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감보다 무서운 독기 주변에 많은 분들이 독감으로 고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를 진짜 아프게 하는 것은 독감이 아니라 독기인 것 같습니다. 독한 새해입니다. 감기는 말할 것도 없고, 재앙도 독해지고, 나라 안팎의 모든 형편도 점점 독해지고 있습니다. 모두가 아픕니다. 어찌 살 수 있을까요? 어찌 나을 수 있을까요? 저 역시 이 ‘독기’에 걸려 어찌해야 할지 몰라 쩔쩔매며 기도하는데, 저에게 이런 마음을 주셨습니다.
일단, 주 안에서, 내가 해야 할 일을 하자.
독해지는 것들 앞에서 독이 오를수록, 유일한 약인, 아침 묵상도, 매일 통독도, 주여 기도도 복용하지 않았습니다. 기도할 때 이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제 안에 있는 ‘독기’를 구체적으로 먼저 느끼게 해주셨습니다. 그 ‘독기’는 다름 아닌, 세상 것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뻔한 것들을 향한 사랑이었습니다. 돈, 자리, 인정. 그러나 여전히 저를 온통 사로 잡고 있는 사랑의 대상이었습니다. 그게 진짜 ‘독기’였습니다.
그 ‘독기’를 쪼갤 수 있는 도끼는 역시, 기도∞말씀 밖에 없습니다.
그제서야, 연말연초 2주간 멈춰 섰던 <봉독>이 너무도 그리웠졌습니다.
‘독기’에 맞서, 주 안에서 저에게 하라 하신, 제가 해야 할 일 <봉독>의 시동을 다시 걸었습니다.
살 것 같았습니다.
○ 정초를 ‘태초에 말씀’으로 시작했습니다 요한복음 1:1~4절 말씀은 읽을 때마다 읽을수록, 놀랍고 신비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2025년 <봉독>은 바로 이 요한복음, 태초에 계셨던 ‘말씀’으로 열었습니다. ‘말씀’을 받들어 읽는 <봉독>을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기를, 그 안의 ‘생명’을 만나, 나와 우리가 살아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 봉독을 가장 든든한 친구와 시작했습니다 이번 39번째 <봉독>에는 황규연 전도사님이 함께해 주셨습니다. 황규연 전도사님은 제 신대원 친구입니다. 사실 친구라는 말로는 우리 관계를 표현하기에 부족합니다. 우리는 서로 ‘짝’입니다. 신대원 3년 내내 우리는 ‘짝’이 되어 한 책상에서 같이 살았습니다. 짜증냄이 특기는 저와 달리, 황규연의 특기는 사모함이었습니다. 신대원에 오기 위하여, 하나님의 종이 되기 위하여, 10년 가까이 준비하며 기다린 사람이었습니다. 황규연은, 그 중심에 있는 말씀과 하나님에 대한 사모함으로, 연약한 제가 넘어질 뻔할 때마다 업어 주고 달래 주었습니다. 내 친구이자 짝인, 그 황규연과 다시 ‘봉독당’에 나란히 앉아 요한복음을 봉독할 수 있는 은혜를 입었습니다.
그는 천천히 봉독합니다. 그는 힘 다해 봉독합니다. 발음이 정확하지 않아도, 그의 봉독은 쩌렁쩌렁 울리고, 성령님과 손을 꼭 잡고 거침없이 봉독해 나갑니다. 봉독 가운데, 주님이 황규연에게 주시는 힘을 느낄 수 있었고, 그 힘으로 정성 다해 봉독해 나가는 친구의 모습은 아름다웠습니다.
○ 은혜의 이불, 봉독 순전히 말씀을 받들어 읽는 봉독을 하다 보면 이런 느낌이 들곤 합니다. 말씀이 나를 따뜻하게 덮어 주는 것 같습니다. 이불처럼 말입니다. 오리 털, 거위 털보다 가벼운, 하지만, 햇빛보다 따뜻한 이불처럼 말입니다. 그 이불을 덮고 숨을 쉬며 말씀을 내쉴 때, 내 안의 독한 것들이 빠져나가는 것만 같습니다. 숨을 마시며 말씀을 들이킬 때, 내 안에 생명이 들어오는 것만 같습니다. 독감에 걸렸을 때 따뜻한 이불을 덮고 한 번 끙끙 앓고 나면 낫는 것처럼 말입니다.
독기에 걸리셨다면, 그래서 아프시다면, 그래서 낫기를 원하신다면, <봉독>과 한 번 요한복음 이불을 덮어 보시는 건 어떠신가요?