘.” 이런 말은 관계를 더 가까이 이끄는 연결고리가 된다. 표현된 기대는 상대에게 부담이 아니라 관계를 지키는 가이드라인이 된다. 그리고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관계가 진짜 나를 보호해주는 울타리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